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그 오빠들을 조심해 78화
나도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정말 이기적이었다.
로자벨라의 말을 들었을 때, 내가 먼저 생각한 것은 그녀가 아닌 유진이었다.
나는 사랑 없는 결혼생활을 하게 될 로자벨라를 걱정하기에 앞서 유진을 먼저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들의 결혼 생활에 앞으로도 존중과 신뢰는 있을지언정 사랑은 없을 것이라고 확언하는 로자벨라의 말에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하리."
무도회장에서 나와 마차가 있는 곳으로 걷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왔다.
"오빠."
불빛 아래에서 고요히 서 있는 사람은 유진이었다.
"로자벨라 양도 오늘 참석했던데."
"만났어. 배웅해 주고 오는 길이야."
바빠서 로자벨라와 함께 무도회에 참석해 주지 못한 대신 시간을 내 늦게라도 얼굴을 보러 온 모양이었다. 유진의 성격상 약혼녀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을 리 없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이제 겨울에 가까워지고 있는 가을이라 그런지 주위에 맴도는 공기가 제법 차가웠다. 내가 입은 옷이 그렇게 두껍지 않다는 걸 알았는지 유진이 슬쩍 눈매를 좁히며 말했다.
"그만 돌아가자. 먼저 마차에 타."
하지만 나는 곧바로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잡는 대신 물끄러미 그런 유진을 바라보았다. 무도회장 안에서 로자벨라에게 들었던 말이 다시금 머릿속에서 웅성거렸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마 앞으로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건 신뢰와 의무고, 그 안에 서로에 대한 존중은 있을지언정 사랑이라는 감정은 있지 않아요. 그뿐이라는 사실에 단 한 번도 아쉬움조차 느낀 적 없어요.'
"오빠."
이걸로 좋은 거야······? 정말 이대로도 괜찮은 거야?
그런 바보 같은 물음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가 이내 먼지처럼 부스러졌다.
유진은 자신을 불러 놓고 아무 말도 없는 나를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봤을 때도 지금의 내가 이상하니, 그가 의문을 갖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오빠, 로자벨라 양이 좋아?"
나는 불빛에 얼굴 한쪽을 금색으로 물들인 유진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유진은 잠시 동안 말이 없다가······.
"그래."
그렇게 말했다.
그래, 알고 있다. 이 이상 간섭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야. 게다가 비겁하잖아, 이런 거.
"응, 나도 로자벨라 양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나는 마주한 사람을 향해 웃어 보였다. 사실은 속이 욱신거려서 차라리 울고 싶었지만 그래도 웃었다.
어쩔 수 없잖아. 언젠가부터 당신이 잘 웃지 않게 되었으니까, 대신 내가 웃는 수밖에.
"그만 가자, 오빠."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할 수만 있다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사실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던 것 같아.
그러나 아마도 죽을 때까지 밝히지 못할 마음이었다. 나는 유진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 올랐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역시 이루어지지 않을 소원이었다.
***
한겨울, 카벨은 학술원을 졸업했다.
드디어 우리 둘째 진상이 졸업장을 받는구나! 나는 새삼스럽게 감격했다. 물론 카벨은 지난 생에도 무사히 학술원을 졸업했었지만 이번에는 전 과목 낙제라는 화려한 성적표까지 받아와서 유난히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게다가 지금의 미래가 내 기억과 똑같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보니 아무래도 불안한 마음이 있었다.
더군다나 지금까지 둘째 진상에게 유급의 위기가 몇 번이나 있었는지 아는가? 크흑, 그런데 졸업이라니. 정말이지 감개무량하구나.
"오빠! 졸업 축하해!"
"음하하핫! 내가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 졸업 시험 같은 건 그냥 껌이라니까!"
"응! 오빠가 최고야! 멋져!"
"음하하하하핫!"
오늘만큼은 카벨을 마음껏 추켜세워 줘도 될 것 같아서 나는 그에게 폭풍 칭찬을 해주었다. 그러자 둘째 진상이 기고만장해져서 입이 찢어져라 웃어댔다.
으음······. 날이 갈수록 둘째 진상을 칭찬하는 말이 획일화되는 것 같은 건 아마도 착각일 거다. 절대로 귀찮아서 대강 말하는 게 아니야!
