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
그 오빠들을 조심해 75화
그날, 유진은 평소처럼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다만 시간은 여느 때처럼 하루 일과를 마칠 즈음인 밤이 아니었다. 아직 한낮인 시간이었지만 그는 에른스트의 저택에 머물고 있었다.
"됐어. 그만 나가 봐."
하리의 청으로 에단은 오늘 하루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유진도 오늘은 저택에 있을 예정인 데다 하리도 외출할 계획이 없었기에 허락한 일이었다.
유진은 에단이 방을 나선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처럼 집에서 보내는 하루였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쉬지 못해서 그런지 몹시 피곤했다. 지난밤 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밤새 업무를 본 참이었다. 아무래도 휴식이 필요한 것은 그 역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어제저녁 이후 처음으로 집무실에서 나온 그를 보고 집사 휴버트가 인사했다.
"이제 나오십니까, 공작님. 하리 아가씨께서 걱정하셨습니다."
유진은 내심 혀를 찼다. 하리가 혼자 식사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알고 되도록 함께 자리하기 위해 애써왔던 그였다.
하지만 오늘 아침에는 정신이 없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 깨달은 뒤에는 이미 해가 산등성이 꼭대기에 걸려 있는 참이었다.
"식사부터 준비할까요?"
"아니. 하리는 지금 어디에 있지?"
"정원에 계십니다."
아침 식사를 거르긴 했지만 그다지 속이 허하지는 않았다. 그는 먼저 하리를 보러 갈 생각으로 발길을 돌렸다.
건물 밖으로 나오자 강렬한 햇볕이 머리 위로 내리쪼였다. 계절이 바뀌고 바뀌어 어느덧 초여름이었다.
유진은 정원을 향해 걸으며 근래 들어 유독 그의 귀에 많이 흘러드는 말을 떠올렸다.
황손인 다이스가 하리를 마음에 담아 차기 비로 내정 중이라고 했던가.
유진은 그것이 헛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 그저 실소했다. 하지만 슬슬 한 번쯤은 거리낌 없는 다이스의 행동에 제재를 가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동안 밖으로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하리가 대외적인 활동을 시작하고 나서부터 그녀는 금세 관심의 한가운데에 서게 되었다.
비단 에른스트의 이름 때문이 아니더라도 하리에게 매료되어 친분을 쌓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이 지천에 깔려 있었다. 유진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보기에도 하리의 성장은 놀라울 정도였다.
마치 자신을 견고히 감싸고 있던 껍질을 벗고 완전히 탈피해 마침내 화려한 날개를 펼친 나비 같았다.
이따금 유진은 자신의 기억 속에 남은 어린 시절의 하리와 지금의 하리 사이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에 곤혹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복잡미묘한 감정이 도대체 어디에서 기인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짹짹.
유진은 뻑뻑한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그의 고민 따위는 지극히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척이나 맑고 화창한 날씨였다.
어느덧 짙은 녹색 옷을 입은 나뭇잎이 머리 위로 두꺼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하리가 화원에 벤치를 만들자고 했었는데. 오늘 바로 휴버트에게 일임해 둘까.
그런 한가로운 생각을 하며 유진은 정원으로 들어섰다.
정원에는 붉은 장미가 한창 만개해 있었다. 정원사가 하리를 위해 정성껏 가꾼 꽃이었다.
하리는 사용인들에게도 다정다감해서 에른스트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녀를 좋아했다.
유진은 하리가 일개 사용인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런 마음을 그녀의 앞에서 드러낼 정도로 어리숙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얼마나 더 걸었을까.
마침내 유진의 눈앞에 그가 찾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미 덤불 사이에서 옅은 잔상을 남기며 흔들리는 하얀 치맛자락. 허리춤에서 찬연하게 반짝이는 은색 머리칼. 햇빛 아래로 드러난 보라색 눈동자가 붉은 장미꽃 사이에서도 두드러지게 아름다웠다.
