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그 오빠들을 조심해 63화
소리 없이 미끄러져 꽂히는 시선에 에단은 등줄기를 곧추세웠다. 고막을 파고드는 목소리는 더없이 무감정했으나, 그것은 듣는 이를 긴장하게 만드는 힘을 담고 있었다.
곧 유진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죽을 만큼 잘못하지도 않은 사람을 무턱대고 죽이지는 않아."
그의 입가에는 시린 조소가 어려 있었다.
"아니면, 내가 그 하녀의 손이라도 잘랐을 것 같아 걱정되나?"
"아닙니다."
에단은 곧장 부정했다.
그러나 조금 전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이와 같은 말을 입에 올렸는지는 유진 역시 잘 알고 있을 것이었다.
"하리는 눈치가 빨라서 주위에 일어나는 변화에도 민감하고 또 옆에 있는 사람한테도 늘 세심하게 신경을 쓰지. 그런데 나중에 자신에게 실수를 저지른 하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떨까?"
그 말을 듣고 에단은 그동안 자신이 지켜봐 왔던 하리 에른스트를 떠올렸다. 과연 그 말대로 그녀는 주변인들까지 세심히 살피곤 했다. 에단은 종종 하리에게 받았던 간식 꾸러미를 생각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동생들의 앞에서 한없이 자상하고 착한 형과 오빠의 모습을 하고 있는 유진 에르스트와 본래 에단이 알고 있는 그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내가 그런 위험부담을 질 것 같나?"
지금 유진이 한 말도, 만약 마음에 걸리는 점이 없었다면 하녀에게 위해를 끼치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는 의미나 마찬가지였다. 그 하녀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의 여동생을 다치게 했기 때문에.
······하지만 그러시다면 왜 또 하나의 위험 요소라 할 수 있는 저를 아가씨의 곁에 두셨는지요?
에단은 또 하나의 의문을 이번에는 목 안으로 삼켜냈다.
그런 그를 향해 마침내 유진이 웃음기를 완전히 거둔 얼굴을 한 채로 냉랭히 일갈했다.
"주제넘은 노파심은 그쯤하고 접어둬. 선을 넘지 마라. 의문을 품는 것은 네 역할이 아니야.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겠나?"
"예, 죄송합니다."
"그만 돌아가서 네 할 일을 해."
허용된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에단은 유진에게 깊숙이 고개 숙여 보인 뒤 물러났다.
그가 문을 나선 뒤, 유진은 조용한 방 안에 홀로 남아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저녁 무렵 있던 일을 떠올리는 그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
하리는 오늘따라 기분이 좋다고 했지만 유진은 속지 않았다.
그녀는 그에게 무언가를 숨기려 할 때면 그렇게 웃었다.
'고모님은 어때? 가정교사로 들어온 멤마 부인은? 너한테 잘해 줘?'
'응. 나는 걱정할 거 없어.'
어릴 때부터 항상 그랬다.
하리는 몇 번이나 웃는 얼굴로 그에게 거짓말을 했다.
'괜찮아.'
'다들 나한테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
'고모님도 그렇고 멤마 부인도 나한테 친절해.'
'그러니까 오빠는 걱정 안 해도 돼.'
'나한테는 신경 쓰지 마.'
'난 정말 괜찮아.'
유진은 고모인 레놀드 부인과 가정교사로 들였던 멤마 부인이 하리에게 날마다 폭언을 일삼은 사실을 후에 알게 되었다.
자신을 찾아온 에리히의 말을 듣고 사용인들을 추궁한 직후의 일이었다.
'그 애, 울었어.'
유진은 그날 결단을 내렸다.
'혼자 밥 먹기 싫대.'
그 웃는 얼굴과 괜찮다는 말만을 곧이곧대로 믿었던 스스로의 멍청함을 수도 없이 자책했다.
'그런데 그것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고모가 뭐라고 한 것 같아.'
고모인 레놀드 부인이 하리에게 했던 일, 그리고 그날 하리를 강제로 끌고 가서 하려던 일을 떠올리면 아직도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멤마 부인의 교육 시간마다 회초리질을 당해서 다리에 피멍이 들 정도였다는 사실도 나중에 바스티에 부인에게 전해 들었다. 그때의 그 아연한 기분을 유진은 아직도 잊지 못했다.
그가 모르는 동안 하리가 실제로 당했을 고초는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단 한 번도 도움을 요청하지도, 자신의 상황을 겉으로 드러내지도 않고 오히려 그를 다독이며 위로해 왔던 것이다.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이제 다 괜찮아질 거라고 너는 잘하고 있다고 격려하면서······.
떨어져 있는 동안에도 그녀에게 얼마나 많은 위안을 받았는지 모른다.
