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그 오빠들을 조심해 74화
"괜찮으시면 이거 휴식 시간에 드세요."
별건 아니고 그냥 쉴 때 먹으라고 가져온 간식거리였다. 이런 것은 예전에도 이곳에 들를 때마다 종종 들고 오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것조차 삭막한 현실 속의 위로로 다가왔는지, 조각 케이크가 든 상자를 고이 받은 그들의 얼굴이 울먹울먹했다.
"어이쿠, 하리 양 오셨습니까?"
그때, 구석에 있던 방에서 누군가가 비실거리며 걸어 나왔다. 그것은 못 본 새 얼굴이 핼쑥해진 로웬그린이었다.
"안녕하세요, 로웬그린 씨."
"공작님은 잠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아마 금방 오시긴 할 것 같은데······. 앗, 이거 하리 양이 가져오신 건가요?"
"네, 하나 드실래요?"
로웬그린은 마다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마침 오늘 점심을 거른 참이라."
앗, 점심도 안 먹고 일을 하다니? 유진이 요즘 이 사람들을 많이 굴리고 있는 게 사실이긴 한가 보다.
"아, 그건 오빠 거예요."
나는 눈 밑이 새까매져서 상자를 뒤적이는 로웬그린을 보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그러자 로웬그린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알 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예, 뭐. 이걸 먹을 생각은 없었습니다."
내가 항상 유진의 몫으로 가져오는 케이크는 앙증맞은 딸기가 올라간 딸기 쇼트케이크였다.
그런데 그들은 한 가지 중대한 오해를 하고 있었다.
다들 유진이 이 귀엽고 앙증맞은 딸기 케이크를 사실은 싫어하지만 나 때문에 억지로 먹어주는 줄 착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은 유진이 여동생의 성의를 무시하지 못해 한눈에도 진저리가 쳐질 만큼 달아 보이는 이 케이크를 어쩔 수 없이 먹어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건 모르는 소리였다. 유진은 진짜로 이 케이크를 좋아한다고! 전 에른스트 공작 부부가 살아 있을 때부터 입증된 사실이니 믿어도 좋았다. 뭣하면 도장도 쾅쾅! 찍을 수 있다고.
그러나 아무래도 밖에서 철혈의 공작님으로 불리는 유진이 이런 케이크를 실제로 좋아한다는 소문이 돌면 그가 지금까지 구축해놓은 인상이 다소 흐려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오해를 굳이 정정해 주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어쨌든 내 입장에서는 유진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고 만족스러우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나저나 에른스트 양이 계시니 우중충한 분위기가 단번에 확 밝아지네요."
그때, 마찬가지로 초췌한 얼굴을 하고 있던 관료 중 한 사람이 지나가듯 말했다. 그는 얼마 전에 들어온 신입이라 그런지 이제 스무 살로 지금 이곳에 있는 사람 중 가장 어렸다.
"그런가요?"
나는 그를 향해 슬쩍 눈꼬리를 접고 웃어주었다. 그러자 마주한 얼굴이 대번에 붉게 달아올랐다.
그때, 호두가 박힌 케이크를 입에 욱여넣던 로웬그린이 혀를 차며 말했다.
"하리 양, 그렇게 웃어주시면 위험합니다. 아직 어린놈이라 자기 마음대로 착각하고 이상한 혈기를 불태울 수가 있어요. 자칫 한 마리의 가련한 불나방이 될 수도······."
"누가 가련한 불나방이라는 거지?"
하지만 로웬그린은 말을 끝마칠 수 없었다. 그의 등 뒤로 조금 열려 있던 문을 밀고 유진이 들어섰기 때문이다.
"오빠."
그 덕분에 로웬그린은 한참 먹던 케이크가 그만 목에 걸려 가슴을 퍽퍽 내리쳐야만 했다.
"다들 한가해 보이는군."
검은 눈동자가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느리게 훑고 지나갔다.
유진의 등장에 긴장했던 사람들은 이어진 그의 말에 거의 소스라치다시피 펄쩍 뛰었다.
