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그 오빠들을 조심해 79화
"루이제, 나도 잠깐만······."
생각할수록 나도 다이스가 걱정되어서 아무래도 한번 가봐야 할 것 같았다.
"하리 양!"
그런데 그때, 라벤더 코르디스가 풍성한 모피 코트를 펄럭이며 내 앞에 나타났다.
"여기에 있었네요. 아까부터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요."
그녀는 춥지도 않은지 목과 쇄골 부근이 훤히 드러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물론 까만 모피 코트를 그 위에 걸치기는 했지만 보기만 해도 몸이 으슬으슬해질 정도로 추워 보였다.
"안녕하세요, 코르디스 양."
"성화를 올릴 때 하리 양의 옆에 있어도 될까요? 조금 전에 다이스 전하께서도 도착하셨다고 하니 아마 금방 시작될 것 같은데."
"물론이죠."
"그럼 저랑 저 앞으로······."
"그런데 죄송해요, 코르디스 양. 전 볼일이 있어서 잠시만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식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올 테니까······."
나는 미안한 얼굴로 라벤더 코르디스에게 말했다. 역시 신년제가 시작되기 전에 다이스를 한번 봐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디를 가시는데요?"
"잠시 저쪽에······."
그런데 라벤더가 갑자기 사나운 얼굴을 하며 내게 쏘아붙였다.
"저쪽은 방금 벨론티아 양이 향한 곳이잖아요. 너무 벨론티아 양하고만 친하게 지내는 것 아닌가요?"
그녀는 나를 보러 오기 전에 벨론티아가 어디론가 향하는 모습을 본 것 같았다. 그래서 지금 내가 이동하려는 것이 그녀를 만나기 위해서라는 생각에 기분이 상한 듯했다.
"로자벨라 양을 만나러 가는 게 아니에요."
"그래요?"
하지만 라벤더는 이미 내 말을 믿지 않는 것처럼 콧방귀를 뀌었다.
"이제 보니 하리 양은 거짓말을 곧잘 하는군요."
나도 슬슬 기분이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라벤더에게 거리를 두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녀에게 예의를 다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라벤더는 지금 내게 빈정거리듯 말하며 무례하게 굴고 있었다.
"좋아요, 가세요. 벨론티아 양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늦지 않게 가보셔야죠. 어서 서둘러야 벨론티아 양의 뒤꽁무니라도 쫓을 수 있지 않겠어요?"
나는 잠시 동안 얼굴을 굳히고 라벤더 코르디스를 바라보다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자리에 멈추었던 발길을 뗐다.
바로 그때, 라벤더 코르티스가 내게 발을 걸었다.
"아······!"
공교롭게도 우리가 있는 곳의 옆쪽은 호수의 낮은 물가였다. 라벤더는 심지어 자신의 발에 걸려 휘청이는 나를 슬쩍 옆으로 밀쳐 내기까지 했다.
첨벙!
나는 그녀가 바라던 대로 물 위로 떨어졌다.
"어머, 하리 양! 조심했어야죠."
머리 위에서 어쩌면 좋냐는 듯이 크게 외치는 목소리가 참으로 가증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지금 내가 떨어진 곳은 무릎 정도까지만 수면이 올라와 있는 얕은 물가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물에 빠질 때 짚은 손과 옷의 소매 부분을 포함해, 특히 드레스의 밑 부분은 완전히 쫄딱 젖어버렸다.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위에 있는 라벤더를 찌푸린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아니, 도대체 나이가 몇인데 유치하게 발이나 걸고 있는 거야? 우리 셋째 진상도 10년 전에 그만둔걸! 게다가 지금은 엄동설한이라 차가운 호수에 닿은 팔과 다리가 꽁꽁 얼 것처럼 시렸다.
언니, 나 마음에 안 들죠? 근데 나도거든! 뭐 저런 어이없는 애가 다 있다지?
내 변고를 알아차린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호숫가로 더 가까이 다가들었다. 라벤더 코르디스는 여전히 무고한 척 호들갑을 떨며 외치고 있었다.
