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그 오빠들을 조심해 77화
22. 사랑과 거짓말
"하하! 그래? 카벨이?"
"카벨은 정말 언제나 활기차고 밝구나. 참 보기 좋아."
밝은 웃음소리가 식당 안에 울려 퍼졌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바스티에였다. 일전의 내 청을 받아들여 유진이 형제들과 나를 데리고 함께 바스티에 부부를 만나러 왔기 때문이다.
바스티에 부부는 언제나 그렇듯 카벨의 진상스러움을 좋게 봐주며 흐뭇하게 칭찬해 주었다. 그러자 카벨의 어깨가 으쓱거리는 것이 나한테까지 여실히 느껴졌다.
그 꼴을 보고 에리히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게 너무 띄워주지 마세요. 형이 진짜인 줄 알아요."
"흥, 네가 날 질투하는 거 다 알아! 뭐, 이 형님의 멋짐을 너도 조금이라면 닮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벌써부터 포기하지는 말라고."
카벨은 바스티에 부부의 칭찬으로 기세등등해져서 에리히의 말에도 코웃음을 치며 거들먹거렸다. 에리히의 얼굴이 차게 식는 것이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에리히 오빠, 그냥 참아. 상대는 카벨 오빠잖아."
"그래, 에리히. 루이제 말이 맞아."
"응, 두 사람 말이 맞아."
바스티에 남매의 말에 나도 이어서 거들었다. 그러자 카벨이 얼굴을 왕창 구기며 소리쳤다.
"뭐야, 너희들! 그 말 무슨 의미야? 은근히 기분이 별로인데?!"
우리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어쨌건 자신을 흉보는 것이란 사실은 느낀 것 같았다. 참, 완전히 바보는 아니구먼? 그 정도의 눈치라도 있었다니, 새로운 발견이다!
모처럼 다 함께 모인 자리였기 때문인지 식당 안은 시종일관 떠들썩했다. 화기애애한 대화가 마를 틈이 없었다.
간만에 바스티에에서 보내는 시간에 나도 즐거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바스티에 백작이 유진을 향해 시선을 움직이며 물었다.
"그래, 좋은 소식은 언제쯤 들을 수 있는 건가?"
그리고 이어진 그의 말에 샐러드를 포크로 찍던 내 손이 멈칫했다.
"벌써 약혼한 지도 꽤 지났지?"
바스티에 부부는 약혼 후 몇 해가 지났는데도 유진에게 아직까지 결혼 소식이 없어 궁금한 눈치였다. 하지만 지난 생의 경험으로 미루어 봤을 때, 유진의 결혼까지는 몇 년의 유예기간이 더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다음 순간 유진이 담담한 얼굴로 대답했다.
"예상하기로, 시일이 다소 앞당겨질 것 같습니다.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쿠웅.
바로 그 순간 가슴속에 큰 돌덩이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깜짝 놀라 맞은편에 앉은 그를 쳐다보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카벨과 에리히도 덩달아 놀란 것 같았다.
"뭐야, 형, 결혼해?"
"왜 이렇게 빨리해? 좀 느긋이 하지 않고."
그들의 말에 유진은 그저 한 번 작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나는 내 얼굴이 어색해 보이지 않기를 바라며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유진이 곧 결혼한다고······?
언젠가 다가올 일이라는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으면서, 나는 동요하는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러지 말아야지. 유진이 정말 원하는 일이라면 축하해 줘야 마땅하니까.
그렇게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자꾸만 굳으려 하는 표정을 풀었다. 그러는 데 만전을 기하느라 그런 내 얼굴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유진 형이 결혼한다고 하니까, 서운해?"
저녁 식사가 끝나고 바스티에에서 마련해 준 각자의 방으로 모두가 쉬러 갔을 때 요하네스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의 말에 흠칫했지만 그는 나를 전부 다 이해한다는 듯이 말했다.
"에른스트의 우애가 남다르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니까. 중간에 여러 일이 있기도 했고."
유진의 결혼에 대해 내가 느끼는 감정을 섭섭함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당연했다.
"괜찮아. 내가 옆에 있어줄게. 네가 외롭지 않게."
요하네스가 나를 위로하듯이 속삭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 그에게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는 이 감정은, 결코 그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에른스트 양, 괜찮으시면 다음 곡은 저와 함께······."
"제게 영애와 함께 춤을 출 수 있는 영광을 주시지요."
얼마 후, 나는 무도회에 참석했다. 파트너 동반이 필수는 아니어서, 오늘은 에단만 데리고 혼자 온 참이었다.
곳곳에서 밀려드는 파트너 신청을 웃는 낯으로 거절한 뒤, 나는 테라스로 향했다.
"아, 피곤하다."
에단이 비어 있는 테라스 안으로 뒤따라왔으나 나는 신경 쓰지 않고 의자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치맛자락이 한차례 크게 펄럭이면서 구두를 신은 발이 밖으로 드러났다. 발이 조금 아파서 신발을 벗고 싶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에단이 있는데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참았다.
푹신한 쿠션 속에 몸을 파묻자 금세 몸이 나른해졌다. 나는 귓가에 스미는 음악 소리를 흘려들으며 난간 너머의 밤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고 화려한 파티장을 전전하는 일. 예전에는 꼭 내가 그들의 세계에 속해 있다는 증명 같아서 좋았는데.
지금의 나는 분명 그때보다 더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는데도······ 어째서일까? 왜인지 조금 허무하고 쓸쓸했다. 뭐, 예전의 내가 보았다면 배부른 투정이라고 했을 게 뻔하지만.
"비숍 경은 저 안에 들어가서 춤도 추고 사람도 사귀고, 그러고 싶지 않아요?"
