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그 오빠들을 조심해 71화
지금도 다이스는 그날을 회상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몽롱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눈빛도 아련했다.
"그런데 그런 나한테 와서 벨론티아 양이 다정하게 손수건을 건네줬어."
나는 바람직한 청자의 자세로 조용히 그의 말을 경청했지만 사실은 조금 난처한 기분이었다.
"헛구역질을 하는 내 등을 두드려주기까지 하고. 그 많은 사람 중에 내 상태가 안 좋다는 걸 눈치챈 건 벨론티아 양뿐이었어. 정말 세심하고 상냥하지 않아?"
아, 예······. 정말 세심하고 상냥하군요.
당신이 왜 벨론티아에게 빠졌는지는 알겠어. 그런데 그 벨론티아 양이 내 오빠의 약혼녀라는 사실을 잊은 건 아니겠죠?
자기가 기껏 질문해 놓고 왜 난처해하냐고 물어보면 나도 억울했다. 조금 전에 다이스가 물어봐달라는 듯이 나를 쳐다보면서 계속 무언의 강요를 했단 말이야!
아무래도 이런 얘기를 할 수 있는 마땅한 사람이 주위에 없다 보니 그는 나라도 붙잡고 속에 든 감정을 털어놓고 싶은 것 같았다.
"그게 언제 있던 일인가요?"
"3년 전의 신년제 때."
그날의 일을 하루 이틀 곱씹어 상기했던 것이 아닌 듯, 대답은 곧바로 돌아왔다.
헉, 잠깐. 그럼 유진하고 약혼하기 전부터 로자벨라를 좋아했던 건가?
나는 조금 전보다 더 애매해진 기분으로 다이스를 힐끔 쳐다보았다.
"걱정하지 마, 그녀가 에른스트 공의 약혼녀인 건 항상 주지하고 있으니까. 게다가 나도 그를 형제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고."
다이스는 내 시선의 의미를 알아차린 듯이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어려 있었다.
"오늘도 황궁 도서관에서 나오는 벨론티아 양을 우연히 만나 잠시 담소를 나눈 것뿐이고······."
"하지만 고백하려고 하셨잖아요."
"그, 그건 나도 모르게······."
내가 그냥 넘어가지 않고 지적하자 다이스의 얼굴에 낭패감이 떠올랐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신하의 여인을 탐내는 주군 같은 모양새가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도 조금 전 자신이 보인 모습이 많이 부끄럽고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딱히 전하를 책망하려고 말한 건 아니에요. 애초에 제게 그럴 자격이나 있나요."
그래, 애초에 사람 마음이란 게 그렇게 생각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지······. 그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양에게 자격이 왜 없어. 그대는 유진의 동생이고, 또 내 벗이잖아. 자격이라면 넘치도록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다이스는 스스럼없이 나를 벗이라고 칭했다. 나는 그를 향해 설핏 웃었다.
"그것참 감사한 말씀이네요."
그런데 로자벨라는 다이스의 마음을 모르는 걸까? 무의식중에 내비치는 그의 노골적인 반응을 보면 모르기가 더 어려울 것 같은데······.
하기야, 혹시 안다 해도 뭘 어쩐단 말인가. 다이스가 직접적으로 제 마음을 밝히지 않으면 모르는 척하는 게 맞는 것이고, 만약 밝힌다고 하면······. 그때부터는 지금까지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난감한 상황이 되겠구나.
그러니 아마 다이스가 진짜로 로자벨라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물론 오늘처럼 가끔씩 저도 모르게 위험한 짓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바보 같은 말을 덧붙이며 화제를 돌려왔으니까.
"기운 내세요, 전하."
나는 또다시 시무룩해진 다이스를 향해 격려 아닌 격려를 해주었다. 하지만 다이스의 유일한 청자인 나도 결국은 그를 응원해 줄 수 없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유진의 편이었기 때문이다.
***
저녁 무렵, 나는 씁쓸한 마음을 안고 다이스의 궁을 나섰다.
로자벨라를 향한 다이스의 진심을 알고 나서부터 그를 마주하는 것이 영 마음 편치 못했다. 솔직히 내가 중간에서 뭘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로자벨라는 유진의 약혼녀이니 그만 마음을 정리하라고 내가 다이스에게 종용할 위치도 아닌 데다, 애초에 다이스 스스로도 그런 생각을 안 해봤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사라질 마음이라면 아마 진작 잘라냈겠지.
