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오빠들을 조심해!-76화 (76/138)

# 76

그 오빠들을 조심해 76화

화려한 무도회장에서 홀을 가로지르는 유진을 여기저기서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다.

이미 약혼녀가 있음에도 에른스트 공작을 노리는 영애는 많았다.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닌 데다 약혼녀와의 관계가 단순히 정략적인 것으로 그리 깊어 보이지도 않으니 유진의 마음만 사로잡는다면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처럼 유진에게 몸을 아끼지 않고 육탄공세를 퍼붓는 영애도 있었다.

막 홀을 빠져나가던 찰나에, 노란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영애 한 명이 발목을 삐끗한 척 유진이 있는 쪽으로 넘어졌다.

"어멋!"

실수를 빙자해 은근슬쩍 기대려는 속셈이었지만 행동이 제법 자연스러워 티가 별로 나지 않았다.

보통의 신사라면 이럴 때 팔이라도 잡아주는 것이 당연한 행동일 것이었다.

하지만 유진은 한 차례 시선을 옆으로 미끄러뜨렸을 뿐, 자신에게 몸을 던져오는 여자를 받아주지 않았다.

쿠당!

그래서 결국 그녀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바닥에 대차게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지못해서라도 잡아줄 수밖에 없게 정말 온 체중을 다 실어 가차 없이 몸을 날렸던 차라 넘어지면서 난 소리도 컸다.

볼썽사납게 넘어진 여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설마하니 이런 상황에서도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에 덜컥 말문이 막혔다.

냉정함이 하늘을 찌른다고 소문난 에른스트 공작이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괜찮으십니까, 영애?"

유진의 뒤에 서 있던 로웬그린이 여느 때처럼 혀를 차며 바닥에 엎어진 여인을 향해 다가갔다. 이미 유진은 조금 전 일어난 일이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앞서 걸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조금 전 추태를 보였던 영애는 로웬그린의 부축을 받아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그녀를 향해 로웬그린이 측은함을 담은 눈빛을 보냈다.

"다음부터는 차라리 제 쪽으로 넘어지십시오. 전 공작님과 달리 연민의 정이란 것이 있어서 곤란을 겪는 숙녀분을 그냥 지나치지는 못 하거든요."

"뭐······ 지금 날 동정하는 거예요?!"

하지만 오히려 화만 사고 말았다.

로웬그린은 자신의 친절이 어째서 여인들의 분노를 부르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유진의 뒤를 쫓았다.

"너무 매몰차신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않아도 냉혈 공작님이라고 소문이 파다한데. 꽃다운 아가씨들이 무안당하는 것에 안쓰러운 마음이 한 점도 들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지?"

로웬그린은 약간 한탄하는 마음이 되어 말했다. 하지만 오늘도 유진은 빈틈 하나 없는 모습으로 무심히 대답할 뿐이었다. 그런 그를 보며 로웬그린이 혀를 찼다.

"하리 아가씨께 보이는 친절의 반의반, 아니, 그 손톱만큼의 친절만 보이셨어도 공작님 때문에 우는 영애들은 아무도 없었을 겁니다."

하리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그 소름 끼치는 딸기 케이크까지 억지로 먹어줄 정도면서 말이지요.

하지만 뒤이은 말은 그냥 속으로만 읊조렸다. 유진이 여느 때처럼 '원래 그 케이크를 좋아한다'는 거짓말을 할 걸 뻔히 알았으니까.

물론 사실 그것은 거짓말이 아니었지만 로웬그린은 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냉혈한에게 깜찍하기 그지없는 딸기 쇼트케이크가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 어울리지 않아도 너무 안 어울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집에나 가."

"잠깐. 저에게는 마차를 태워주지 않으시는 겁니까?"

"난 곧장 저택으로 갈 거니까 알아서 해."

배신감 어린 표정을 짓는 로웬그린을 뒤로한 채로 유진은 혼자 마차에 올라 가차 없이 문을 닫았다.

덜컹.

