# 82
그 오빠들을 조심해 82화
"제가 지금까지 본 에단 비숍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지만 사실은 속마음이 따뜻하고 정도 많은 사람이니까요."
역시 나는 그릇이 그렇게 큰 사람은 아닌가 보다. 나에게는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의 행복이 가장 최우선이었다. 그 밖의 다른 것들까지 신경 쓰기에는 내 울타리가 품을 수 있는 공간이 좁았다.
"유진 오빠도 당신을 믿기 때문에 제 호위 기사로 둔 거겠죠."
그래서 나는 마주한 사람을 향해 그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담담히 말해주었다.
"저도 지금까지 제가 봐왔던 비숍 경을 믿어요."
그러자 에단은 지금껏 상상해 본 적 없는 말을 들은 것처럼 자리에 한참 동안이나 우두커니 서 있다가, 이내 내게서 얼굴을 가리듯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에단."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지만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 나는 대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창밖으로 새어드는 해가 서서히 붉은 기운을 머금었다. 유진이 돌아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
"찾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유진은 붉은 노을이 방 안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때에서야 내 앞에 모습을 나타냈다. 문가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지금껏 기다렸던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내 작은 속삭임에 유진도 나직하게 말했다.
"네가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어."
그는 평상시와 다름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약간은 서늘하고, 또 약간은 건조한 그 표정. 그것을 보고 나는 쓰게 웃었다.
"오늘 있던 일, 역시 들었구나. 그럼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도 이미 다 알겠네."
묵직한 발소리가 조용한 방 안에 얼룩처럼 눌러 찍혔다. 내게 다가오며 유진도 어렴풋이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 역시 기분이 좋아서 지어 보이는 미소는 아니었다.
"사실 네가 그렇게 말해줄 줄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어느덧 지척까지 다가온 유진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웃음기를 거둔 그의 얼굴에 창밖에서 새어든 붉은 빛이 머물렀다. 그는 그 상태로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다가 다시금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는 어쩌면, 네가 모든 걸 다 알고도 괜찮다고 말해주기를 바라고 에단을 네 옆에 둔 건지도 몰라."
라벤더 코르디스와 에단의 말을 들었을 때, 한편으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철두철미한 유진답지 않게 왜 하필 에단을 내 호위로 두었을까. 그가 내 곁에 있다면 이와 같은 말이 언제든 귀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아니, 나는 분명 내가 한 짓들을 다 알고도 네가 나를 받아들여 주기를 바랐던 것일 테지."
그리고 유진은 어쩌면 자신이 일부러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래. 그래도 상관없다고, 괜찮다고. 네가 해주는 그 말이 듣고 싶어서."
그 말의 끝에 유진이 부스러지듯 웃었다. 그 웃음은 조금 전 그가 지어 보였던 미소보다 내 가슴을 더 시리게 만들었다.
"너희들을 바스티에에 보내고 많은 일이 있었어. 에단은 날 도운 사람 중에 하나이고."
굴곡 없이 이어지는 음성이 귓가에 스몄다.
"사실 어느 정도 일이 끝난 후에 에단에게 슈마하를 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어. 난 그 이름조차 이 땅에 남겨둘 마음이 없었거든. 그럴 만한 아량도, 자비도, 그리고 어쩌면 여유도 없었어."
그리고 유진은 쉽게 인정했다.
"변명할 생각은 없어. 네가 들은 게 모두 맞아. 내가 다 죽였어."
언뜻 무심하게까지 느껴지는 담담한 목소리가 이어지는 동안 나는 마주한 사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를 위협했던 사람도, 또 앞으로 위협이 될 것이라 판단했던 사람도. 전부 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유진이 내게 숨기고 싶어 한 부분까지 전부는 아닐지라도, 어렴풋이 그가 한 일들을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러 파헤치고 싶지는 않았다.
내가 무언가를 깊숙이 파고들어 알게 되면 자연히 유진도 그 사실을 알게 되고, 그렇게 되면 괜히 곪은 상처를 건드리는 꼴이 될 것 같았다.
가끔은 묻어두는 것이 더 좋은 일도 있는 법이다. 어쩌면 나는 이 일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사람들이 나를 두려워하고 또 경멸하는 이유는 명백해. 난 내가 살기 위해서라면 몇 번이라도 더 그런 짓을 할 수 있어."
하지만 역시 묻어둔 상처가 저절로 나을 리는 없는 것이다. 지금의 유진을 보고 나는 새삼스럽게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슴속에 밀려드는 먹먹함에 얕은 숨을 밖으로 몰아냈다.
"심지어 난 그 일을 후회조차 하지 않아. 아마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같은 일을 할 거야. 그게 에단과 내 결정적인 차이점이지."
유진은 그렇게 말한 뒤 살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어때? 질렸어?"
뒤이어 내가 입을 열었으나 그는 대답을 듣는 것을 거부하듯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비스듬한 옆모습을 보이고 있는 유진의 얼굴은 이제 아무런 표정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허공에 부스러지는 혼잣말 같은 속삭임에 나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역시 나는 너한테 좋은 사람일 수 없는 것 같아."
아,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차라리 나쁜 사람이 되고 말지. 이런 나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하려면, 얼마든지 하라지.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앞에 있는 유진에게 손을 뻗었다.
"고집불통. 멍청이."
내 바보 같은 사람.
나에게 안긴 유진은 분명 내 품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컸지만, 그럼에도 어째서인지 나는 그가 작게만 느껴졌다.
