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
그 오빠들을 조심해 66화
빈말이 아니라 진짜였다. 내 드레스에 맞춰 흰색으로 포인트를 준 정장을 차려입은 요하네스에게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에리히가 못마땅한 듯이 슬쩍 눈살을 찌푸렸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늘 내 에스코트는 요하네스가 해주는 것으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그것 때문에 카벨은 단단히 삐져서 오늘 연회장에도 따로 간다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그 재수 없는 놈이 널 에스코트하는 모습은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지 절대 못 봐!'라던데······.
그러면서 '흥 칫 핏!' 소리를 내며 문을 뛰쳐나가는 뒷모습이 어디를 봐도 자기를 붙잡아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나도 바빠서 그냥 둘째 진상이 집을 뛰쳐나가는 걸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소, 솔직히 말하자면 좀 귀찮기도 했다.
크흑, 이래서야 누가 오빠고 누가 동생인지 모르겠다니까? 하여간 성가신 놈 같으니라고. 이따 연회장에서 보면 그때나 아는 척해 줘야지.
쓰읍, 에리히 말마따나 요즘 시험공부하느라 고생했다고 좀 잘해 줬더니 이놈이 은근히 또 막 나가려고 한단 말이야. 아무래도 슬슬 둘째 진상의 단속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우리는 마차를 타고 연회가 열리는 카젠타 홀로 향했다.
유진은 약혼녀인 로자벨라 벨론티아를 데리러 갔다. 그는 우리와 따로 떨어져 입장해야 하는 것이 다소 마음에 걸리는 눈치였지만 그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연회장에서나 만날 수 있을 것이었다.
"긴장돼?"
멀리서 연회장의 불빛이 보였다. 창밖을 응시하고 있는 나를 향해 요하네스가 물었다.
"조금."
사실 연회 같은 것은 예전에 질리도록 경험해 봐서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지만 카젠타 홀에서 열리는 연회에 참석한 것은 처음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긴장이 되었다.
더군다나 이건 우리 때문에 열리는 연회잖아? 크윽, 긴장을 안 하는 게 이상한 거다.
"괜찮아. 그냥 평소처럼 하면 돼."
마침내 마차가 멈추어 섰다. 문이 열리고, 눈앞에 화려한 세계가 펼쳐졌다.
먼저 내려선 요하네스가 언제나처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항상 옆에 있을 테니까."
나는 잠시 동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를 따라 미소 지으며 그 위로 손을 겹쳤다.
***
연회장에 들어서자마자 집중되는 시선을 느꼈다.
모두가 소곤거리며 우리를 탐색하고 있었다. 이런 큰 연회에 우리가 다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건 처음이었으니, 모두의 관심이 쏠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인생 2회차! 이 정도 시선은 이제 익숙해서 아무렇지도 않죠!
물론 처음에는 그 대단한 카젠타 홀에 입장한다는 게 조금 떨리기도 했지만 막상 안으로 들어오고 나자 익숙한 분위기에 서서히 마음이 편해졌다. 음, 연회장이 무척 화려하고 웅장하다는 것 말고는 다른 연회와 비슷한 느낌인걸?
나는 요하네스의 손을 붙잡고 붉은 융단 위를 걸었다. 그는 처음에 약간 걱정스럽게 내 얼굴을 살피더니, 곧 태연해 보이는 내 모습에 조금 놀란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나를 걱정할 바에는 오히려 에리히와 함께 있는 루이제를 신경 쓰는 게 좋을 것이었다.
"와, 이렇게 화려한 연회장은 처음이야!"
그러나 루이제가 어떤 아가씨던가. 담대한 그녀는 조금도 긴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감탄을 연발했다.
쿨럭, 저런 걸 보면 가끔 루이제도 사실은 두 번째 인생을 사는 사람이 아닌지 조금 의심스럽다니까.
앗, 그렇게 연회장에 입장하던 중에 나는 카벨을 발견했다.
그는 우리한테 다가올까 말까 맹렬히 고민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옆에 있는 요하네스를 살기등등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그 흉포한 기운에 눌린 사람들이 하나둘씩 흠칫거리며 자리를 비켜 그의 주위는 어느덧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내 눈에도 쉽게 띄었다.