혹시 예전에도 그는 로자벨라를 좋아했던 걸까? 그러니까, 내가 27살이던 그 세계에서 말이다. 물론 이제 와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아가씨."
그때 조용히 나를 뒤따라오던 에단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곧 맞은편에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앗, 유진이다.
"오빠!"
나는 내가 타고 온 마차 옆에 서 있는 유진에게 거의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도 나를 향해 시선을 움직였다. 그 직후, 유진이 미간을 좁히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뛰지······."
하지만 그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나는 발목을 삐끗하고 말았다. 이제는 나도 나이가 들어서 밖에 외출할 때면 높은 구두를 신고는 했는데, 그걸 깜빡 잊고 뛴 것이 문제였다.
앗, 설마 지금 여기서 내가 넘어지는 건가?! 이렇게 구경꾼들이 있는 앞에서?!
"으아!"
아차 하는 사이에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하지만 어느덧 앞으로 다가온 유진이 나를 받아줘서 다행히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거의 매달리다시피 나를 감싼 유진의 팔을 붙잡았다.
와, 진짜 깜짝 놀랐다. 하마터면 꼼짝없이 황궁의 대로변에서 창피한 꼴을 보일 뻔했네. 만약 그랬으면 한동안은 황궁에 발도 안 들였을 거야. 흐흑.
머리 위에서 내쉬어진 숨에 앞머리가 작게 흔들렸다. 그러고 보니 유진이 아직 나를 잡아주고 있었다.
아, 그런데 너무 가깝다. 나는 빨리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며 그에게 약간 어색하게 감사 인사를 했다.
"잡아줘서 고마워. 하마터면 넘어질 뻔······."
그런데 그 순간, 내 팔을 붙잡은 그의 손에 지그시 힘이 들어갔다. 그리고 그 직후, 곧바로 유진이 나를 뿌리치듯이 떼어냈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그 순간 어라, 싶었다.
"어, 괜찮아요."
나는 에단의 물음에 대답하며 마주한 얼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조심했어야지. 다칠 뻔했잖아."
하지만 이어지는 유진의 행동이나 말이 자연스러워서 옆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이상함을 느끼지 못한 눈치였다.
나를 응시하는 그의 얼굴로 평소처럼 담담했다. 그래서 나도 '혹시 조금 전의 내 느낌은 착각이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하리 양, 저도 있습니다."
"로웬그린 씨, 안녕하세요."
지금까지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로웬그린이 유진의 뒤에서 슬그머니 인사해 왔다.
"오늘 입궁하셨다고 들었는데 뵙지 못해서 아쉬워하던 참입니다."
"아, 오늘은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곧바로 전하를 만나 뵈러 갔어요."
"그러셨군요. 그래도 지금은 마침 시간이 잘 맞아 두 분이 함께 귀가하실 수 있겠네요."
나는 오늘 일찍 퇴근해 기분이 좋은 것 같아 보이는 로웬그린과 잠시 동안 인사를 나누었다.
아까는 관료들과 대화하는 유진을 보고 발길을 돌린 것이었지만 그렇게 말하면 괜히 신경 쓸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냥 애초에 곧바로 다이스의 궁으로 향한 것처럼 말했다.
"돌아가자."
이윽고 나는 유진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 올랐다. 슬쩍 그의 얼굴을 훔쳐봤지만 조금 전의 위화감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은 일이 일찍 끝났나 보네. 평소보다 이른 시간인데 퇴근하는 걸 보니까."
"도중에 손님이 오기도 했고, 급한 일도 별로 없어서 겸사겸사 일찍 마무리했어."
그 손님은 아마도 로자벨라일 터였다. 아까 다이스와 나누던 대화에서도 약혼자를 보러 갈 것이라 했었으니까.
"그래."
나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더 묻는 것도 묻지 않는 것도 고민이 되어서 그냥 애매하게 대꾸한 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잠시 동안 내 얼굴을 응시하던 유진이 지나가듯 물은 말에 나는 제풀에 놀라 흠칫하고 말았다.
"별일 없었어?"
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무슨 별일?"
나는 애써 침착하게 반문했다.
오늘 로자벨라를 본 일도, 다이스의 짝사랑에 대한 추억을 반강제로 얻어들은 일도 없던 것처럼. 유진이 눈동자가 나를 흘깃 스쳐 지나갔다.
