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그 오빠들을 조심해 64화
나는 과민반응 하는 둘째 진상이 웃겨서 헛웃음을 흘리며 설명해 주었다.
"집적거리다니,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그냥 라벤더 코르디스라고 지난번 의상실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이 있는데 저택에 날 초대하고 싶다고 해서······."
"나한테 맡겨! 이름도 계집애 같은 게 감히 누구를 귀찮게 해!"
하지만 내가 미처 설명을 끝마치기도 전에 카벨이 팔을 걷어붙이며 자리를 박찼다.
으, 으잉? 잠깐만! 뭐야, 이거? 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나는 갑작스러운 둘째 진상의 행동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그를 불러 세웠다. 뭐, 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말려야 할 것 같은데!
"오빠, 잠깐 멈춰! 기다려! 앉아······!"
쿨럭, 꼭 페니한테 하는 소리 같다고? 그, 그냥 기분 탓일 거다.
아무튼, 내 외침에 둘째 진상이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녀석은 왜 말리냐는 듯이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방심하면 곧바로 문을 뛰쳐나갈 것처럼 여전히 준비 만반인 자세를 한 상태였다.
"오빠가 뭔가 오해하는 것 같은데 여자 같은 이름을 가진 남자가 아니라, 여자거든?"
"뭐?!"
"그러니까 괜히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여, 여자······!"
쿠콰콰쾅!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카벨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그리고 곧이어 내 고막을 파고든 그의 외침에 이번에는 내가 입을 쩌억 벌리고 말았다.
"너 이제는 여자까지 홀리고 다녀?!"
아, 그런 거 아니라고, 이 바보야!
결국 나는 카벨을 이해시키기 위해 내 황금 같은 시간을 더 할애해야만 했다.
***
다음 날에는 유진이 아침부터 내내 저택에 있었다.
"어, 오빠. 지금 일어난 거야?"
"응."
그는 간만에 집에 온 카벨 때문인지 어제저녁 일찍 귀가했다. 오랜만에 형제들이 다 같이 모인 저녁 식사 자리는 아주 떠들썩했다.
알다시피 이 집에서 가장 활기가 넘치는 사람은 역시 둘째 진상이 아니던가? 게다가 이제는 시험이라는 고삐도 풀려서 그런지 어제저녁 카벨은 다소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댔다.
그래서 늦은 시간까지 우리는 둘째 진상의 장단에 맞추어 정신없는 저녁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고 난 후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으로 쉬러 들어갔다. 하지만 유진은 휴식을 취하는 대신 또다시 에른스트 내에 있는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밤을 새우는가 싶더니 낮 시간인 지금 잠깐 눈을 붙이고 나온 모양이었다.
"다른 애들은?"
"다 자기 방에 있어."
유진은 평소보다 조금 느린 움직임으로 계단을 내려와 나를 향해 다가왔다.
아직 잠이 덜 깬 탓인지, 아니면 아직 피로가 덜 풀린 탓인지, 그의 몸짓이나 표정에서 나른함이 뚝뚝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쩐지 유진의 분위기가 다른 때와 약간 달랐다. 평소에 비해 좀 더 풀어졌다고 해야 할까, 묘하게 무방비한 느낌을 풍기는 것이······.
나는 그런 그를 신기한 눈으로 쳐다보다가 이내 무언가를 발견하고 풉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언제나 단정하던 유진의 머리가 지금은 눈에 띄게 헝클어져 있었던 것이다.
아이구, 유진 어린이. 꿀잠 잤어요? 잠깐이지만 푹 자긴 한 모양이네. 게다가 머리카락이 저렇게 엉망이 된 것도 모르고 방에서 그냥 나오다니.
"오빠 머리에 참새 앉을 것 같아."
나는 유진의 편안해 보이는 모습이 기꺼워서 일부러 짓궂게 말했다.
"참새?"
"이대로 밖에 나가면 참새가 둥지인 줄 알겠어요."
헝클어진 머리 때문인지, 아니면 풀어진 분위기 때문인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반문하는 모습이 꼭 어린애처럼 느껴졌다. 나는 키득 웃으면서 유진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내 손길을 따라 점차 원래의 단정한 모양을 되찾아갔다.
"그러고 보니까 아침에 유난히 짹짹 소리가 크게 나지 않았어? 창틀에 앉아 있던 참새가 아무래도 집을 찾아왔던 것 같은데. 아, 나라도 창문을 열어줄 걸 그랬나."
