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그 오빠들을 조심해 65화
와아, 가만히 들어보니 둘째 진상을 다루는 유진의 솜씨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는 아주 능수능란하게 카벨을 요리했다. 크으, 역시 어릴 때부터 쌓아온 경험치가 있다 이건가!
나는 아직도 바보처럼 히죽거리고 있는 카벨을 약간 짠한 눈으로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그러다 문득 저쪽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휴버트를 발견했다.
"휴버트."
"에른스트의 분위기가 그새 많이 밝아진 것 같습니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그가 말했다. 휴버트는 어쩐지 감회가 새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공작님께서 저렇게 편안한 얼굴을 하고 계신 것도 몇 년 만인지······."
나는 그의 아련한 눈빛을 따라 유진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과연 휴버트의 말처럼 유진은 언제나 틈 하나 없이 딱딱하고 차가웠던 모습을 지우고 전보다 편안해진 분위기를 몸에 두르고 있었다.
"아가씨와 도련님들이 오신 후부터 어깨 위의 짐을 한시름 던 것처럼 전보다 한결 가벼워 보이시니, 저도 이제야 마음이 놓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는 정말 안심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자 이제껏 그가 느껴왔을 고뇌와 염려, 그리고 착잡한 심정이 선명히 전해져 왔다.
"휴버트 덕분이기도 해요. 우리 모두 그동안 휴버트가 유진 오빠 옆에 있어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감사는 제가 드려야지요."
휴버트는 고개를 저어 보인 뒤 나한테 고개를 한 번 숙여 보였다.
앗, 나야말로 감사받을 입장이 아닌데! 나는 당황해서 엉겁결에 휴버트를 따라 마주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뻘뻘거리며 고개를 들어보니, 휴버트가 그런 나를 향해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손녀를 보는 할아버지처럼 더없이 인자하고 또 푸근했다.
"그럼 슬슬 저녁 식사 준비를 시작하라고 식당에 전달하겠습니다."
휴버트는 소리 없이 걸음을 옮겨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나는 어릴 때 처음 그에게 머리를 쓰다듬어졌을 때처럼 조금 쑥스러워져서 괜히 손가락으로 코밑을 훑으며 발길을 돌렸다.
***
"다음 달에 있는 하리의 생일 때쯤 카젠타 홀에서 연회를 열 거야."
"푸읍!"
그리고 그날 저녁, 유진이 고요한 모습으로 폭탄을 던졌다. 나는 후식을 먹다 말고 사레가 들려 격렬하게 기침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카젠타 홀에서 연회라니! 내가 지금 잘못 들은 건가? 그, 그렇겠지?
"오, 역시 우리 형이야! 나만큼은 아니어도 멋져! 나도 거기 한번 가보고 싶었는데!"
하지만 카벨이 감탄하며 외치는 소리를 들어보니 아무래도 내 귀가 이상해서 잘못 들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떻게 연회를 거기에서 열어?"
나는 기겁을 해서 반문했다. 그러나 유진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태연히 대꾸할 뿐이었다.
"에른스트에 연회를 열 장소가 마땅치 않아서 황실에서 장소를 빌려주기로 했는데, 그게 왜?"
참 별일 아니죠잉?
나는 그의 말에 기가 막혔다.
아, 아니! 황실이 무슨 대관처라도 되냐?
그게 무슨 '내 생일 파티에 어서 와! 어머나 그런데 우리 집에 빈방이 없네! 대신 내가 이웃집에 방을 빌렸어! 아마 우리 집보다 넓고 쾌적할 거야. 하필이면 이웃집이 황궁이긴 하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신경 쓰지 마, 호호호!' 같은 소리!
게다가 카젠타 홀이 어떤 곳이던가.
황족이 주관하는 행사나 황족에 준하는 귀족에게 아주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만 열리는 곳이 아니던가.
그래 봤자 현세대에 그곳이 황족이 아닌 이를 위해 사용된 경우라고는, 황제가 아끼는 사촌누이의 결혼식 피로연 때뿐이었다. 그게 벌써 한 20년 전의 일이었고.
그런데 그런 곳을 에른스트를 위해 빌려주기로 했다고? 아니, 게다가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랍니까? 뭐, 에른스트에 연회를 열 장소가 마땅치 않아?
