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그 오빠들을 조심해 67화
그 말이 진짜였으면 카벨하고 요하네스가 이날 이때까지 이렇게 사이가 안 좋을 리가 없어. 아무래도 두 사람은 상성이 잘 안 맞는 것 같다.
"씨이, 넌 왜 그 자식 편만 들어?! 오늘도 요하네스 자식이랑 같이 오고! 원래 내가 네 파트너 하려고 했는데!"
그, 그런데 카벨이 너무 서럽게 외쳐서 한순간 흠칫했다. 아무래도 내가 자신을 두고 요하네스와 연회장에 온 것이 생각보다 더 서운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둘째 진상과 셋째 진상 중에 한 명만 고르기가 난감했을 뿐이고! 또 요하네스가 그때 너무 예쁘게 웃으면서 말해서 차마 거절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을 뿐이고!
"누, 누구 손을 붙잡고 오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카벨 오빠를 제일 좋아하는데."
내, 내가 분신술을 할 줄 아는 것도 아니고 어쩌겠니. 그래도 이렇게까지 서러운 얼굴을 하니까 괜히 좀 미안해지기는 한다.
"그런데 왜 내가 아니라 저 자식을 선택했어!"
"내가 카벨 오빠를 제일 좋아한다는 걸 들키면 다른 오빠들이 서운해하잖아."
둘째 진상이 또 배신감을 느낀 듯이 외쳐서 나는 그를 살살 구슬렸다.
이 자식, 그런데 너 진짜 날 좋아하는구나? 내 파트너를 못 해서 그렇게 서운했어요?
"카벨 오빠는 내 마음을 제일 잘 아니까 이 정도는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했지."
단순한 카벨이 내 말에 멈칫했다.
"그리고 오빠는 마음이 아주아주 넓잖아. 사실 내가 곤란해할까 봐 오빠가 요한 오빠한테 오늘 파트너 자리도 양보한 거 다 알고 있어. 역시 우리 카벨 오빠야."
아, 그런데 말하다 보니까 슬슬 귀찮아져서 약간 건성이 되었다. 그래도 둘째 진상은 내 감언이설에 홀랑 넘어와서 언제 나한테 삐졌었냐는 양 우쭐거렸다.
"흐, 흥! 그럼, 당연히 내가 널 위해서 그놈한테 양보한 거지! 역시 이 카벨 님 마음이 제일 넓다니까!"
아이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한테 배신감이라도 느낀 것처럼 서러워하던 놈이. 그래도 쉽게 넘어와서 다행이다.
"에른스트 양!"
그런데 바로 그때, 어디에선가 매우 밝고 해맑은 음성이 날아들었다. 응? 누가 날 이렇게 반갑게 부르는 거지?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곧바로 시야에 들어온 사람에 흠칫 어깨를 떨고 말았다.
"드디어 만났네요! 정말 반가워요."
앗, 라벤더 코르디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향해 한달음에 달려온 사람은 다름 아닌 라벤더 코르디스였다. 나풀거리는 붉은 드레스가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내 코앞까지 순식간에 다가와 섭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코르디스에 와주지 않았어요? 그동안 얼마나 만나고 싶었는지 몰라요."
누, 누가 들으면 우리가 한 10년 정도 알고 지낸 사이인 줄 알겠네요.
나는 내 앞으로 가까이 와서 간드러진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를 보고 조금 당황했다. 가뜩이나 지난번 의상실에서 만난 후로 매일같이 초대장을 보내 와서 부담스러웠는데.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왜 이렇게 나한테 친한 척을 하는 거지?
"전 영애를 마음속의 친구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소식도 전해 오지 않으시고. 서운하네요."
마, 마음속의 친구요? 누가요? 댁하고 제가요?
나는 상상도 못 했던 그녀의 말에 그만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라벤더 코르디스는 진짜로 서운하다는 듯이 나를 향해 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지난 생을 통해 그녀의 본색을 아는 나로서는 그녀의 그런 모습에 기가 막히기만 했다.
그때, 할 말을 잃은 나를 대신해 옆에 있던 카벨이 입을 열었다.
"뭐야? 내 동생은 바쁘다고. 하루에 초대장이 몇 개나 오는 줄 알아? 그러니까 그만 귀찮게 굴고 꺼지······ 커억!"