창밖을 응시하는 검은 눈동자에 밖에서 새어든 빛이 얕게 고였다.

마차는 소리 없이 움직였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에른스트의 저택에 그의 얼굴에 주저함이 어렸다. 유진은 이대로 마차를 돌려 목적지에서 멀어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생각으로만 그쳤을 따름이었다.

곧 마차는 에른스트의 정문을 넘어 저택에 도달했다. 유진은 숨을 한 번 깊이 들이마셨다 내쉰 뒤 밖으로 내려섰다.

밤늦은 시각이었기 때문에 주변은 조용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제법 쌀쌀해진 밤공기가 뺨을 스쳤다.

그는 소리 없이 문을 열어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이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마음을 다잡아야 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오늘은 그를 맞아주는 사람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유진의 입술에서 여트막한 숨이 내뱉어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일찌감치 잠이 든 모양이다. 평소 그의 귀가를 확인한 후에야 잠자리에 들던 하리였으나 어쩔 수 없이 아주 가끔은 졸음을 이기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다음 날 아침 무언가가 불만스러운 듯 찌푸린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계단으로 향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기분으로 하리의 얼굴을 봐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일단 지금은 그녀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묘하게 아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계단을 오르던 유진의 발길은 다음 순간 멈추어지고 말았다.

"······."

휴식 공간 겸 복도에 마련되어 있는 소파 위에 은색 머리카락이 어지럽게 늘어뜨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계단 바로 맞은편에 있는 공간이었기 때문에 위층으로 오르던 유진의 시야에도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잠시 동안 제자리에 멈추어 있다가 이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하리는 소파 위에 불편하게 몸을 접고 누워서 자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조금 전에 잠든 것이 분명했다. 집사나 다른 사용인들이 이런 곳에서 자고 있는 하리를 깨우지 않았을 리는 없었으니까.

은은한 불빛에 창백한 빛을 발하는 얼굴이 그의 눈에 비쳤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그 밑으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색색 작은 숨을 내쉬는 입술이 붉었다.

유진은 어째서인지 망연한 기분으로 서서 잠들어 있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이내 바짝 타오르는 갈증을 무시하며 손을 들어 잠시 동안 마른세수를 했다. 다시금 손을 뗐을 때는 언제나처럼 자상한 오빠의 얼굴을 한 유진이 거기에 서 있었다.

곧 그의 입에서 나직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하리."

예전이라면 직접 안아 들어서 옮겼을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유진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에게 쉽게 손을 댈 수가 없게 되었다.

조금씩 느껴오던 미묘한 감정이 마침내 눈덩이처럼 불어나, 마침내 머릿속에 위험 경보가 울리기 시작한 이후의 일이었다.

"하리."

하지만 그녀는 꽤나 피곤했던 듯, 거듭 이어지는 그의 부름에도 눈을 뜨지 않았다.

아래로 늘어뜨려진 유진의 손이 한 차례 움찔 떨렸다. 그 속에 몇 겹의 망설임과 갈등이 담겨 있는지, 아마 세상 그 누구도 모를 것이었다.

결국 유진은 또 한 명의 자신에게 지고 말았다.

서늘함을 품은 손이 아주 천천히 앞으로 뻗어졌다.

머릿속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한 경고음이 울렸지만 이번에는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시했다.

마침내 손끝에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그 순간 흠칫 놀라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금 다가갔다. 경직된 손끝이 매끄러운 뺨 위를 스치듯 움직였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유진은 깨달았다. 지금껏 그를 괴롭혔던 이 지독한 감정이 무엇인지.

"음, 오빠······?"

그것은 마치 영혼을 찢어발기는 것처럼 더없이 또렷하고 날카로운 깨달음이었다.

처음 다가갈 때처럼 느리게 거두어진 손이 이윽고 밑으로 툭 떨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용암처럼 뜨거운 것이 들끓으며 목을 메이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차가운 불꽃처럼 속을 온통 춥게 만들었다.