"역시 지금까지는 엄살이었나? 그럼 일을 좀 더 늘려도 되겠군."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나는 후다닥 자리로 가서 착석하는 사람들을 보고 짠한 마음을 품고 말았다.
그 후 유진이 나를 보고 말했다.
"밖으로 나가자."
그래도 조금 전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말투가 달랐다. 자리에 앉아 열심히 일하는 척하고 있던 사람들이 나를 향해 간절한 눈빛을 보내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아까 말한 건 진심이었던 모양이다.
하, 하지만 오늘 밤 야근의 유무를 어떻게 제가 바꿀 수 있단 말입니까?
나는 그들의 애처로운 눈빛을 뒤로한 채 유진을 따라 밖으로 나섰다. 햇빛을 받은 유진의 뒷모습에 내 시선이 박혔다.
역시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일단 나를 그가 일하는 방 안에 들이지 않고 밖으로 데리고 나온 것도 그렇고······.
끄응, 나는 그냥 직구로 나가기로 했다.
"오빠, 내가 오빠한테 뭐 잘못했어?"
설마 내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물을 줄은 몰랐는지, 그 순간 유진이 멈칫했다.
곧 그가 나를 향해 뒤돌아섰다. 이제부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 생각했는지 에단이 뒷걸음질 쳐 물러나는 것이 느껴졌다.
유진이 나를 보며 물었다.
"왜 그런 생각을 해?"
"아니, 그냥······."
나는 잠깐 말끝을 흐리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요즘, 오빠가 날 피하는 것 같아서."
그냥 기분 탓이라면 좋겠지만 그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냥 나 혼자 괜히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래도 유진이 아니라고 말해줬으면 좋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마주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쏴아아.
바람이 머리 위의 나뭇잎을 흔들며 시야에 비치는 빛과 그림자를 어지럽게 부서지게 만들었다. 음영이 진 눈동자가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침내 유진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가 나한테 잘못할 만한 일이 뭐가 있어. 아니야."
그 직후 시야에 번지는 어둑한 미소에 나는 입술을 달싹이고 말았다.
나는 유진이 그런 식으로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래서 지금 그가 짓고 있는 미소를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알 수 없었다.
"아무래도 나는 좋은 오빠가 아닌 것 같다. 너한테 그런 생각이나 하게 만들고."
나직한 속삭임이 바람에 쓸려 내 귓가에서 부스러졌다. 유진은 눈을 한 번 길게 감았다 뜬 뒤 어떤 동요도 흔들림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어."
거듭 이어지는 속삭임은 내가 바라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요즘 일이 바빠서 심적으로 여유가 없다 보니 미처 네 기분을 헤아리지 못했구나."
나는 그 말이 거짓말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내가 너를 피할 리가 없잖아."
어쩔 수 없이 안심했다.
그리고 바보같이 또 조금 슬퍼졌다.
사실은 모른 척할 생각이었다. 어째서인지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내게 거리를 두려고 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부터.
하지만 그렇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점점 견디기가 어려워져, 이렇게 그를 찾아올 수밖에 없게 되었다.
내가 정면으로 부딪치면 지금처럼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좋은 오빠가 아닌 것 같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아니었으니까.
내가 그에게 여동생으로 있는 동안은 아마도 계속 최선을 다해 좋은 사람으로 남아줄 테니까.
잠시 후, 나는 멀어지는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위에서 내리쪼이는 강한 햇빛 때문에 눈이 부셨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더 이상 그가 나를 피하지 않게 되어서 다행이다.
"가요, 비숍 경."
나는 거리가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에단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유진이 가고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그를 생각하면 아주 안타깝고······.
또 견딜 수 없이 사랑스러운 기분에 젖고 만다.
하지만 나는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정의 내리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일단 한번 이 감정에 이름을 붙이고 나면, 그때에는 정말 손 쓸 도리가 없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
"차라리 우리 둘이 결혼할까?"
오늘 다이스를 만난 곳은 황궁의 유리 온실이었다. 계절을 잊고 피어난 화려한 꽃들이 사방에서 그윽한 향기를 내뿜었다.