내가 놀리는 걸 알았는지 유진의 눈매가 슬쩍 찡그려졌다.
곧 그의 손이 자신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내 손을 붙잡아 내렸다.
"장난치지 마."
나직한 음성이 가까이에서 흘러들어왔다. 지금 막 일어나 목이 잠긴 탓인지 다른 때보다 한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아래로 내리깔린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느른하고 고요한 눈빛이 내 얼굴 위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주춤하고 말았다.
어라······.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아이 같던 유진이 갑자기 다시 어른으로 돌아왔다.
유진에게 붙잡힌 손목이 어쩐지 불편해져서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바로 그때였다.
"어, 형! 이제 나왔어?"
별안간 머리 위에서 카벨의 목소리가 울렸다.
"카벨."
자연스럽게 유진과 내 손이 떨어졌다. 우리 둘은 목소리가 들려온 층계참으로 고개를 들었다. 카벨은 아래로 내려오지 않고 여전히 그 위에 서서 유진을 향해 말했다.
"오늘 약혼녀랑 같이 어디 간다고 하지 않았나? 지금부터 준비하면 늦을 것 같은데?"
"오늘이 아니라 내일이야."
오잉, 그런데 어쩐 일로 카벨이 제법 정상인 같은(?) 소리를 했다. 뭐지? 이놈이 어쩐 일로 유진과 약혼녀의 일에 관심을 갖는 거지? 평소에는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형이 약혼을 했든 말든 별다른 관심도 없는 것처럼 보이더니?
아니, 사실 둘째 진상은 자기 일이든 남의 일이든 남녀상열지사 자체에 별 관심이 없는 눈치였다. 하긴, 옛날부터 이놈이 좋아하던 거라고는 검술이나 검술이나 검술······ 쿨럭. 너무나 한결같은 것.
그런 카벨이 정작 결혼은 우리 중에 제일 빨리한 걸 보면, 세상 어디인가에 제 짝은 있다는 말이 진짜인 것 같기도 하고.
앗, 잠깐 생각이 다른 데로 샜다. 어쨌든, 지금과 같은 둘째 진상의 반응은 수상쩍은 구석이 있었다.
유진이 대답하자 이번에는 카벨이 어째서인지 '크흠'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글쎄,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약혼녀랑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선물이라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야? 평소에도 좀 자주자주 만나서 데이트도 하고 그래! 청춘 남녀들인데 만남이 없어도 너무 없잖아."
당연하게도 내 의문은 점점 깊어져만 갔다.
아니? 우리 집 둘째 진상은 저런 상식적이고 세심하기까지 한 말을 할 법한 위인이 아닌데? 너 누구야! 우리 집 둘째 진상 아니지? 그냥 껍데기만 뒤집어쓴 거지?
아마 유진도 나와 같은 것을 느낀 모양이었다. 그는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약간 귀찮은 듯이 쓸어 넘기며 카벨을 향해 물었다.
"누구야?"
"뭐, 뭐가?"
그러자 둘째 진상이 대번에 뜨끔한 표정이 되어 더듬거렸다. 그 얼굴이 마치 '나 수상하오!'를 대놓고 외치는 듯했다.
"너한테 쓸데없는 걸 시킨 사람이 누구냐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네가 지금처럼 그런 일에 세세하게 신경 쓸 리가 없잖아."
으앗, 평소 카벨의 이미지가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 주는 말이었다.
"아니야! 난 원래 꼼꼼하고 세세해!"
"그래, 그러니까 누구야."
카벨은 고개까지 격하게 도리도리하며 반박했지만 나도 유진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둘째 진상은 자신의 발악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금방 체념했다. 어차피 그도 자신이 유진을 완벽하게 속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았다.
둘째 진상이 '하긴, 귀신은 속여도 형은 못 속이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거렸다.
"아, 얼마 전에 학술원에서 황성으로 기사단 견학을 갔었거든. 맞아, 하리 너한테는 내가 지난번에 통신석으로 이야기할 때 말했지? 우리 학부에서 상위 5명만 가는 건데 내가 거기에 꼈다고! 나 진짜 대단하지? 크으, 내가 이 정도나 되는 사람이야! 뭐, 나한테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둘째 진상아, 다른 데로 새지 마라······.
