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
그 오빠들을 조심해 70화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마차가 멈추어 섰다. 어느덧 황궁의 정문에 도착한 모양이다. 하지만 기다리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마차에 새겨진 문장을 본 황궁의 문지기가 곧바로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 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황손 다이스의 초대를 받아 궁에 출입한 지도 어느덧 벌써 1년이 넘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나는 창문에 드리워진 커튼을 걷고 밖에 있는 사람에게 눈인사를 해주었다. 나와 눈이 마주친 기사가 화들짝 놀라며 지금까지보다 몸에 기합을 더하는 것이 보였다.
마차는 조금 더 움직인 뒤 이내 완전히 멈추어 섰다. 이번에도 나는 에단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려섰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황성의 외궁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마차의 출입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목적지까지 걸어가야만 했다.
"잠깐 유진 오빠한테 들렀다 가요."
오늘의 내 최종 목적지는 황손 다이스가 있는 내궁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잠시 유진을 보고 갈 생각으로, 나는 에단과 함께 싱그러운 녹색이 우거진 길을 걸었다.
일부러 일찌감치 저택을 나섰기에 아직 다이스와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길을 걷는 동안 황성 안에 있는 궁인들과 여러 번 마주쳤다. 그들은 모두 익숙하게 나를 향해 인사해 주었다.
"비숍 경도 인사해 주지 그래요? 다들 저렇게 기대감을 품고 쳐다보는데."
나는 에단을 열심히 힐끔거리는 시녀들을 보다가 문득 짓궂은 마음이 들어 말했다. 그는 잘생긴 외모로 어디를 가나 뭇 여인들의 시선을 독차지하고는 했다. 물론 에단은 그런 여인들을 상대로도 언제나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저렇게 꽃 같은 예쁜 아가씨들이 자기를 보고 흠모하는 눈빛을 감추지 않는데 참 한결같이 무심하단 말이지?
이번에도 역시 그는 농담 섞인 내 말에 무표정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호위 중에는······."
"예, 예. 사적인 대화도 안 하고 옆으로 한눈도 안 팔겠죠."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우린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 라서가 아니라 이미 1년 동안 외울 정도로 들었으니까!
그나저나 반응이 참 재미없네. 흠, 이래도 계속 무덤덤할까?
"혹시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호위하느라 눈이 높아져서 그런 건 아니고요?"
나는 장난기가 샘솟아서 에단을 슬쩍 놀려 보았다. 예전부터 안 그런 척하면서 내가 가끔씩 놀릴 때마다 흠칫흠칫 반응하는 모습이 꽤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의 내 미모는 한창 물이 오르기 시작한 때라서 내가 이런 식으로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눈웃음을 치면 당황해 얼굴을 붉히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내 얼굴을 본 에단이 다음 순간 굳어졌다.
"그다지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 해서 지금 당장 죽고 싶지는 않습니다."
억, 그런데 그의 반응이 너무 심각해서 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으, 으음. 나한테 반해서 주변에 얼쩡거리는 사람들을 그동안 둘째 진상이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 전부 지켜봐서 그런가? 크흑, 카벨이 좀 그런 면에서 진상짓을 많이 하기는 했지.
"커흠, 농담이에요."
나는 헛기침을 한 뒤 다시 에단을 등지고 걸었다.
사실 나도 진짜로 그를 꼬셔보려고 한 건 절대 아니었다. 어차피 에단이 넘어오지 않으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그, 그래도 저렇게까지 정색을 하는 걸 보니 조금 민망하구나.
"어?"
그렇게 다시 길을 걷던 중에 나는 문득 저 멀리 있는 사람을 눈에 담았다.
"오빠다."
유진이었다.
아마도 조금 전 회의가 있던 모양이다. 그는 건물 1층의 기둥 옆쪽에 서서 다른 관료들로 보이는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연히 그 소리까지는 내가 있는 곳까지 닿지 않았다.
오후의 햇빛이 그의 몸 윤곽을 따라 노란 잔상을 덧그렸다. 강렬한 빛 때문인지 서늘한 얼굴에 그려진 음영이 한결 더 두드러져 보였다.