어쩌면 지금 내게 안겨 있는 것은 어릴 때 헤어졌던 14살의 유진이라 그런 것일 수도 있었다. 겉모습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그 속만큼은.
"혼자서 외로웠지?"
저항 없이 내게 안긴 유진이 자그마한 내 속삭임에 몸을 작게 미동했다. 나는 목덜미에 흩뿌려지는 야트막한 숨결을 느끼며 그를 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이제는 계속 같이 있자."
더 이상 외롭지 않게, 더 이상은 그 긴 밤을 혼자서 견디지 않아도 되도록.
14살의 소년이었던 유진이 기댈 곳 하나 없이 혼자서 해내야만 했던 일들이 얼마나 힘겨웠을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도 많은 밤을 울고 싶었을 것이다. 아마도 많은 아침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는 동안 유진의 마음속의 한 부분은 돌이킬 수 없이 깨지고 부서져 버렸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선명한 결락이 내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설령 세상 모든 사람이 당신한테 손가락질한다 해도 나는 그러지 않아."
그가 한 것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유진을 해치려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릴 때 그가 다리를 다쳤던 사고 이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어리고 힘없는 내가 유진에게 약점이 될 위험만 없었다면 나는 그런 그를 혼자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유진이 한 일들을 이해했다.
아니······. 하지만 사실은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나는 새삼스럽게 아마도 내가 죽을 때까지 이 사람을 놓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에게서 돌아설 수도, 그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언젠가부터 나도 모르는 새 그렇게 되어 버렸다.
"이번에는 내가 말해줄게."
만약 이 사람을 꼭 비난해야겠다면 차라리 나를 욕했으면 좋겠다. 이 가엾은 사람은 이제 그만 내버려 두고.
"전부 다 괜찮으니까, 하고 싶은 건 다 해.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게 뭐든 가져도 좋아."
나는 언젠가 그가 내게 해주었던 말을 그대로 읊조려 주었다.
"좀 더 욕심을 내도 돼. 이제는 당신만을 위해서 살아."
아마도 이제껏 아무도 그에게 이런 말을 해주지 않았겠지. 마냥 보호받으며 자라야 할 유년 시절에조차 그는 어른이어야만 했으니까.
"아무것도 포기하지 말고, 아무것도 희생하지 말고. 당신은 좀 더 이기적이어도 돼."
그렇다면 내가 말해줄 테다.
"있는 힘껏 행복해져."
만약 아무도 그에게 허락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대신 그렇게 말해 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든 해도 괜찮아."
그가 우리를, 나를 지키기 위해서 무슨 일이라도 할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나도 그런 그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 무엇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하기 짝이 없는 맹목적인 마음인지 나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이 애처롭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더 이상 다치지 않게 지킬 수만 있다면.
유진은 나한테 안긴 채로 느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이내 바닥을 긁는 듯한 낮게 갈라진 음성으로 속삭였다.
"지금 네가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 넌 모를 거야."
내가 무엇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알면 이런 말, 할 리가 없어."
하지만 그것이 무엇이라 해도 내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괜찮아."
나는 유진의 등을 다독이듯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설령 오빠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비난받을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다고 해도."
어쩌면 내게 그럴 자격 같은 건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내가 다 용서해."
할 수만 있다면 이 사람의 모든 죄까지 전부 내가 짊어지고 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용서해 준다고?"
"그래."
내 말에 유진이 되물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래."
"너한테 아주 큰 잘못을 저질러도?"
노을이 한층 짙어져 시야가 아까보다 더 붉게 물들었다.
"응, 그래도 괜찮아."
유진은 한동안 말없이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천천히 얼굴을 들어 내 눈을 마주했다.
"넌 내가 같이 지옥에 떨어지자고 해도 아마 거부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말하는 유진은 어째서인지 고통스럽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일그러진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보고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유진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사실은 그래서 너한테 손을 잡아 달라고 하고 싶지 않았어. 이런 건 비겁하니까."
눈앞에 피어오르는 미소는 자책과 조소로 뒤범벅되어 있었다. 곧 그의 손이 내 손목을 붙들었다. 지난번 마차에서 손을 맞잡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와 맞닿은 살갗이 뜨겁게 타오르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나를 용서해 주겠다고?"
그것은 내게 다시 묻는 것이 아니라 조금 전 들은 말을 다시금 소리 내 되새기는 것에 가까웠다.
마침내 유진의 눈동자가 정면에서 나를 꿰뚫듯이 직시했다. 강렬한 빛을 품은 그 어둑한 검은 눈동자에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넌 후회할 거야."
숨결이 뒤섞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속삭였다.
단언하는 말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유진이 조금 전보다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서 그러지 못했다.
"나는 널 상처 입힐지도 몰라."
긴장된 숨이 작게 벌려진 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지척에 있는 입술이 당장에라도 닿을 듯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짙은 화인이 파묻힌 곳은 유진에게 단단히 붙들린 손이었다.
"그래도 늦었어."
붉은 노을이 그의 등 뒤로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흑과 적이 뒤섞인 그 강렬한 시간의 틈새 속에서는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 우리 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이제는······."
그의 손이, 그의 입술이 닿아 있는 살갗이 아릴 정도로 뜨거웠다.
"정말 늦었어."
그 상태로 유진은 말했다. 나로서는 모르는 무언가를 내게 사죄하듯이, 절박한 숨을 내 손 안에 흩뿌리며.
마치 내가 그의 유일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