"요한 오빠도 축하해."
"고마워."
오늘 졸업하는 것은 비단 우리 둘째 진상만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는 요하네스에게도 축하 인사를 건넸다.
요하네스는 학년 수석이라 오늘 졸업식에서 대표로 단상 위에 서게 된다고 했다.
크으, 참 훌륭하고 반듯하게 잘 자라기도 했지. 그럼에도 그는 '먼저 조기 졸업한 친구가 있어서 운 좋게 수석 자리를 차지한 것뿐'이라며 겸양을 보였다.
"졸업식 시작하겠다. 둘 다 가봐야지."
식을 앞두고 카벨과 요하네스는 학생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나도 에리히와 루이제와 함께 졸업식을 보기 위해 뒤쪽으로 향했다.
유진은 졸업식이 끝날 때쯤에나 올 수 있다고 했고, 바스티에 부부는 아까 전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하러 자리를 옮긴 참이었다.
그때, 내 옆으로 다가온 어떤 청년이 긴장한 얼굴로 내게 말을 걸었다.
"저, 에른스트 양. 혹시 저를 기억하십니까? 지난달에 있던 마조람 백작가의 연회에서 인사드렸었는데."
음?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안다는 듯이 웃어 보이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공자님도 오늘 졸업하시나요?"
"네, 그렇습니다!"
"축하드려요."
교복 위에 달린 푸른 리본 때문에 졸업생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주위에 우리를 힐끔거리며 쳐다보는 사람이 많았다.
한편에서는 '와, 틈새를 노리다니 용감한 놈······'이라거나 '앗, 내가 먼저 말 걸려고 했는데 선수를 치다니!' 같은 소리가 간간이 귓가에 울렸다.
"에른스트 양,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다음에 저와 함께······."
"한겨울인데 왜 이렇게 날벌레가 많아?"
그리고 그가 결심한 듯이 말을 이었을 때, 문득 내 옆에 있던 에리히가 입을 열어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것은 혼잣말이라기에는 너무 큰 목소리로 주위에 울려 퍼졌다.
"날벌레 잡는 건 카벨 형 전문인데."
바로 그 순간, 내 앞에 있던 청년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색이 되었다. 주변에서 흘러들던 소음도 기분 탓인지 일제히 뚝 멈추어진 느낌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실례했습니다아아아······!"
청년은 미처 내게 하려던 말을 끝맺지도 못한 채 눈썹이 휘날려라 달려갔다. 그 모습이 꼭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부터 꽁지가 빠지게 도망가는 것 같았다.
"와, 오빠 진짜 사악하다."
"내가 뭘."
질렸다는 듯한 루이제의 어투에 에리히가 뻔뻔하게 대꾸했다.
나는 나대로 기가 막혔다.
아니, 이놈이? 나는 지금까지 둘째 진상만 나한테 접근하는 남정네들한테 진상짓을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네놈도 공범이렷다?!
"내 혼삿길이 막히면 전부 다 두 사람 탓이야."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에 흠칫했다.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지난 생에서는 실제로 내 혼삿길이 막혔었지? 혹시 27살이 될 때까지 내가 노처녀였던 이유가 이 진상들 아니야?!
"아, 졸업식 시작한다."
하지만 곧바로 졸업식이 시작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득히 차오른 의심을 미처 표출하지 못하고 일단 이를 갈며 다음을 기약해야만 했다.
***
그 후 둘째 진상은 황궁의 제2기사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침마다 나란히 황성에 출근하는 유진과 카벨의 모습에 나는 괜히 뿌듯했다.
특히 둘째 진상이 저렇게 다 커서 사람 노릇 하는 모습을 보게 되다니! 크으, 이번이 두 번째지만 그래도 너무나 감동인 것.
"에른스트 양, 혹시 카벨 경께 이 편지를 대신 전해 주실 수 없을까요?"
게다가 이렇게 러브레터 전달 요청까지 나한테 들어오고 말이지?
"지난번에 황성에 들렀을 때 직접 드리려 했었는데 하필 근무 교대 시간에 걸려서······."
마조람 백작 영애는 수줍 수줍, 부끄부끄한 얼굴을 하며 몸을 배배 꼬았다.