"하리 양, 괜찮아요? 이를 어쩌면 좋아. 왜 가만히 있다가 혼자서 넘어지고 그······ 꺄악!"
그러나 그녀의 뻔뻔함은 오래 가지 못했다. 나는 갑자기 내 옆쪽으로 떨어지는 라벤더를 황당하게 쳐다보았다.
풍덩!
"어머, 코르디스 양! 조심했어야죠. 왜 칠칠맞게 혼자서 넘어지고 그러시나요?"
이번에는 머리 위에서 루이제가 외쳤다. 잘은 몰라도 라벤더를 물에 빠뜨린 것은 루이제인 것 같았다.
이 모든 일이 1분도 되지 않는 사이에 벌어졌다는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하리!"
곧 귓가에 남성 특유의 굵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 목소리가 한 사람의 것이 아닌 걸 보니 오늘 신년제에 함께 참석한 두 형제나 요하네스인 것 같았다.
그 직후, 누군가 주저 없이 내가 있는 물가로 발을 들였다.
"아니, 그냥 나 혼자 올라갈 수 있는데······."
나는 다가오는 유진을 당황스럽게 쳐다보았다.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움직이지 마. 내가 갈게."
사실 물을 먹은 드레스가 무거워져서 움직이기 힘들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유진까지 옷을 적시며 나를 도와주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점차 가까워지는 유진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게 식어 있어서 나는 더욱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했다.
"으앗!"
그런데 나를 더욱 당황하게 할 만한 일은 다음 순간 일어났다.
유진이 그대로 나를 물에서 건져 안아 든 것이다!
어억, 잠깐만요! 이건 좀 아니잖아요! 보는 눈도 많은데 이런 모양새는 좋지 않아!
"자, 잠깐만, 이건 좀 아니라고 생각······."
"가만히 있어."
하지만 유진은 내가 화들짝 놀라서 버둥거리거나 말거나 굳은 얼굴을 한 채 그대로 나를 데리고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언뜻 시선을 돌리니 라벤더가 백지장처럼 희게 질린 얼굴을 하고 유진을 올려다보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조금 전 물에 제대로 빠졌는지 나보다 더 홀딱 젖어 있었다.
하지만 유진이 움직여서 더 이상 라벤더의 상태를 살필 수는 없었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사람들이 곧 내 시야에 들어왔다.
악, 나는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리고 싶어졌다. 하지만 호수에 담갔던 손이 꽁꽁 얼어붙어서 마음대로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하리, 괜찮아?"
"시종 어디 있어? 지금 당장 수건이랑 담요 가져와!"
그래도 유진이 성큼성큼 걸음을 서두른 탓에 금방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요하네스와 에리히, 그리고 루이제도 곧바로 우리 옆에 붙었다.
저기, 그런데 왜 날 아직도 안 내려주는 거냐?
"오빠, 나 내려줘."
"지금 네 몸이 얼마나 얼음장 같은지 알아? 손도 발도 다 꽁꽁 얼었는데 어떻게 걸어가려고. 그냥 있어."
"아니, 괜찮으니까 제발 내려주세요."
그리고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니니? 저 물속에 들어갔던 게 나 혼자도 아니고. 하지만 내가 고집을 부려도 유진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앗, 그런데 라벤더 코르디스는?
"코르디스 양은?"
"알아서 하겠지."
내 물음에 에리히가 알 게 뭐냐는 듯 말했다. 날 빠뜨린 게 라벤더라는 사실은 아직 모르는 것 같았고, 그냥 말 그대로 남이야 어찌 되든 내 알 바 아니라는 마인드 같았다.
그래도! 아무리 걔가 날 물에 빠뜨린 나쁜 애라고 해도 그냥 저렇게 두고 오면 안 되지! 게다가 루이제가 세게 밀었는지 물에 살짝 빠진 나랑 달리 완전히 폭삭 젖었던데.
물론 귀족들이 다 같이 모인 신년제이니만큼 이미 시종이나 호위 기사들이 그녀를 물에서 건져 주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코르디스 양도 나왔어?"
"지금 다른 사람들이 꺼내주고 있어. 걱정하지 마."