아이고, 저놈을 어떻게 할까. 끙, 하는 수 없지. 연회가 시작하기 전에 그냥 후딱 달래주자. 둘째 진상 주변만 분위기가 영 험악하잖아! 이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 음산한 기운이 연회장 곳곳에 퍼져나갈 게 분명해.
"카벨 오빠!"
나는 이제야 그를 발견한 척하며 활짝 웃어주었다. 그러자 카벨이 나를 향해 귀를 쫑긋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주위의 웅성거림이 한결 더 커졌다.
"연회장에 먼저 와 있었구나. 이리 가까이 와."
나는 아직까지도 삐졌는지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둘째 진상을 불렀다. 비록 그가 지금 마음이 상해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내가 부르면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역시 내 예상대로 카벨은 마치 내 부름을 기다렸다는 듯이 슬금슬금 나를 향해 다가왔다.
옳지, 옳지. 잘하고 있어. 좀 더 가까이 와라, 좀 더 가까이.
나는 마치 야생동물을 포획하는 사냥꾼이 된 것 같은 기분으로 카벨을 기다렸다.
"흥, 내가 나가든 말든 본체만체도 안 할 때는 언제고."
"내가 그럴 리가 있겠어? 오빠가 너무 빨라서 붙잡을 새도 없었단 말이야. 카벨 오빠 발이 얼마나 빠른지는 오빠가 제일 잘 알잖아."
역시 카벨은 나한테 단단히 삐져 있었는지 껄렁한 자세로 서서 또다시 '흥 칫 핏!' 하며 투덜거렸다.
사실 둘째 진상은 아까 '더 늦기 전에 나를 붙잡아, 어서!'라고 말하는 듯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느린 걸음으로 저택을 나섰다.
하지만 나는 귀찮아서 둘째 진상을 그냥 모른 척했던 게 없었던 일인 것처럼 그를 달래주었다. 그러자 단순한 카벨은 또다시 귀를 쫑긋거리며 금세 의기양양해했다.
"헹, 내가 좀 빠르긴 빠르지! 우리 학부에서 달리기도 내가 1등이니까!"
나는 점차적으로 짜식어 가는 마음을 숨긴 채 둘째 진상의 우쭐거림을 봐주었다. 그러자 곧 완벽히 회복한 카벨이 이번에는 요하네스를 삿대질하며 외쳤다.
"그러니까 잘난 척하지 마! 네가 오늘 하루 하리의 파트너가 되었다고 해서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건 절대 아니니까! 하리는 여전히 너 같은 것보다 날 더 좋아한다고! 알겠냐, 이 허접한 샌님······ 어억!"
거기까지만 해라!
나는 방긋 웃는 얼굴로 카벨의 발등을 지그시 밟아주었다. 그러자 불시에 기습을 당한 카벨이 고통 어린 단말마를 내지르며 끙끙거렸다.
"오빠, 우리 1절만 하고 이제 좀 조용히 하자. 응?"
나는 여전히 웃는 얼굴을 한 채 둘째 진상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내가 이를 악물며 읊조린 말에 카벨이 한차례 흠칫거렸다.
"때와 장소는 가릴 줄 알아야 멋진 오빠지. 이런 자리에서까지 오빠가 그러면 내가 속상하겠어, 안 속상하겠어?"
"아, 알았어. 안 그러면 되잖아."
오랜만에 내가 그를 향해 협박하듯 말하자 카벨이 식은땀을 흘리며 더듬더듬 대답했다. 예전에 둘째 진상이 내 마지막 협박까지 무시하고 막 나갔을 때 한동안 그를 완전히 상대조차 안 해준 일이 있었다. 그 후로 카벨에게는 제법 눈치란 것이 생겼다.
"이런 자리에서까지 여전하다니, 너도 참 쓸데없이 한결같구나."
내가 먼저 카벨에게 한 소리 한 탓인지, 아니면 그저 요하네스가 착해서 그런 건지, 그는 무례한 카벨의 언동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요하네스의 한숨 섞인 말에 카벨은 또다시 눈을 번뜩였다. 하지만 그래도 내가 한 말 때문인지 그는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꾹 참고 입을 열지 않았다. 불만 가득한 그의 입매가 시시때때로 꿈틀거렸다.
"유진 에른스트 공작님과 로자벨라 벨론티아 양이 드십니다."
그때, 우리와 따로 움직였던 유진이 드디어 연회장에 나타났다.