"우리 집에 연회를 열 장소가 왜 없어? 별관만 해도 세 개나 되잖아!"
"얼마 전부터 내부 수리에 들어갔거든. 출입 금지 표시가 되어 있는 거 못 봤어?"
그게 무슨 약 파는 소리죠? 어제만 해도 그런 건 없었는데 무슨 말이야!
"갑자기 한꺼번에 전부 다 내부 수리를 시작했다고?"
"원래 세상일이라는 게 뜻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그는 여전히 담담하게 말했지만 나는 속지 않았다.
아무래도 유진은 내가 강력히 반발할 것을 알고 미리 초석을 깔아놓은 것 같았다. 당연하지, 당연하지! 어떻게 그런 곳에서 연회를 열어!
내 표정을 읽었는지, 유진이 옆으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미 얘기 다 끝났어."
"그거 취소······."
"못 해."
단호한 대답에 나는 말문이 막혔다.
"왜 그래? 황실에서 빌려준다고 했다잖아. 자기네가 빌려주고 싶으니까 빌려준 거겠지!"
둘째 진상은 후식을 한입에 털어 넣으며 도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했다. 카젠타 홀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것도 아닐 텐데, 참으로 해맑기도 했다.
나는 약간 착잡하게 그런 그를 쳐다보다가 에리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얘, 얘야. 네가 저 두 사람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보렴. 내가 이상한 거 아니지? 나처럼 당황하고 놀라는 게 당연한 거지? 너무 태연한 저 두 사람이 이상한 거야, 그렇지?
내가 눈으로 보내는 신호를 읽었는지, 마침내 에리히가 입을 열었다.
"하는 수 없지, 그날 에스코트는 내가 해줘야겠네."
하지만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가 내뱉은 말에 나는 더욱 뒷골이 당기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뒤이어 카벨이 에리히의 말에 당장에라도 식탁을 뒤엎을 것처럼 몸을 들썩이며 버럭 소리 질렀다.
"야, 그걸 왜 네가 해!"
"유진 형은 약혼녀를 챙겨야 할 테고, 카벨 형은······ 에스코트할 줄 알아?"
"이씨, 할 줄 알거든?! 그것도 완전히 잘하거든?!"
카벨의 말에 에리히가 '퍽이나'라는 듯이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추어올렸다.
야이, 쓸데없는 거로 싸우지 마! 카젠타 홀에서 연회를 열게 생겼는데 지금 에스코트 같은 게 대수야? 그, 그렇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그런 거야?
으악, 이 사람들 사이에 있으니까 내가 별거 아닌 거로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잖아.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연회가 네 생일 때쯤 열리긴 할 테지만 명목은 그게 아니니까. 그냥 황실에서 열어주는 환영회 같은 거야. 그들도 우리 사정을 다 알고 있고, 또 예전 일로 부채감을 가지고 있기도 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황실에서 에른스트에 부채감을 가지고 있다면 아마 그것은 죽은 에른스트 부부 때문일 터다. 황제의 금지옥엽인 황손을 지키다가 죽었으니까.
특히 그 당사자인 황손 다이스는 자신이 황실과 귀족들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나이가 된 후부터 유진에게 큰 힘을 보태주었다고 들었다.
윽,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신경을 안 쓴다지요? 난 신경 쓰여! 그것도 엄청 신경 쓰인다고!
"괜찮지 않을까? 황실에서 먼저 권한 일이라고 들었는데."
그로부터 시일이 더 지난 어느 날, 내 투덜거림에 요하네스가 웃으며 말했다.
학술원의 방학을 맞아 그는 나를 만나러 에른스트에 방문한 참이었다. 때마침 카벨은 연무장에 가 있었고, 에리히는 페니와 함께 산책을 나간 터라 저택 내에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응접실에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다이스 전하와 에른스트 공작의 친밀한 관계는 이미 아를란타 내에 공공연히 알려진 사실이고."
황손인 다이스가 유진과 예전부터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나도 알고 있는 것이었다. 원래도 에른스트는 황실의 우방이었지만 전 에른스트 공작 부부의 죽음 이후로 그 유대감이 더욱 강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카젠타 홀에서 준황족도 아닌 귀족을 위해 연회가 열린 경우는 한 번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영 마음이 편치 못했다.