헉, 나는 그만 조금 놀라고 말았다.
우, 우리 둘째 진상에게 연애 감정을 품은 처자가 있을 줄이야?! 물론 놈도 허우대만은 멀쩡해서 간혹 겉모습만 보고 관심을 표하는 영애들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정식으로 황궁 소속의 기사가 되고 난 후에는 '기사님 멋져!', '제복 멋져!' 하는 느낌으로 카벨을 향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영애들도 생긴 것 같았고.
하지만 마조람 양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진상짓을 하는 카벨을 본 적도 있었기 때문에 나는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희 집 둘째, 카벨 오빠를 말씀하시는 게 맞나요?"
"네에, 귀여우신 게 딱 제 취향이에요."
마조람 영애는 또다시 수줍어하며 호호 웃었다.
나는 그만 얼떨떨한 기분이 되어 그녀가 건네준 편지를 받고 말았다.
와, 와아. 둘째 진상아, 여기에 널 좋아하는 영애가 있어! 집에 가서 이 편지를 전해 주면 또 얼마나 으쓱거리며 히죽거릴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오늘은 신년제 행사 때문에 셀레네에 와 있는 참이라 카벨에게 이 편지를 전해 주는 것은 저녁 늦은 시간이 될 터였다. 제2기사단은 황궁에 남아 있어야 해서 오늘 이곳에 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를란타의 신년제는 매해 제국의 다른 지역에서 열리는데, 이번에는 유리 호수로 유명한 셀레네가 낙점되었다.
신년제 행사가 열릴 장소는 하늘을 그대로 비추고 있는 유리 호수의 주변이었다. 이곳은 사시사철 연꽃이 피어 있어 매우 신비로운 정취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듣기로는 아를란타를 수호하는 여신의 맑은 정기가 가득 고여 있어 그렇다는데······.
쿨럭. 여하튼 과연 그런 속설이 있을 만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경관이기는 했다.
"하리, 춥지 않아요?"
"그럭저럭 참을 만해요. 로자벨라 양은요?"
"저는 추위를 크게 타지 않아서요."
나는 로자벨라와 대화를 나누며 저쪽에 서 있는 유진과 에리히, 그리고 요하네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신년제 행사에서는 여성과 남성이 따로 흩어져 행동해야 했다. 이제 와서는 고리타분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래도 건국 때부터 이어진 전통이어서 아직까지 바뀌지 않는 문화였다.
"난 추워."
"내 목도리 줄까?"
"아니야, 언니도 춥잖아."
루이제에게 내 은여우 목도리를 벗어주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대신 나는 루이제의 양손을 붙잡고 체온을 나누었다. 정말 많이 추운지 나한테 붙잡혀서 꼼지락거리는 손이 차가웠다.
"왜 이렇게 호숫가 바로 앞에서 신년제를 하는 거야? 수온 때문에 더 추운 것 같잖아."
루이제의 투덜거림에 나도 동감했다.
유리 호수에 깃든 여신의 정기를 받으면 1년이 길할 거라나 뭐라나. 내 생각에는 그냥 미신 같은데.
"잠시만 실례할게요."
그런데 그러던 어느 순간 내 옆에 있던 로자벨라가 자리를 떠났다. 나는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나누거나 다른 곳에서 잠시 쉬려는 것이겠거니 생각하며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별생각 없이 바라보았다.
로자벨라는 신년제를 위한 성화가 놓인 제단 뒤쪽으로 움직였다. 관계자가 아니면 보통 걸음 하지 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어라?
그런데 지금 그녀가 향하고 있는 곳에서 문득 붉은 머리카락의 남자를 본 것 같았다.
붉은색 머리를 가진 젊은 남자라면 다이스밖에 없는데? 신년제 행사에 조금 늦는다고 들은 것 같은데 드디어 도착한 건가?
그러고 보니 다이스는 마차 공포증이 있다고 했다. 아마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도 마차를 타고 이동했을 텐데 괜찮을까? 제도에서 셀레네까지는 거리가 조금 멀어서 이동하는 시간도 길었을 터다.
로자벨라는 그런 다이스를 알고 있을 테니, 혹시 그의 상태가 신경 쓰여 보러 간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