바로 그 순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작게 웅성거리던 연회장에 짙은 정적이 내려앉았다. 바늘 굴러가는 소리조차 들릴 것 같은 침묵이 사방에 고였다. 이런 일은 처음 겪는 것이었기 때문에 나는 약간 놀랐다.
검은 예복을 차려입은 유진은 나도 모르게 움찔할 정도로 아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 나와 있는 그를 본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런 유진의 얼굴이 새삼 낯설었다.
하지만 분명 다른 사람들이 늘 보아오던 것은 지금 그가 드러내고 있는 저 싸늘한 표정일 터였다.
나는 주위에 감도는 침묵을 기민하게 의식하며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유진은 이런 상황이 익숙한지 동요 한 점 드러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유진과 그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로자벨라 벨론티아는 무척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두 사람 모두 외모도 발군인 데다 어딘가 다가가기 어려운 고고한 분위기를 풍기는 것이 닮아 있었다.
그러던 중에 그의 손을 붙잡고 걷던 로자벨라가 무어라 귀엣말을 했다. 유진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 뒤, 그녀는 맞잡은 손을 놓고 자리를 비켰다.
"다들 와 있었네."
"형이 제일 늦었어."
한자리에 모인 우리를 주위에서 소리 죽여 응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유진은 뒤이어 바스티에의 남매와도 인사를 나누었다. 그 직후 내가 물었다.
"벨론티아 양은?"
"잠시 휴게실에."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연회장에 들어오자마자 휴게실을 찾아간 것을 보니 아마도 오늘 입은 의상에 문제가 있어서 확인을 하거나 화장을 고쳐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았다.
"긴장할 필요 없으니까 편하게 있어."
"응, 괜찮아."
문득 내가 걱정되었는지 유진이 말했다. 나는 그럴 필요 없다는 의미로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 그런 내 얼굴이 정말 괜찮아 보였는지, 유진은 곧 시선을 떼고 옆으로 눈길을 돌렸다.
"다들 형이랑 인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에리히의 말처럼 주위에는 우리에게 다가오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아 보였다. 하지만 그들은 열망 어린 눈빛과 달리 이쪽으로 쉽게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잠시만 다녀올게."
그러다 멀리서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누군가가 시야에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을 발견한 유진이 우리를 향해 짧게 말한 뒤 자리에서 발길을 뗐다.
잘은 몰라도 유진과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그 후 유진의 주위로 두세 명의 사람이 더 모여들었다.
"난 저쪽 가볼래. 오빠도 같이 가!"
"난 귀찮······."
"오빠가 내 파트너잖아! 당연히 같이 가줘야지!"
그러고 난 뒤 루이제가 에리히를 끌고 자리를 옮겼다. 어차피 본격적인 연회의 시작은 오늘 우리를 위해 이 자리를 열어준 황손 다이스가 모습을 드러낸 후부터였다.
"뭐라도 마실래?"
옆에 있던 요하네스가 나를 향해 물었다.
"아, 그럼 부탁할게."
"내 것도 가져와! 난 알코올 든 거로!"
둘째 진상아, 요하네스한테 술 맡겨놨니? 뭐 이렇게 뻔뻔하게 요구해!
"카벨 오빠······."
"헉."
내가 음산하게 이름을 부르자 카벨이 불현듯 정신을 차린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나, 난 그냥 네 거 가져오는 김에 내 것도 부탁한다고, 그 소리였어! 요하네스, 넌 내 말뜻을 알아들었지?!"
둘째 진상은 '빨리 그렇다고 말해!' 하는 듯이 요하네스를 홱 돌아보았다.
"넌 하리 옆이나 제대로 지키고 있어."
요하네스는 카벨을 더 상대하기 귀찮다는 것처럼 한숨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옮겼다. 그 직후 나는 카벨에게 붙어 서서 그의 팔을 꼬집었다.
"오빠 때문에 내가 못 살아. 진짜 오늘 왜 그래? 응? 응?"
"아, 아야야!"
"내가 요한 오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잖아. 특히 밖에서는 더 그러지 말라고 했지? 기억 안 나? 응?"
카벨은 다른 건 그래도 내 말을 잘 들어주면서 요하네스에 관련된 일에는 항상 이렇게 내 속을 썩였다.
크흑, 어릴 때 첫 단추를 잘못 끼워서 그런가. 남자애들이 싸우면서 친해진다는 말은 다 거짓말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