그 순간, 불현듯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모르겠으나 무언가가 그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 같았다. 얕게 숨을 들이마시자 코끝에 그윽한 장미향이 스며들었다.
이상하게도······ 그 향기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이 약간 어지러웠다.
눈이 멀 것 같다고 생각했다.
분명 평소에 보아오던 사람, 평소에 보아오던 광경이었는데 기이할 정도로 눈이 부셨다. 날카로운 장미 가시가 심장을 깊숙이 찌르고 들어온 것처럼 속이 아렸다.
유진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어째서인지 아연한 기분으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아마도 다음 순간 하리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서 있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러한 상태는 그녀가 그를 발견하면서 종결되었다.
"유진 오빠."
아니······. 하지만 조금 전보다 더한 동요가 불러일으켜 졌을 뿐이다.
하리는 마치 유진을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이름을 부르며 환하게 미소 지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머릿속에서 요란한 경고음이 울린 것은.
'지금 다가가면 안 된다.'
유진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채 뒷걸음질 쳤다.
"오빠?"
그의 이상한 행동에 마주한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하지만 대답할 정신도, 변명할 여유도 지금의 그에게는 없었다.
조금 전 그녀를 보고 있을 때와는 또 다른 감정이 울컥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억지로 억누른 열기에 속이 따끔따끔했다.
더 이상은 하리의 앞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유진은 거의 도망치다시피 그 자리에서 벗어났다. 시야에 이지러지는 붉은빛이 마치 그를 비웃으며 뒤쫓아 오는 것 같았다.
그 순간의 그를 잠식하고 있던 것은 바로, 영원히 열려서는 안 될 상자 속을 몰래 엿보고 만 것만 같은 두려움이었다.
***
그 후 유진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이 태연히 행동했다.
그날의 일을 의식하는 것은 마치 그날의 그가 느꼈던 동요마저 인정하는 것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결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황성에서 넘어지는 하리를 받아주었을 때, 그녀의 온기가 품에 들어온 순간 또 한 번 굳게 걸어놓은 빗장이 삐거덕 소리를 내는 것이 느껴졌다. 그 순간 불에 덴 듯이 맞닿은 사람을 밀어내고 말았다.
"조심했어야지. 넘어질 뻔했잖아."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행동했으나 속까지 그렇지는 못했다. 어째서 이런 마음이 드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혼란을 다른 누구도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다른 그 누구보다도 하리에게는 특히 감춰야만 했다.
이대로 얼굴을 보지 않으면 금세 사라질 증상이 아닐까. 그래서 유진은 하리에게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오빠, 내가 오빠한테 뭐 잘못했어?"
하지만 설마 그것이 하리를 불안하게 만들 줄은 몰랐다.
부서지는 햇빛 아래에서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는 말간 눈동자를 보며 유진은 자책했다.
그가 너무 바보 같았다. 이유가 어찌 되었건,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인 것은 분명한 그의 실책이었다.
"걱정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어."
유진은 하리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너를 피할 리가 없잖아."
그러니 몇 번이고 거짓말을 할 수 있었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라면. 또 그녀를 웃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그렇다면 좀 더 제대로 숨기자. 눈을 마주칠 때마다, 또 손끝이 닿을 때마다 풍랑이라도 맞은 것처럼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는 이 마음을 눈치채지 못하게. 살갗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도 하리에게 들키지 않도록.
그 후 유진은 지금까지의 그로 되돌아갔다.
한번 마음을 다잡고 나자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다만 문득문득 깨진 유리 조각을 삼킨 것처럼 날카롭게 속을 긁히는 느낌이 들었다. 해소되지 않는 갈증에 날이 갈수록 조금씩 초조해져 갔다.
그래도 그런 것을 모두 억누르고 하리의 앞에 섰다. 또다시 멍청한 이유로 그녀를 불안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그리고 어느 날, 유진은 스산한 목소리로 다이스에게 되물었다.