"유진 형 옆에 있던 사람이네. 네 호위 기사가 되었구나."
잠시 후, 우리는 함께 정원을 걷기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을 나서자 문 앞에 서 있던 에단이 조용히 뒤따라왔다. 그런 그를 보고 요하네스가 입을 열었다.
"응, 에단 비숍 경이야. 오빠도 전에 본 적이 있나 보구나."
"에단 비숍이라······. 그가 자신을 그렇게 소개했어?"
요하네스의 말에 나는 멈칫했다.
그게 무슨 의미지?
하지만 내가 그를 올려다보자, 요하네스는 곧 웃는 얼굴로 화제를 바꿨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연회장에 같이 들어갈 파트너는 정했는지 궁금한데."
"카벨 오빠 아니면 에리히랑 같이 들어가지 않을까 싶은데."
나는 조금 전 들었던 말이 묘하게 걸려서 그것에 대해 다시 물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요하네스의 말이 조금 더 빨랐다.
"아직 결정이 나지 않았다면 아예 제3의 선택지는 어때?"
어느덧 들어선 정원의 초입 길에서 요하네스가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초목이 우거진 길목에서 옆에 있는 사람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여느 때처럼 다정한 미소를 머금고 있는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옅은 푸른색 머리카락은 그의 머리 위로 펼쳐진 청명한 하늘과 비슷한 색채였다. 그보다 한결 짙은 청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부드러운 빛을 띠고 있었다.
요하네스가 붙잡고 있던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약간은 장난스러운 어투로 속삭였다.
"에른스트 양, 제게 당신을 에스코트할 수 있는 영광을 주세요."
19. 첫 등장은 화려하게!
한 달은 금방 지나갔다.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새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이건 진짜 미친 짓이야······."
하지만 벌써 연회 날이 되었다는 건 너무 심한 것 아닙니까? 나는 잠시 혼자서 넋두리를 하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준비를 마치고 체념한 마음으로 방문을 나서자마자 문 앞에 서 있는 에리히와 에단의 모습이 눈에 보였다. 에리히는 여전히 에단이 마음에 안 드는지 그를 째려보고 있다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헐, 호박에 줄 좀 그었다고 제법 수박 같아 보이네."
그리고 잠시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툭 내뱉듯 저렇게 말했다.
"예쁘면 그냥 예쁘다고 하지?"
"예쁘······ 예쁘긴 누가? 난 그냥 좀 평소보다 봐줄 만하다고 말한 거야!"
에리히가 괜히 찔끔한 듯이 언성을 높였다. 이 새침한 놈. 내가 문 열고 나왔을 때 놀란 표정 지은 거 다 봤는데. 그리고 조금 전 거울을 보고 왔지만, 오늘의 나는 내가 봐도 좀 예뻤다.
크흠, 난 어디까지나 객관적인 사실을 말한 거랍니다. 물론 내 미모가 완전히 빛을 발하려면 좀 더 자라야 했지만, 지금도 충분히 예뻤다. 특히 앙상한 나뭇가지 같던 어릴 때에 비하면 진짜 용 됐다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퀸 아라벨라 의상실에서 맞춤 주문한 내 드레스가 예쁜 것이기도 하지. 역시 훗날에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웨딩드레스를 사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던 퀸 아라벨라였다.
그리고 10년 후에 비해 지금은 아직 그렇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의상실이라 이번 드레스를 맞추는 데도 그렇게 경쟁률이 세지 않았다.
여하튼, 오늘을 위해 열심히 때 빼고 광을 낸 나는 주관적으로나 객관적으로나 꽤 봐줄 만했다 이 말이다.
"하리 언니!"
마침 루이제와 요하네스도 도착한 모양이다. 일 층에 내려가자마자 막 안으로 들어서던 그들을 볼 수 있었다.
"루이제, 어서 와. 요한 오빠도."
우리는 오늘 미리 만나 연회가 열리는 장소까지 함께 이동할 예정이었다.
"하리, 오늘 정말 예쁘다."
내게 다가온 요하네스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요한 오빠도 오늘 멋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