"언제 왔어?"

하리가 아직 잠이 완전히 깨지 않은 얼굴로 물으며 그의 손을 살짝 붙잡았다.

하지만 유진은 차마 그 손을 맞잡을 수 없었다.

지금 그 손을 잡으면, 그때에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길로 가게 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지금 막. 왜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

입 밖으로 나온 자신의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낯설었다.

사실은 태풍이라도 만난 듯 걷잡을 수 없이 뒤흔들리는 가슴을 추스르기가 버거웠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는 그 어느 때보다 자신의 마음을 꽁꽁 숨겨야만 했다.

"방이 답답해서 잠깐 나와 있었는데 깜빡 잠들었나 봐. 오빠가 안 깨웠으면 여기에서 밤새울 뻔했네."

"밤에는 제법 쌀쌀해서 감기에 걸릴지도 몰라. 어서 방으로 들어가서 쉬어."

"오빠도 피곤하겠다. 빨리 방으로 올라가."

그 후 어떤 얼굴로 하리에게서 뒤돌아서 자신의 방까지 올라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그는 필사적이었고, 속절없이 목구멍 밖으로 치밀어 오르려 하는 것을 억지로 구겨 넣는 것만으로도 온 힘을 다 쏟아야만 해서 괴로웠다.

그리고 마침내 완전한 혼자가 되었을 때에서야 유진은 무너져 내렸다. 일그러진 입술 밖으로 쥐어짜는 듯한 밭은 숨이 토해졌다.

아주 오래전, 하리를 여동생으로 받아들이자고 결심했을 때······.

그때부터 그는 스스로에게 굳게 다짐했다. 앞으로 두 번 다시는 이 손을 놓지 말자고. 이미 한번 그 차가운 거리에 그녀를 버리고 갔으니, 이후로는 절대로 지금 잡고 있는 이 손을 놓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이게 뭐야.

유진은 손을 들어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를 가렸다.

결코 가져서는 안 되는 마음을, 결코 그래서는 안 되는 사람을 상대로 품어버렸다. 처음으로 명확히 인지한 사실에 속이 쓰리다 못해 지독히도 아팠다.

스스로가 너무 멍청하고 한심해서 끔찍한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그저 그녀가 웃으면 그 역시도 행복했고, 그녀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빛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게, 여동생으로서의 그녀에게 느끼는 감정이 아니었다고······?

'나도 가족이야?'

마치 기다렸다는 듯, 어릴 때의 기억이 그를 아프게 할퀴고 지나갔다.

'당연하지.'

그리고 그때의 그가 망설임 없이 하리에게 했던 대답도.

'넌 우리 동생이잖아.'

그 순간, 유진의 입술에서 목이 졸린 듯한 갈라진 웃음소리가 비집고 새어 나왔다.

안 돼······.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런 마음을, 다른 누구도 아닌 하리를 상대로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당연했다.

이제 와서 너를 동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소리 따위······.

그녀의 앞에서 할 수 있을 리가 없었으니까.

하리가 자신의 삶에서 무엇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지 뻔히 알면서, 그런 그녀의 세계를 자신의 손으로 부숴 버릴 수는 없었다.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그래서 만약 그녀가 슬퍼한다면, 아마도 그는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었다.

유진은 그녀를 지키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그녀를 상처 입히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그녀의 손을 맞잡았던 어린 시절 이후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니 안 된다.

독이나 마찬가지인 이 마음을 결코 하리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

설령 죽을 때까지 이 마음을 속에 담아두어야만 한다고 해도, 그리 하여 이 지독한 마음에 그 자신이 죽어간다고 해도, 절대로.

유진은 그렇게 결심하며 이를 악물었다.

꽉 쥔 주먹에 손바닥이 따끔거렸지만 제 손으로 짓뭉갠 가슴만큼 끔찍하게 아프지는 않았다.

싸늘한 가을밤.

스산한 찬바람이 뚫린 심장 사이로 한기를 몰아넣던 어느 날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