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오빠들을 조심해!-62화 (62/138)

# 62

그 오빠들을 조심해 62화

유진과 로자벨라의 약혼 기간이 어느덧 5년을 채워갈 무렵이었다.

에른스트와 벨론티아 모두 권세가 높은 가문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약혼 소식은 아를란타를 떠들썩하게 만든 대단한 가십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예상보다 그들의 약혼 기간이 길어진다고 느꼈을 때, 나는 어쩌면 그가 파혼하려는 것이 아닐까 하고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날인가 유진을 보고 거의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그때 우리는 지금 내가 누워 있는 이 노란 꽃이 핀 화원에 서 있었다.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넘어가는 경계선 위에서 유진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하는 순간, 나는 '그냥 물어보지 말걸' 하고 곧바로 후회했다.

'그렇게 되겠지.'

담담하고 서늘한 목소리가 내 귓가에 흘러들었다. 나나 다른 사람들의 의문과 의심 같은 것은 그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듯이.

나는 따스한 봄볕 아래에서도 홀로 겨울 속에 머무는 것처럼 차가운 그의 얼굴을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 유진의 웃는 얼굴을 본 것이 몇 년 전의 일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결혼 선물로는 뭐가 좋을지 말해줘. 미리 준비해 놓게.'

나는 그를 향해 설핏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유진은 언제나처럼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검은 눈동자로 나를 가만히 응시하다가······.

'그럴 필요 없어.'

이내 내게서 고개를 돌렸다.

'너한테는 받고 싶지 않으니까.'

갑자기 떠오른 기억의 잔상에 나는 무심코 작게 읊조렸다.

"나쁜 놈."

기왕 좋은 마음으로 준비하려고 한 선물인데 그냥 준다고 할 때 받을 것이지.

나는 그 일로 유진에게 심술이 나서 진짜로 그의 결혼 선물을 준비하지 않았다.

윽, 그러고 보니까 혹시 그래서 로자벨라가 나랑 더 친하게 지내려고 하지 않았던 건가? 어쩌면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 의미라고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그런 거라면 이해합니다.

솔직히 그때 삐져서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아 놓고 나도 계속 후회했거든요, 으흑.

아무튼 그때 나는 유진에게 조금 화가 나서 '그래, 너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속으로 살짝 욕도 해주고 그랬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나도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하나 싶지만 그 당시에는 정말 어찌나 섭섭하던지.

"누가 나쁜 놈이야?"

누구긴 누구야. 바로 너요.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리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나는 여전히 옆으로 누운 채로 살짝 고개만 돌려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을 응시했다.

"여기서 뭐 해?"

"일광욕."

유진은 도대체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이해할 수 없어 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역시도 내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냥 손을 내밀었다.

"잡아. 일으켜 줄게."

나는 못 이긴 척 그가 내게 내민 손을 붙잡았다.

흥, 하지만 속았지? 자라나라, 심술!

나는 유진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척하다가, 곧 맞잡은 손을 확 잡아당겼다. 평소라면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을 테지만 방심하고 있던 탓인지 유진은 생각보다 쉽게 내 위로 넘어졌다.

"이건 또 무슨 장난이야?"

하지만 유진은 그 와중에도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해 내 옆으로 손을 짚었다. 가까이에서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얼굴을 보니 다행히도 내가 한 짓이 황당할지언정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오빠도 누워봐. 생각보다 전망이 좋아."

나는 그를 향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유진의 한쪽 눈썹이 슬그머니 치켜 올라갔다.

그는 지난번 1층 로비에서 그랬듯이, 또다시 내 얼굴을 살피듯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웃고 있는데 뭘 그렇게 내 표정에서 무언가를 알아내려고 하는지 모르겠다.

"아, 누워보라니까."

봐, 쓸데없는 일을 하니까 나한테 빈틈이나 보이고 그러지!

나는 그의 팔을 확 잡아당겨 균형을 깨뜨렸다. 그러자 이번에야말로 유진이 미간을 좁히며 내 위로 무너져 내렸다. 나는 유진이 다시 일어나기 전에 그를 밀어내 옆에 눕게 했다.