무슨 이야기 중인지는 모르나, 대화를 이끌고 있는 것은 유진인 듯했다. 그는 그 자리에 모인 사람 중 단연코 가장 젊었으나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 쩔쩔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잠시 동안 가만히 서서 바라보았다. 그의 성장을 기뻐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 건지, 여전히 알 수 없는 마음을 안은 채로.
그리고 이내 먼발치에 있는 사람에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금 걸음을 옮겼다.
방해하지 말아야지.
"뵙고 가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지금 봤잖아요."
모처럼 에단이 먼저 물어서 나는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원래도 다이스를 만나러 올 때, 가끔 시간이 맞으면 유진이 일하는 곳에 찾아가 종종 얼굴을 보곤 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냥 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관료들과 대화 중인 유진을 방해할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고개를 들어 건물 너머로 보이는 시계탑을 시야에 담았다. 황궁의 정중앙에 위치한 시계탑은 궁 안 어디에서도 눈에 잘 띄었다.
아직 약속 시간까지는 좀 남았는데. 그동안 내가 황손과 많이 친해지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미리 기별하지도 않고 약속 시간 전에 불쑥 찾아가는 건 실례겠지.
아직 초여름이라 날씨도 별로 덥지 않겠다, 그냥 좀 걷다가 갈까?
그렇게 마음을 정하고 나는 초목 아래의 갈림길에서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쏴아아.
머리 위의 나뭇잎이 몸을 맞대며 부스러지는 소리를 냈다. 황궁의 정원은 허가받고 궁 안으로 들어온 손님도 이용할 수 있었다.
응? 그런데 오늘은 어쩐 일로 기사들이 정원으로 향하는 길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들은 나도 꽤 자주 얼굴을 본 적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앗, 저 사람들은 다이스의 기사들인데. 지금 정원 안에서 그가 산책이라도 하고 있나?
곧 나와 눈이 마주친 기사가 나를 아는 척하며 입을 열었다.
"에른스트 양, 지금은 정원에 출입하실 수······."
"다, 다음에는 저와 함께 보러 가시죠!"
하지만 정원 안쪽에서 새어 나온 음성이 기사의 말을 끊었다.
"다이스 전하께서 손님과 함께 계시나 보네요."
내가 슬쩍 입구 쪽을 보며 하는 말에 기사가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같이 있는 사람이 누구기에 그러지?
그런데 다이스가 저렇게 바보처럼 말을 더듬으며 대화할 상대라면 한 사람밖에 없을 텐데······.
"전하께서도 오페라 관람을 좋아하시나요?"
뒤이어 내 귓가에 흘러든 목소리를 듣고 나는 그 사람이 누구인지 대번에 눈치챘다. 지금 황손 다이스와 함께 있는 사람은 로자벨라 벨론티아였다.
"좋아합니다······."
"그러셨군요. 미처 몰랐네요."
나는 약간 골치가 아파졌다. 저 사람은 꼭 저렇게 로자벨라만 앞에 두면 사람이 바보 같아진다니까. 게다가 지금 정원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기사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미 이 사람들에게도 자신의 마음을 다 들킨 게 분명했다.
어쩐지 조금 전에도 꽤나 곤혹스러워하면서 내 앞을 막아서더라니. 하기야 평소에 다이스의 옆에 항상 붙어 있는 사람들이니 눈치채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한가.
"벨론티아 양!"
그런데 다이스가 이번에는 좀 더 소리 높여 그녀를 불렀다.
"예. 말씀하세요, 전하."
아무래도 정원의 입구 근처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양이다. 이렇게 선명하게 말소리가 들리는 걸 보니까.
"그, 그러니까······ 내가 조, 좋아한다는 건······."
앗, 그런데 이 분위기는 설마!
나는 심상치 않은 느낌에 잠깐 긴장했다. 하지만 설마 황손씩이나 되는 사람이 여기서 경솔한 말을 꺼낼 리는 없겠지?
게다가 내가 아는 다이스라면 분명 이 시점에서 또 이상한 말을······.
"사실 내가 좋아하는 건, 그러니까 영애······."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에 나는 참담한 기분으로 침묵하고 말았다.
"영애의 모자에 달린 그 공작 깃털을 좋아합니다, 저는······! 미의 극치에 달한 그 완벽한 곡선 하며, 영롱한 푸른빛도 정말이지 아름답군요!"