"오늘따라 이야기가 길어진 것 같아서."
그는 내가 평소보다 늦게 다이스의 궁을 나온 것에 의문을 느낀 모양이었다.
"아, 그냥, 특별한 얘기를 나눈 건 아닌데 오늘따라 시간이 빨리 갔어."
"그래?"
"응."
다행히도 내 대답에 유진은 다른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의심하는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남몰래 안심하며 그를 향해 헤헤, 웃어 보였다.
***
"하하, 정말? 요한 오빠가 고생했겠네."
그날 저녁, 나는 요하네스와 통신석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주말에 바스티에로 돌아갔던 그가 루이제의 넘치는 발랄함 때문에 곤욕을 치렀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웃었다.
[나보다는 어머니가 고생이시지. 매일 네가 있을 때가 좋았다면서 한탄하셔. 루이제가 그래도 네 말은 잘 들었으니까.]
"아주머니 뵙고 싶다."
[다음에 놀러 와. 우린 언제든 환영이야.]
오늘은 평일이기 때문에 요하네스는 학술원에 있었다. 앉아 있는 그의 뒤로 언뜻 기숙사 방의 풍경이 비쳤다. 주인의 성격을 나타내듯 방은 깔끔하고 단정했다.
지금처럼 통신석을 통해 종종 보았던 카벨의 어수선한 방과는 완전히 천차만별이었다.
[야, 너 딱 걸렸어! 누가 내 동생하고 통신석 하래!]
그런데 바로 그때,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고막을 뚫고 들어왔다. 그 후 통신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카벨이었다.
아이고,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그는 방금 막 씻었는지 축축이 젖은 머리 위에 수건을 얹고 있었다.
응? 그러고 보니 저놈이 왜 요하네스의 방에 들어온 거지? 평소에는 그의 이름만 들어도 이를 갈면서.
요하네스 역시 같은 의문을 느꼈는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뭐야, 네가 어쩐 일로 내 방에 들어온 거야?]
[헹, 내 위대하신 촉이 왠지 오늘 즈음에 네가 수상쩍은 짓을 할 것 같다고 말해주었지!]
[난 내 방에 들어와도 된다고 너한테 허락한 적 없는데.]
[네 허락 따위 필요 없거든!]
잠시 아웅다웅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쯧쯧 혀를 찬 뒤 통신석 너머의 둘째 진상을 향해 서운하다는 듯 말했다.
"카벨 오빠, 나한테 인사도 안 해줄 거야?"
그러자 카벨이 요하네스를 제쳐 두고 내 쪽으로 바짝 다가왔다.
[이 자식 말고 나한테 통신석 통화 걸어! 나 지금 완전! 한가한데! 시간이 그냥 막! 막 남아돌아!]
그, 그런데 둘째 진상아. 너 지금 통신석에 너무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잖아? 네 모공까지 다 보이겠다!
나는 통신석을 꽉 채우고도 남는 카벨의 얼굴에 은근한 부담감을 느끼며 슬쩍 몸을 뒤로 물렸다.
"이제 곧 점호 시간이잖아. 오빠한테는 내일 걸게."
[괜찮아, 내가 기숙사장 이겨!]
이기긴 뭘 이기냐, 이놈아! 네 벌점이냐 챙겨!
통신석 너머로 다시 한번 아웅다웅 티격태격하는 소리가 울렸다. 잠시 후 카벨을 치우는 데 성공했는지, 이번에는 요하네스의 단정한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미안, 하리. 잡소리가 너무 길어졌네.]
[뭐?! 너 지금 나한테 하는 소리······.]
[벌써 시간이 꽤 늦었어. 이제 쉬어야지.]
"응, 나도 내일 외출해야 해서 지금 일찍 자려고."
[아, 저리 비켜봐! 외출한다고? 나도 갈래!]
"올 수 있으면 와보던가."
눈치 없이 끼지 마라, 둘째 진상아. 그리고 넌 학술원에서 수업 들어야지!
나는 징징거리는 카벨을 뒤로한 채로 요하네스와 인사를 나눈 뒤 통신석을 종료시켰다.
"아, 피곤하다."
그러고 난 후 침대에 풀썩 드러눕자 피로에 젖은 몸이 급격히 노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