거기까지!
나는 아까 그랬듯 다시 한번 카벨의 발등을 콱 밟았다. 그러자 고통의 신음이 뒤를 이었다. 카벨의 험악한 기운도 동시에 흐트러졌다.
미안하다, 둘째 진상아! 그러니까 왜 한 번씩 필요 이상으로 지나치게 굴어서 날 이렇게 만드니?
내가 그때 설명을 잘했는데도, 카벨은 매일 나한테 초대장을 보내던 라벤더 코르디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미안해요, 코르디스 양. 영애도 아시겠지만 근 한 달간 이런저런 준비로 바빠 초대에 응하지 못했어요. 답장을 보냈는데 혹시 받지 못하셨는지요?"
나는 내 앞에 있는 라벤더를 향해 웃는 낯으로 물었다. 그러자 카벨의 기세에 약간 주춤하던 그녀가 다시금 속눈썹을 팔랑거리며 대답했다.
"으응, 물론 받았지만 내가 원하는 내용이 아니었는걸요?"
나는 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금 왜 나한테 애교를 부리듯이 말하는 거지요······?
이건 진짜 이상했다. 왜 이렇게까지 해서 나와 친해지려고 하는 걸까? 혹시 이번에는 아직 유진을 좋아하기 전이라서 내가 눈엣가시처럼 보이지 않는 건가?
"그런데 공작님은 오늘도 많이 바쁘신가 봐요? 인사할 틈도 없네."
하지만 뒤이어 라벤더 코르디스의 얼굴을 본 나는 그런 가설을 곱게 접어두기로 했다. 저 멀리 서 있는 유진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완전히 사랑에 빠진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잠깐, 그럼 더 이해가 안 되는데요? 예전에는 유진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여동생이라는 이유로 나를 그토록 싫어했으면서, 왜 지금은 오히려 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안달인 건데?
"양과 좀 더 친밀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단둘이 잠깐 테라스에 가서 운치 있게 밤하늘이라도 보지 않을래요?"
라벤더 코르디스가 은근한 목소리로 나한테 속삭였다.
참나,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댁이 나한테 작업이라도 거는 줄 알겠네요. 나는 의상실에서 딱 한 번 우연히 만난 게 전부이면서 갑자기 살갑게 구는 그녀가 거북했다.
"그쪽이 뭔데 내 동생이랑 단둘이 테라스에······."
발등이 아파 끙끙거리던 카벨이 라벤더의 말에 자극받은 듯이 발끈하다가 내 따끔한 눈빛에 찔끔해 입을 다물었다.
"죄송하지만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요. 그리고 제 호위 기사가 항상 곁에 있기 때문에 단둘이 시간을 보내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지금도 내 뒤에는 에단이 그림자처럼 서 있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그에게 휴식을 주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지만 여느 때처럼 내 말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어멋?!"
에단이 은신술이라도 펼친 듯 워낙 조용히 있었기 때문인지 라벤더 코르디스는 그제야 그의 존재를 알아차린 듯했다.
"당신은······."
그런데 내 뒤에 서 있는 에단을 눈에 담는 순간 그녀가 멈칫했다. 한순간 그녀의 눈동자에 미묘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공작님께서 양을 많이 아끼시는 모양이에요. 수족 같은 이를 내어주신 걸 보니."
곧 라벤더가 다시금 표정을 풀며 호호 웃었다. 아주 순식간에 지나간 것이긴 했지만 그녀의 얼굴에 비쳤던 것은 분명 미약한 당혹감과 경멸이었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구나.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으며 나는 생각했다.
"하리."
그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요하네스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샴페인 잔이 들려 있었다.
"어머나, 바스티에 공자님이 양의 파트너였군요?"
"여기서도 뵙는군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코르디스 양."
요하네스와 라벤더가 인사를 나누었다. 두 사람은 다른 자리에서 만난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하리, 무알콜 샴페인이야. 마셔."
"고마워."
나는 그가 건네주는 잔을 받았다. 그때, 옆에 있던 카벨이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소리쳤다.
"뭐야, 왜 하나만 들고 왔어!"
"난 마실 생각이 없어서."
"네가 마시든 말든 알 바 아니고, 내 건!"
"내가 언제 네 것도 가져다준다고 했던가?"