아이구야.
나도 모르게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말았다.
아니, 내가 딱히 저 사람을 응원하는 건 아니지만······ 크흑, 그래도 이건 좀 짠 내가 나잖아!
"감사합니다. 전하께서는 푸른색을 좋아하시나 보네요."
로자벨라는 아까부터 바보같이 구는 다이스를 상대하면서도 계속 차분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약혼자를 만나러 가야 해서요."
"아······. 그래요. 제가 양의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았군요."
잠시 후 잇따른 로자벨라의 말에 다이스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아닙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어요."
하지만 잇따른 로자벨라의 음성은 뜻밖에도 옅은 웃음을 담고 있었다. 나는 에단을 데리고 슬쩍 옆쪽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 먼저 정원을 나선 로자벨라가 호위 기사를 데리고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곧이어 나타난 다이스가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돌연 머리를 감싸며 신음을 흘렸다.
"으우윽······!"
아무래도 조금 전 자신이 보였던 호구 같은 모습을 떠올리고 타격을 입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남몰래 혀를 차다가 슬그머니 나무 뒤에 숨겼던 몸을 드러냈다.
나를 발견한 다이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야, 양이 여긴 왜!"
하지만 내 얼굴을 보고 곧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그의 낯이 서서히 발갛게 달아올랐다.
"전 아무것도 못 들었어요."
나는 다이스를 향해 선의의 거짓말을 해주었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다.
혹시 지금 내가 나도 모르게 그에게 측은한 눈빛을 보내고 있어서 그런가?
아무래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다이스가 나를 향해 부아가 치민 얼굴을 하며 버럭 소리 질렀다.
"나도 알아! 양도 내가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
"그렇게 말씀하셔도······."
아니, 물론 조금은 바보 같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그래도 내가 그걸 네 앞에서 어떻게 곧이곧대로 말하겠니?
"그래, 나도 내가 바보 같으니까 비웃고 싶으면 얼마든지 소리 내서 비웃어도 좋아!"
다이스는 평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보이는 근엄한 황손의 모습을 벗어던진 채 어린애처럼 심통을 부렸다. 이제 내가 그를 어느 정도 편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그도 나를 제법 친근하게 대하고 있었다.
"아니에요, 전하. 소리까지 내서 비웃고 싶을 정도로 바보 같지는 않았어요."
"그 말은 역시 바보 같기는 했다는 거네······."
내 말에 다이스가 좌절한 듯이 중얼거렸다. 나는 딱히 해줄 말이 없어서 그냥 짠하게 웃어 보이기만 했다.
다이스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며 또다시 혼잣말을 읊조렸다.
"아, 왜 벨론티아 양의 앞에만 서면 이렇게 멍청해질까."
황손인 다이스.
현재 그는 유진의 약혼녀인 로자벨라 벨론티아를 짝사랑하는 중이었다.
***
"뭐? 내가 어쩌다 그녀를 마음에 담게 되었는지 궁금하다고?"
세간에서는 '황손 다이스가 하리 에른스트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번지고 있다지만 그것은 전부 다 헛소문이었다.
"좋아, 양은 내 친구니까 특별히 말해주지."
그가 진짜 좋아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로자벨라였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마차 공포증이 있어. 양도 잘 알고 있는 그 사냥터에서의 일 이후에 생긴 증상이지. 하지만 내 위치가 위치다 보니까 어쩔 수 없이 마차에 올라야 하는 상황이란 게 생기잖아?"
내가 그 사실을 처음 눈치챈 것은 다이스의 말벗으로 황궁에 출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래서 그날도 나는 사람들 앞에서 억지로 웃으며 마차에 올라야 했지."
사실 특별한 계기라 할 것은 없었고, 지금처럼 로자벨라를 눈앞에 둔 다이스가 답지 않게 말을 더듬으며 어리숙하게 구는 모습을 보고 불현듯 깨달은 것이었다.
"이동하는 내내 식은땀은 나고 숨도 막히고······. 진짜 딱 죽을 것 같더라고. 그래도 별수 있나? 또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내려서 사람들한테 손도 흔들어주고 신년인사도 끝마친 뒤에 아무도 없는 데로 가서 뻗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