나는 내 휴식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구석에 조용히 서 있는 에단을 향해 지나가듯 물었다. 그가 매일 내 호위만 하느라 청춘을 즐기지 못하는 것 같아서 늘 마음이 쓰이던 참이었다.
에단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왜요? 제 호위 때문이면 오빠한테 말해볼게요."
"그게 아니라······."
만약 나 때문이라면 '이제 슬슬 에단에게 나를 호위하는 일을 그만두게 해도 되지 않겠냐'고 유진에게 언질해 볼 요량이었다.
지금까지 특별히 위험하다 할 만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제 그만 명을 거두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하지만 에단은 내 물음에 뜻밖의 대답을 꺼내놓았다.
"그럴 자격이 저에게 없습니다."
잉? 이건 또 무슨 소리랍니까?
나는 예상치 못한 그의 말에 의아해졌다.
"자격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누가 그런 걸 정하는데요?"
에단이 지금 한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도회장에서 춤을 출 자격도, 다른 사람을 사귈 자격도 자신에게는 없다는 거야? 어째서?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말을 이을 생각이 없는 눈치였다. 나는 굳게 닫힌 그의 입을 보며 의자에 기댔던 몸을 조금 바로 세웠다.
"비숍 경······."
똑똑.
그런데 내가 다시금 그의 이름을 부른 찰나, 작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로자벨라였다.
내 생각을 알아차린 에단이 나 대신 움직여 테라스의 문을 열었다. 그 후 그는 로자벨라와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 보인 뒤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에단이 유리문 너머에 등지고 서는 것을 확인한 뒤 고개를 돌렸다.
"저도 바람을 쐬고 싶어서요."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나는 그녀가 앉을 수 있게 의자에 넓게 펼쳐진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테라스에 있는 의자는 2, 3인용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둘이 앉을 수 있었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조금 그렇네요."
로자벨라의 얼굴을 보며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그녀가 쉽게 긍정했다.
"결혼이 앞당겨질 것 같다는 이야기, 하리 양도 들었나요?"
"네."
나는 짧게 대답한 뒤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곧이어 웃으며 덧붙였다.
"아직 이르긴 하지만, 축하드려요. 로자벨라 양이 제 가족이 된다니 기뻐요."
하지만 로자벨라는 내 말에 오묘하게 미소 지으며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글쎄, 축하받을 일일까요?"
나는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라 가만히 마주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저는 사랑이나 결혼에 동경을 품을 만큼 물렁한 성격이 아니에요."
홀 안에서 새어드는 음악 소리 위로 조용한 음성이 덧칠해졌다.
"하지만 요즘 들어 사실은 내 앞에 다른 더 좋은 선택지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막상 결혼 얘기가 나오니 마음이 복잡해져서 그런 걸까요?"
과연 그 말처럼 로자벨라의 표정은 여러 감정이 얽힌 것처럼 보였다. 테라스 밖의 불빛을 응시하는 눈동자에는 옅은 수심마저 드리워진 듯했다. 나는 로자벨라의 그런 얼굴을 처음 보아서 약간 놀랐다.
하지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원래 결혼을 앞둔 신부는 마음이 복잡해진다고 하니까.
게다가 두 사람은 연애결혼이 아닌 정략결혼이었다. 그런 만큼 막상 결혼을 앞두게 되니 이런저런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예전과 달리 그녀와 나는 친분을 쌓은 편이었으니 이런 식으로 내 앞에서 자신의 심경을 드러내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그런 그녀에게 무어라 말해주어야 할까?
"오빠와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어 보시면 어때요?"
나는 잠시 동안 시선을 내리고 고민하다가 로자벨라에게 권유했다.
"그럼 서로에 대해 지금까지보다 잘 알 수 있을 거예요."
사실 나는 예전부터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들은 결혼해서 한평생을 함께 살게 될 텐데, 비록 첫 시작은 아니었을지라도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을 것이었다.
"괜찮으시면 지금이나, 아니면 무도회가 끝난 후에라도······."
"하리, 그렇게 노력할 필요 없어요."
그러나 로자벨라는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언제나 그 사람과 나를 위해 애쓰는 걸 알고 있어요."
"로자벨라······."
"하리, 난 당신을 좋아해요. 꼭 약혼자의 동생이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을 친구라고 여겨요. 그러니 당신에게 솔직하고 싶어요."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음성은 내 말문을 막히게 했다.
"나는 그를 사랑하지 않고, 그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요. 아마 앞으로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요."
로자벨라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확고한 진실을 말하듯 무덤덤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렸다.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건 신뢰와 의무고, 그 안에 서로에 대한 존중은 있을지언정 사랑이라는 감정은 있지 않아요. 그뿐이라는 사실에 단 한 번도 아쉬움조차 느낀 적 없어요."
그녀의 말은 너무 건조해서 냉정하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숨을 죽이고 마주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런 우리가 이해되지 않나요?"
내 아연한 눈빛을 느꼈는지 로자벨라가 어렴풋이 웃어 보였다. 하지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그녀 역시 그다지 유쾌한 기분인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런 관계가 합리적이라고 배우며 자랐어요. 당신이 자란 환경과는 많이 다를지도 모르겠네요. 그 사람도 동생들을 자신처럼 결혼시킬 마음은 추호도 없는 것 같았으니."
그런 것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실제로 지금 홀에 들어가 주위를 둘러본다면 그들처럼 정략적인 목적으로 결혼하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도 다행일까요. 내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그도 내게 사랑을 바라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나는 이런 마음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딱히 이런 내가 불행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요."
로자벨라는 그렇게 말한 뒤 더 이상 대화를 이을 생각이 없는지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위에는 다시금 잔잔한 음악 소리만이 작게 깔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