하리가 그동안 그에게 보냈던 편지들은 단 하나도 버리지 않고 서랍 안에 보관되어 있었다. 유진이 답장 속에 저도 모르게 나약한 마음을 드러내고 말았을 때에도 어김없이 다정한 격려의 말이 되돌아왔다.
너무 힘들어서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만 같던 그를 몇 번이나 일으켜 세워주었다. 거기에 기대서 견딘 6년이었다.
그러니 유진은 이제 그녀를 진실로 웃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무언가를 억지로 인내하기 위해, 또 울고 싶은 마음을 감추기 위해 억지로 웃음 짓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웃을 수 있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제는 다른 누구에게도 어떤 이유로든 상처받지 않게 보호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하리는 오늘 또 그의 앞에서 예전과 같은 얼굴로 웃었다.
"어째서지."
나직한 속삭임이 적막한 방 안을 가로질렀다.
유진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 하리가 그런 표정을 지으며 웃어야만 했는지.
'그냥 잡고 가자.'
기억을 되짚는 동안 그의 손이 서서히 꽉 쥐어졌다. 아까 전 이 손 안에 잡혔던 온기가 아직까지도 선연했다. 그리고 맞닿은 체온이 빠져나가는 순간 느꼈던 허전함도.
······다시 붙잡을걸.
이해할 수 없게도, 미련과 비슷한 감정이 속에서 슬쩍 고개를 들었다.
유진은 그것을 다시 잡아 누르며 눈을 감았다.
어쩐지 오늘은 다른 날보다 피곤했다.
18. 조금 정신 산만해도 시끌벅적한 게 좋아요. 정말?
"내가 왔다아아아!"
이 우렁찬 외침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카벨의 것이었다.
오구오구, 우리 둘째 진상. 뭘 먹었는지 목소리 한번 쩌렁쩌렁하기도 하지. 하지만, 그래! 오늘은 네가 내 고막을 괴롭게 해도 이해해 주마!
카벨과 나를 고뇌에 들게 했던 시험이 드디어 끝나고, 둘째 진상은 자유를 맞게 되었다.
카벨은 어지간히 신이 난 듯이 온몸으로 기쁨을 표출했다. 하기야, 그럴 만도 했다. 그가 보충 수업에서 해방돼 이렇게 집에 온 것은 몇 주 만이었으니까.
나는 카벨의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그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오빠, 어서 와!"
"꺄오, 내가 보고 싶었지!"
억, 그런데 좀 심하게 기운이 넘치기는 하는구나. 카벨이 지난번 학술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빙글빙글 공격을 시전해서 나는 금방 어지러워졌다.
"우리 오빠, 보충 수업도 꼬박꼬박 열심히 듣고 완전 멋져!"
"진짜? 나 멋져?"
"어, 완전 최고야!"
"내가 좀 최고지!"
나는 잠시 둘째 진상을 우쭈쭈해 주는 시간을 가졌다. 내가 아낌없이 칭찬을 퍼부어줄수록 카벨의 콧대도 끝 모르고 하늘 끝까지 쑥쑥 올라갔다.
"크으, 난 도대체 어디까지 멋있어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니까!"
저기, 그런데 둘째 진상아. 아직 성적표가 나온 것도 아닌데 그러다가 너 또 낙제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요? 하지만, 그래.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볼 문제고 괜히 지금 초칠 필요는 없겠지.
"누가 들으면 형이 수석이라도 한 줄 알겠어?"
그때, 우리의 오붓하고 화기애애한 모습을 차게 식은 눈빛으로 보고 있던 에리히가 말했다.
그는 낙제만 면해도 다행인 자신의 둘째 형이 마치 학년 수석이라도 된 양 호들갑을 떠는 모습이 영 눈꼴 시린 모양이었다.
"헉, 나 진짜 이번에 수석하면 어떡하지?"
"······."
그런데 카벨은 에리히의 말에 오히려 진지한 얼굴이 되어 말했다.
으, 으음. 오빠야, 그건 너무 갔다. 에리히의 표정을 봐!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싸늘하게 식어 있는 저 얼굴을 보고도 느끼는 게 없니!
평소에 안 하던 공부를 이번에 생전 처음으로 열심히 해서 그런지, 카벨은 이번 시험을 엄청 잘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모양이었다.
"어쩐지 시험 문제가 죄다 X밥 같더라니! 나 설마 올백 맞는 거 아니야?"
"······."
이번에는 내 기분도 차게 식었다.
이놈이? 지난 시험에서 전 과목 낙제를 받아서 날 기함하게 만들었던 놈이?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더니, 딱 그 짝이었다.