목적 달성! 아이고, 힘들다. 사람 한 명 옆에 눕히기가 왜 이렇게 힘들다지요?

앗, 그러다 문득 생각이 저쪽 어딘가에 서 있을 에단에게 가서 닿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금 부하 직원 앞에서 유진의 위엄을 무너지게 한 건가! 끙, 하지만 상관없어. 어차피 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는 사춘기 소녀니까!

"어때? 누우니까 좋지?"

내 뻔뻔한 말에 유진이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호호, 하지만 자고로 웃는 얼굴에 침 뱉을 수 없다고 하잖아? 이내 그는 마음을 비운 듯이 야트막한 한숨을 내뱉더니 나한테서 시선을 떼고 정면을 응시했다.

어느덧 해 질 무렵이 되어 하늘에는 주황색 물이 들어 있었다. 살랑살랑 불어온 따스한 바람에 노란 꽃이 몸을 흔들며 뺨을 간질였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그래, 사람이 가끔은 이렇게 휴식 시간도 가지고 해야죠. 하루 종일 일만 하고 그러면 심신의 건강에도 별로 좋지 않다고요.

"유진 오빠."

잠시 후 내가 내뱉은 작은 부름에 다시금 그가 시선을 돌렸다.

나는 그를 향해 무어라 말하는 대신 입꼬리를 당겨 그냥 한번 웃어 보였다. 유진은 그런 나를 실없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그만 일어나자."

해가 거의 저물 때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몸을 일으킨 유진이 아까처럼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이번에는 장난을 치지 않고 그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나를 일으켜 세운 그가 물러나려 할 때, 나는 오히려 그의 손을 힘주어 꽉 붙들었다. 그리고 여동생의 특혜를 이용해 어리광을 피우듯이 헤헤 웃으며 말했다.

"그냥 잡고 가자."

검은 눈동자가 다시 한번 더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가 거절하기 전에 먼저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어느덧 에단은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더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우리가 노란 꽃을 헤치고 걷자 그가 조용히 뒤따라왔다.

"왜 그래?"

"뭐가?"

내게 손을 붙잡혀 걷던 유진이 이윽고 입을 열었다.

"오늘따라 웃음이 많잖아."

나는 그의 예리한 지적에 그냥 그러냐는 듯이 대답했다.

"글쎄, 기분이 좋아서 그런가?"

옆에서 유진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그는 내 말을 의심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이건 온전한 내 문제니까, 유진에게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붙잡고 해가 저물어가는 화원을 함께 걸었다.

"두 분, 오셨습니까."

저택 안에 들어서자 휴버트와 사용인들이 우리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올라가서 옷 갈아입어야겠다. 조금 이따 봐."

나는 그때까지도 잡고 있던 유진의 손을 놓으며 말했다.

"하리."

하지만 잠시 멀어지던 온기가 다시금 내 손을 파고들었다.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뒤돌아보자 유진의 얼굴이 시야에 비쳤다. 그는 아까의 내가 그랬던 것처럼 나를 불러 놓고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오빠 머리에 꽃 붙었다."

나는 그의 시선을 마주하며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자 유진이 미간을 좁히며 나를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쪽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곧 그의 손에 노란색 꽃이 걸렸다.

손 안에 있는 것을 내려다본 유진의 눈매가 꿈틀거렸다. 그는 여기까지 오는 동안 머리에 꽃을 달고 있던 것이 불만스러운지 얼굴을 찡그렸다.

"왜 이제 말해줘?"

"뭐 어때, 잘 어울리는데."

나는 키득 웃으며 유진에게 붙잡힌 손을 자연스럽게 먼저 빼냈다.

"그럼 옷 갈아입고 나올게."

다시 한번 나를 붙잡으려는 듯 그의 팔이 움직여졌지만 나는 그것을 피해 걸음을 옮겼다.

유진도 이번에는 그런 나를 붙잡지 않았다.

17.5 그 오빠, 유진

"지금까지 보고 드린 대로 별다른 특이 사항은 없었습니다."