조용히 미끄러지는 시선은 겉보기에 무심함을 입고 있었지만 그 속까지 파헤치고 들어가면 더없이 냉랭하고 예리했다.
반쯤은 장난삼아 유진의 반응을 떠볼 셈으로 말을 꺼냈던 다이스는 그만 당황하고 말았다. 그냥 코웃음을 치거나 무시하리라 생각했는데 이건 생각지 못했던 한기였다.
다이스는 당혹감을 여실히 드러낸 목소리로 변명했다. 사실 그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눈앞에 있는 이 철혈의 공작을 조금 무서워하고 있었다.
"아, 아니, 정식으로 이야기를 꺼낸 건 아니고······. 청혼이라고 해도 말만 그렇지 저도 반은 농이었고, 양도 이미 거절했······."
다이스가 그 후로도 무어라 더 열심히 말했으나 유진의 귀에는 닿지 않았다.
청혼을 했다고?
누구에게.
······하리에게?
사실 그 사실 자체에 문제는 없었다.
유진이 약혼했듯, 그의 동생들도 언제든 좋은 상대를 찾아 짝을 이룰 수 있는 일이었다.
다이스가 청혼을 한 것도, 황손이라는 이유로 하리의 선택을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의사를 존중할 생각이라면 괜찮았다.
유진도 2년 전 약혼한 로자벨라 벨론티아가 있었다.
다만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는 완벽한 정략결혼의 대상자들이었다. 그것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았다.
사실 유진은 다이스가 로자벨라에게 얼마나 애끓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에게는 자신의 가족들만이 중요했고, 다른 이의 마음이나 행복 따위는 알 바 아니라는 생각까지 가지고 있었다.
수백, 수천 명의 사람을 여기서 더 짓밟아야만 그의 가족들이 평화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면 아마 유진은 망설임 없이 그렇게 할 것이었다.
어찌 보면 비정상적이기까지 한 집념이라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분명 어릴 때의 그는 이렇게 모질고 냉혹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진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에 뼛속까지 차갑게 얼어붙은 채로 닫혀 버렸다.
굴욕감과 절망감에 삼켜져 스스로의 무력감을 사무치게 절감했던 때. 또 그의 두 손에 직접 혈육의 피를 묻히고 더 이상은 뒤돌아보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그 이후로 그 누구도 닫혀 있는 그의 마음에 들어온 일이 없었다. 빙산처럼 얼어붙은 심장에 한기가 몰아쳐도 원래부터 그것이 당연했던 것처럼 속이 시린 줄도 몰랐다.
본래부터 그리 모진 성정인 것은 아니었기에 마음이 약해질 때마다 더욱 독하게 이를 악물었다. 아무런 위험도 불행도 없는 예전의 그 행복한 시절로 다시 한번 돌아가고 싶다는 마음만이 그를 버티게 했다.
어찌 보면 그렇기 때문에 가족들에게 더욱 매달렸는지도 몰랐다.
유진은 지금껏 그가 살아온 이유나 마찬가지인 동생들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본래 절벽 끝에서 손에 쥔 것이 지푸라기밖에 없는 사람은 그 하나를 지키기 위해 얼마든지 처절해질 수 있는 법이다.
그러니 만약 그들에게 진심으로 원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상대가 누구라 해도 기껍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 마음은 지금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저어, 공. 제 말을 듣고 있습니까? 이미 지난여름의 일이고, 양과 나 사이에는 다 끝난 일이니 더 오해하지 말고······."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가시를 삼킨 것 같은 기분이 든단 말인가. 이제 와서 왜.
있어서는 안 될 모순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이 혼란의 원인을 알아내려 해서는 안 되었다.
유진은 언젠가부터 쥐어져 있던 주먹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그리고 복잡한 마음을 애써 떨쳐냈다. 아무도 그의 이런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