아니, 그건 그렇고······!
"오빠, 방금 내가 이상한 단어를 들은 것 같은데?"
나는 조금 전 카벨의 입에서 튀어나온 비속어를 놓치지 않았다. 예전에도 그렇더니,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점점 입이 걸어진단 말이야?
"시험 문제가 뭐 같다고? 잘 못 들었는데 다시 말해줘."
"어, 어어······."
내가 '난 아무것도 몰라요~'란 표정을 지으며 순진무구한 눈동자로 둘째 진상을 올려다보자 그의 동공이 점차적으로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내 질문에 말문이 막힌 것처럼 버벅거렸다.
"시험 문제가 조, 조, 조오······."
나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울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카벨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기 시작했다.
갸웃, 갸웃.
뻘뻘, 뻘뻘.
갸웃.
뻘뻘.
"그, 그러니까 조······."
거 참 애쓰는구먼. 그래도 짜식, 조금 전에는 무의식중에 그런 단어를 섰지만 내 앞에서 또다시 같은 말을 하기는 좀 그런 모양이었다.
"조, 좁······ 좁쌀! 그래, 좁쌀 같다고! 시험 문제가 좁쌀처럼 존나 하찮다고!"
둘째 진상은 가까스로 어감이 조금이나마 비슷하고 또 내 앞에서 내뱉어도 무방할 만큼 나름대로 순수한 의미를 가진 단어를 찾는 데 성공했다.
나는 마치 십 년 묵은 변비에서 탈출한 사람처럼 환희에 젖은 그의 얼굴을 보며 애잔한 마음을 느꼈다.
그런데 둘째 진상아······. 존나 하찮다니? 기껏 본색을 숨기려면 좀 더 철저히 숨길 것이지 마지막에 가서 또 그런 단어를 쓰면 무슨 소용? 크흑, 하긴 그런 허술한 점이 너답기는 하다. 그래, 이 정도면 충분히 애썼어! 장하다!
"똥 싸는 소리 하네."
그때, 옆에서 형이 끙끙거리던 모습을 지켜보던 에리히가 비웃음을 날리며 우리를 지나쳐 갔다.
"왈왈!"
"쉬이, 페니. 저런 건 듣는 거 아니야. 바보 같은 거 옮아."
"왈!"
에리히가 집에 와서 신이 난 페니가 마치 그의 말을 알아듣고 대답하는 것처럼 우렁차게 짖었다.
"야, 야아! 나도 같이 가!"
둘째 진상은 또다시 내 앞에 있다가 말실수를 할까 봐 걱정이 되었는지 찔끔한 얼굴로 후다닥 에리히를 쫓아갔다.
나는 그런 카벨의 뒷모습을 짠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
"앗, 또 보냈네."
나는 휴버트가 조금 전에 주고 간 편지를 보며 떨떠름하게 중얼거렸다.
지금 내 손에 들린 것은 라벤더 코르디스의 초대장이었다. 그녀는 지난번 의상실에서 마주친 이후로 나한테 주구장창 초대장을 보내오고 있었다.
그런데 보통은 상대방에게 고민할 시간을 좀 주는 것이 예의인데, 라벤더 코르디스는 내가 답장을 쓸 새도 주지 않고 매일매일 초대장을 날려댔다.
쿨럭, 이건 좀 집착 같다고 생각될 정도인데? 한 달도 되지 않은 사이에 수십 통이나 편지를 보내는 건 좀 아니잖아? 끙, 서로 좋아서 연애하는 사이라고 해도 이러지는 않겠다.
"무슨 편지인데 그렇게 똥 씹은 얼굴을 하고 있어?"
"카벨 오빠, 노크 좀 하라니까."
"했는데 네가 못 들은 거야!"
어느새 내 방에 홀랑 들어온 카벨이 억울한 듯이 항변했다.
아이구, 우리 둘째 진상 그래쪄요? 저 억울해 죽겠는 표정을 보니 진짜 노크를 하긴 했던 모양이다. 녀석은 오랜만에 집에 오니 살판이 났는지 반나절 만에 윤기가 잘잘 흐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있어, 나랑 만나고 싶어서 매일 편지 보내는 사람."
나는 자세히 알려줄 마음이 들지 않아 그냥 지나가듯이 그렇게 말해 주었다. 뭐, 사실 라벤더 코르디스의 진짜 목적은 나라기보다는 유진이겠지만.
쿠콰쾅!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말을 들은 카벨이 뒤통수라도 얻어맞은 것처럼 두 눈을 부릅뜨며 대뜸 소리치는 것이었다.
"요하네스 자식 말고 너한테 또 집적거리는 놈이 있단 말이야?!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