나는 카벨이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지기 전에 제제를 가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오빠, 그래서? 그 후에 어떻게 됐는데? 그날 황성에서 누구 다른 사람이라도 만난 거야?"
자기 자랑은 그만하고 이제 본론을 말해!
"어! 거기 시녀들이 보는 눈이 있더라고! 하, 이 몸이 멋진 건 알아서 어디를 가도 뜨거운 눈빛을 보내는데, 솔직히 내가 우리 학술원에서 제일 잘생기고 힘도 세고 멋지다는 건 전교생이 다 아는······."
아니, 이놈아! 그거 말고! 누가 네 인기도가 궁금하다고 했냐? 크윽, 그리고 네가 학술원에서 제일 잘생기고 힘도 세고 멋지다니! 아마 다른 학생들이 들으면 기가 막혀 할 거야.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에리히부터 저 말을 들으면 약 먹었냐는 듯이 둘째 진상을 쳐다볼 거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네 앞에서 그런 얘기를 꺼낸 게 누구냐고."
유진은 산만하기 짝이 없는 둘째 진상을 상대로도 놀라운 인내심을 발휘했다.
그러나 네 번째로 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성가심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말투 안에 짜증이 없는 것만으로도 놀라웠다.
크흑, 역시 유진이구나. 당신의 인내심에 오늘도 심심한 감탄을!
"아, 맞아. 그거 물어봤었지."
카벨은 조금의 겸연쩍은 기색도 없이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래도 이제는 진짜 제대로 된 답변을 할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그래, 그때 내가 우연히 황성에서 스왈로츠 씨를 만났거든!"
"역시 로웬그린이었나."
"응! 그런데 자기가 직접 수고롭게 꽃까지 사와서 약혼녀한테 그대로 가져다주기만 하라고 골백번 말해도 형이 들은 시늉도 안 한다면서 나한테 구구절절 한탄을 늘어놓더라고."
앗, 그럼 혹시 그때 그 꽃이?
불현듯 내 머릿속에 얼마 전 유진이 집에 들고 왔던 꽃다발이 떠올랐다. 그때 유진이 말하기를, 분명 그 꽃다발을 로웬그린이 자신에게 줬다고 했었지.
그렇지 않아도 로웬그린이 유진에게 다른 것도 아니고 꽃다발을 줄 일이 뭐가 있을까 싶어서 의아했었는데. 으악, 그런데 설마 약혼녀한테 주라고 사온 거였다니!
"내 보좌관의 입이 그렇게 솜털처럼 가볍다니, 좌시할 사항이 아닌데."
바로 그때, 유진의 얼굴에 섬뜩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앗! 저 표정 뭔가 위험해!
카벨도 제 형의 얼굴을 보고 흠칫했다. 곧 둘째 진상의 동공이 마구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우왕좌왕 정신 산만하게 구는 것을 보니,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조금 전 자신이 말실수를 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리고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지만 이 약혼에 그렇게 신경 쓸 필요 없어."
유진이 그런 카벨을 향해 말을 이었다. 조금 전 그가 지어 보인 미소처럼 살벌한 어투는 아니었다. 그의 덤덤한 음성이 마치 동생이 오해하고 있는 것을 바로 잡아 설명해 주려는 듯했다.
"처음부터 서로에게 얻을 게 있어서 결정한 약혼일 뿐이고, 피차 귀찮은 일은 만들지 않기로 합의했으니까. 내가 쓸데없이 꽃 선물 같은 걸 들고 간다고 해도 그쪽에서 반기지 않을 거야. 로웬그린도 다 알고 있으면서 괜히 한 번씩 그러는 거고."
귓가에 흘러든 말의 내용은 언뜻 무심하고 냉정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역시 서로에 대한 애정이 없는 정략적인 약혼이기 때문일까. 나는 그의 말에 침묵했고, 카벨은 약간 멋쩍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니까 카벨, 넌 다른 데 신경 쓰지 말고 앞으로 남은 학술원 생활에만 집중해.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 시험 때 공부를 열심히 한 모양이더라. 지난 시험에 비해 성적이 많이 오를 것 같다고 하던데."
"맞아! 나 올백 맞을 것 같아!"
"그래, 넌 머리가 좋으니까 마음만 먹으면 잘할 줄 알았어. 다음 시험도 기대된다."
"으헤헤, 내가 좀 한번 마음먹으면 못 하는 일이 없긴 하지! 앞으로도 나만 믿어! 전교 1등, 그거 아주 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