뒤쪽을 힐끔 돌아본 유진이 말했지만 그래도 나는 왜인지 약간 의심이 되었다.
"지금 위로 올라왔어. 저쪽도 바로 마차로 이동할 것 같아."
요하네스까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때마침 시종이 커다란 담요를 가져와서 나는 거기에 둘둘 말린 채로 여전히 유진에게 안겨서 마차로 이동했다.
"언니, 저런 여자 신경 써주지 마! 언니가 왜 물에 빠졌는데!"
그때, 옆에서 종종걸음으로 따라오던 루이제가 심통 난 목소리로 외쳤다. 바로 그 순간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헉, 왜인지 저 말에 수긍하면 안 될 것 같아! 지금 내 주위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여러 개 있다고 내 촉이 말해주고 있어!
"그냥 내가 실수한 거야."
나는 남몰래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오늘이 신년제인데 나 때문에 말썽이 일어나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다행히 그 후로 세 남자와 루이제는 별말을 하지 않았지만······. 왜, 왜 이렇게 난 불안한 거지? 왠지 나한테 캐묻지 않으니까 더 걱정이 되고 막······.
"여벌 옷으로 갈아입어. 젖은 곳은 잘 닦아내고."
그래도 마차 안에는 보온 장치가 되어 있어서 따뜻했다. 나는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안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소매와 치맛자락이 젖은 채로 달라붙어서 조금 끙끙거리며 고생해야만 했다.
어느덧 밖에서는 신년제가 시작된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 참석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마차 안에 남았다.
다들 나랑 같이 있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올해의 무사 평안을 비는 첫 행사인 데다 다 같이 얼굴 도장 한 번 안 찍고 마차 안에 와글와글 몰려 있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다 보내버렸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담요에 얼어붙은 손과 발을 푹 파묻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려왔다.
"하리."
앗, 유진의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그도 옷을 갈아입었을까?
"오빠, 들어와."
나는 직접 문을 열어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열린 문밖으로 언뜻 다이스의 목소리가 새어들었다. 지금 그가 신년제의 축사를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고 있는 모양이다.
"안 가 봐도 돼?"
그러자 유진이 힐끔 옆쪽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상관없어. 아무도 안 찾아."
사실 그럴 리는 없었다. 유진은 누구나 말 한 마디 붙이고 싶어 안달을 내는 에른스트 공작이었으니까.
맞은편에 앉은 그의 시선이 담요 위로 떨어졌다. 순간 유진의 눈가가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좀 더 잘 덮고 있어."
그는 내 다리에 덮은 담요를 직접 정리해 주었다. 그 손길이 꽤나 꼼꼼했다. 나는 그런 유진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손이 아직도 빨개."
"괜찮아."
그의 시선이 닿은 손이 괜히 의식되어서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그럼에도 검은 눈동자는 무릎 위에 올려진 내 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잠시 후, 나는 피부 위로 스미는 온기에 손끝을 움찔 떨고 말았다.
느리게 움직인 유진의 손이 내 손등을 덮었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감싸 쥐었다. 순식간에 사방에서 따스한 체온이 밀려들었다.
분명 붙잡힌 것은 손이었는데도, 나는 사슬에 온몸을 묶이기라도 한 것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아까 내가 밖에서 루이제의 손을 잡아 체온을 나누어주었던 것처럼, 유진도 내게 그렇게 했다. 아래로 내리깔린 눈동자는 여전히 그와 나의 포개진 손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건 내게 있어 퍽 다행인 일이었다. 내 눈이 동요를 감추지 못해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을 것이 너무나 선명히 느껴졌다.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잠시 동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이번에야말로 앞에 있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굳게 닫혀 있던 유진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나는 너한테 좋은 오빠이고 싶어."
그 말을 들은 순간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가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무슨 의미일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 그가 내 마음을 눈치채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미 넘치도록 좋은 오빠야."
혹시 지금 내 표정이 어색해 보이면 어떡하지?
그러나 유진은 거기에서 더 이상 말을 잇지는 않았다. 나도 조용히 숨을 내쉬며 여전히 겹쳐진 살갗에서 파고드는 온기를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