여느 때처럼 주위에 있는 사람을 물렸기 때문에 지금 이곳에는 그와 나 둘뿐이었다.
다이스는 체통 같은 건 저 멀리 던져 버리고 테이블 위에 거의 엎드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따분한 얼굴로 하릴없이 각설탕을 만지작거리다가 툭 던지듯이 저런 말을 했다.
이 사람이 또 왜 이럴까.
나는 동요하지 않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별로 재미없는 농담이네요."
"왜? 나 정도면 엄청 좋은 신랑감 아니야?"
"저한테는 아니에요."
어차피 진심으로 한 청혼도 아니었으면서 그는 내가 단번에 거절하자 발끈해 따졌다.
물론 황손의 청혼이라면 감읍해야 마땅했지만 나에게 그는 썩 좋은 결혼 상대자로 느껴지지 않았다. 그와 결혼하면 황궁에 틀어박혀 살면서 제국의 어머니 역할을 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버텨. 게다가 나는 그럴 만한 그릇도 되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 봐. 양과 나라면 그래도 원만하게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대는 영리하니까 국모 역할도 잘할 거야. 에른스트와 황실의 조합이라, 그것도 좋고."
그런데 반쯤은 장난으로 이야기를 꺼냈던 다이스가 그 후 갑자기 신중한 얼굴이 되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러더니 돌연 눈을 번쩍 뜨고 나를 쳐다보는 것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정말 양만큼 좋은 신붓감이 없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일단 제 출신이 두고두고 전하의 발목을 붙잡을 텐데요."
"그런 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 그대는 에른스트잖아."
다이스는 뜻밖이라 느껴질 정도로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에른스트 공작의 누이로 비호받는 그대에게 누가 감히 그런 소리를 하겠어? 게다가 나는 이래 봬도 제국민들에게 사랑받는 황손이란 말이지. 그런 사소한 일로 발목 잡히지는 않아."
그 정도로 에른스트 공작의 동생인 내 위치가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황손으로서의 다이스의 자신감이 대단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감사한 말씀이지만 제가 그럴 그릇이 되지 않아요."
그래도 내 대답은 그대로였다. 그러자 다이스가 눈을 가늘게 좁히며 재미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양은 평소에 스스로를 과소평가하는 성격이지?"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거죠."
"현실적이기는 무슨."
아무래도 그는 나를 내 생각보다 높게 쳐주고 있는 모양이다. 그게 고맙기는 했지만 영문을 알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다이스는 나를 무척 편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내 앞에서 스스럼없이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걸 보면. 어차피 진심이 아닌 청혼이라고 하나, 내 거절을 무례하다고 여길 수 있는 일이었는데도 언성 한 번 높이지 않기도 했고.
"그래도······ 지금 내 말을 너무 빈말로 듣지는 마. 난 그대를 꽤 좋아하고 있고, 결혼 상대자로도 훌륭하다고 생각하니까. 어차피 양도 누군가와는 혼인해야 하잖아? 혹시 달리 마음에 품은 상대가 있는 거야?"
다이스의 물음에 나는 잠시 동안 눈동자를 내리깔고 침묵했다.
마음에 품은 상대라······.
하지만 이번에도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아쉽게도 아직은 없어요."
"그럼 나랑······."
"거절합니다."
"생각 좀 하고 말하라고!"
나는 다이스의 투덜거림을 못 들은 척하고 차를 홀짝거렸다.
설탕을 많이 넣었는데도 어째서인지 입안에 머금은 찻물이 조금 쓰게 느껴졌다.
21.5 그 오빠, 유진
문득문득 하리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꽃다발을 품에 안은 그녀를 우연히 마주쳤던 날 이후로 이따금 있어 왔던 일이었다. 그런 느낌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불쑥 고개를 들어 유진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하지만 차차 나아질 것이라 여겼다. 그동안 떨어져 있던 시간이 길어 그런 것뿐이라고.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얼마나 안일한 생각이었는지.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이 전부입니다."
깨달음에 별다른 계기가 있던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