요하네스가 싱긋 웃으며 대꾸한 말에 카벨이 어버버거렸다. 하지만 요하네스는 카벨의 반응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이 다시금 나를 향해 다정히 말했다.
"다 마시면 빈 잔은 나한테 줘. 내가 처리할게."
"고마워, 요한 오빠."
그런 우리의 모습을 라벤더 코르디스가 유심히 살피고 있었다.
"다이스 라 폰티에 아를란타 전하께서 드십니다!"
바로 그때 황손 다이스가 연회장에 등장했다.
모두가 연회장의 출입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나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였다.
아까와 같은 정적에 가득 찬 실내에는 누군가의 발소리만이 가득 들어찼다. 그 소리가 연회장 중앙에 멈추고 난 후에야 모두 고개를 들었다.
"모두, 황실과 에른스트의 새로운 화합을 기념하는 자리에 와주어 고맙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을 때, 황손 다이스가 입을 열었다.
나는 붉은 머리카락과 적포도주 빛 눈동자를 가진 소년을 눈에 담았다. 그는 현 황제가 끔찍이 아끼는 손자이자 차기 황제로 주목받는 사람이었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그에게는 왕재로서의 기백과 위엄이 있었다.
"그럼 모두 오늘 즐거운 시간 보내기를 바라오."
간략한 인사를 끝마친 후, 그는 그대로 연회장을 가로질렀다.
"여기 있었군요, 에른스트 공. 내 형제."
다이스가 가장 먼저 찾은 것은 유진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유진을 향해 상상 이상의 친밀감을 표하며 다가갔다. 유진은 그것조차 익숙한지 그저 담담히 반응했다.
"오늘 저희 남매를 위해 손수 마련해 주신 자리에 감사드립니다."
"공과 나 사이에 그런 겉치레는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카벨과 요하네스와 함께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황손인 다이스가 우리를 위해 마련한 자리이니만큼 그에게 인사를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저쪽에서 에리히와 루이제도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존귀한 분을 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모여 인사하자마자 어째서인지 다이스의 시선이 곧바로 나한테 꽂혔다.
"그대가 에른스트 공작의 누이?"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그래도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전하."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에는 흥미가 담겨 있었다.
"그대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하던데. 그럼 연회의 주인공에게 마땅히 선물을 주어야지요."
"선물이라니, 황송합니다. 오늘 베풀어주신 친절로 충분합니다."
황손의 선물이라니. 그게 뭔지는 몰라도 과분한 호의였다.
하지만 에둘러 표한 내 거절에도 그는 말을 이었다. 이번에는 연회장 안에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여서, 모두가 어렵지 않게 그의 말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었다.
"그대를 황성에 초대하겠습니다. 따분한 궁 생활을 달래줄 내 말벗이 되어주었으면 좋겠군요."
황손의 갑작스러운 발언에 금세 좌중이 소란스러워졌다.
나는 나대로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놀란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사람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면 조만간 에른스트에 서한을 보내도록 하지요."
그 속에서 오직 다이스만이 눈꼬리를 접으며 해사하게 웃고 있었다.
"궁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에른스트 양."
20. 변화하는 상황
"송구합니다만, 제 여동생은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려 전하의 말동무가 되어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다이스의 폭탄선언이 있은 후 연회장 안은 벌집이라도 터진 듯이 시끌벅적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황손이 자신의 말벗으로 다른 이를 궁에 직접 초대한 것은 처음이었으니까.
나도 크게 놀라 마주한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군가 거침없이 거기에 찬물을 끼얹는 발언을 하니, 그는 다름 아닌 유진이었다.
수, 수줍음이 많고 낯을 가려? 누가, 내가요? 아니, 그건 그렇고 당신, 황손의 말을 그렇게 단칼에 쳐내도 되는 거야?
생일 선물치고는 너무 파격적이라 처음에는 혹시 유진과 사전에 말을 맞춘 것인가 싶었는데 그의 반응을 보니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낯을 가린다고요? 그렇게 보이지는 않는데······."
"겉으로 티가 나지 않아 대개 그렇게 생각하곤 하지요."
"그,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단호박을 수십 개는 썰어 먹은 듯한 유진의 말에 다이스가 주춤했다.
"그럼 내가 양을 만나러 에른스트에 방문하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