에단 비숍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하루 일과를 자신의 주인에게 보고했다. 물론 그 보고의 대상이 되는 것은 현재 그가 호위 중인 하리 에른스트였다.

"안에서의 대화까지는 듣지 못했지만 마차에 오르기 전까지도 계속 밝은 얼굴이셨고, 벨론티아 양과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 한결 친근한 분위기였습니다."

"아무 일도 없었다면 그런 얼굴을 할 리가 있나. 그저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겠지."

에단의 말이 끝나자마자 싸늘한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유진은 아까부터 기분이 썩 유쾌하지 못한 듯했다.

그런 그의 얼굴을 보고 에단이 물었다.

"다음부터는 좀 더 근접한 거리에 있을까요?"

그것은 즉, 지금까지 허락되지 않았던 영역까지 접근해도 될지를 묻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밀폐된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는 물론이거니와 사적인 공간에 혼자 있을 때의 일이나 행동 등도 면밀히 알 수 있을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호위 대상자의 동의 없이 남몰래 이루어져야 할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껏 에단에게 허가되지 않은 일이기도 했다.

"난 호위를 하라고 한 것이지 감시를 하라고 한 게 아니야."

역시 이번에도 유진은 번복의 여지없이 답했다. 말할 가치조차 없는 일을 논하려 한다는 듯 에단에게 박히는 시선이 사뭇 날카롭기까지 했다.

에단은 그의 뜻을 존중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말해봐."

유진은 여전히 서늘한 얼굴을 한 채로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사실 에단이 생각하기에 하리 에른스트의 모습은 평소와 크게 다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 마주한 사람이 보기에는 아니었는지, 아까부터 그는 싸늘한 기운을 드러내고 있었다.

"술을······."

에단은 이것까지 말해야 하나, 잠시 동안 고민하며 뜸을 들였다. 아까는 하리에게 '이번에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고 말한 기억까지 있어 더욱 망설여졌다.

하지만 곧이어 뭐냐는 듯이 미끄러지는 유진의 눈빛에 밀려 결국 그는 입을 열고 말았다.

"그러니까, 음주를 하고 싶으시다고······."

그 순간 반듯하던 유진의 미간이 움찔거리며 얕은 굴곡을 그렸다. 에단은 그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하리를 두둔하며 대신 변명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아가씨의 음주하는 모습은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단순히 기분상의 문제를 말씀하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에단의 말에 유진은 말로는 잘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기분을 느꼈다.

일전에 그의 집무실로 찾아왔던 에리히가 그의 술을 빼앗아 마셨던 일을 떠올리자 더욱 마음이 복잡미묘해졌다.

······사춘기, 혹은 반항기라고도 하던가. 원래 그 나이의 아이들에게는 한 번씩 찾아오는 현상이기라도 한 것일까?

"제 생각에는 사라라는 하녀의 일로 마음을 쓰시는 게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에단이 입 밖에 낸 소리에 유진은 머릿속의 상념을 뒤편으로 치워 버렸다.

"처음 아가씨께서 의문을 표하실 때, 미리 당부하신 대로 답변한 집사의 말에 금방 수긍하신 눈치이긴 했습니다만."

에단은 얼마 전부터 줄곧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일을 말하며 슬쩍 유진의 얼굴을 살폈다.

"제가 듣기로 처음 에른스트에 오신 날부터 그 하녀를 가까이 두셨다고 합니다."

그는 속을 들여다보기 어려운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에단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옆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가 하루아침에 사라졌으니 적적함을 느끼셨을 수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에단의 말에 유진은 태연히 동조하며 지나가듯이 말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런 그의 얼굴에는 동요 한 점 깃들어 있지 않았다. 잠시 후 에단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 하녀가 정말 고향으로 돌아갔습니까?"

조용한 방 안을 울리는 목소리에 오히려 에단이 흠칫했다.

사실 이런 의혹 어린 마음을 이렇게 직접적으로 내보일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지나치게 고요한 유진의 얼굴을 보자 이제껏 속으로만 삼키고 있던 물음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새어 나오고 말았다.

"왜? 내가 그 하녀를 죽이기라도 했을까 봐?"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