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그 오빠들을 조심해 61화
17. 변화하는 마음들
"에른스트와 벨론티아는 거리가 가까운 편이 아닌데, 오는 동안 힘들지 않았어요?"
눈앞에서 하얀 손이 움직였다. 투명한 액체가 찻잔을 채우는 것과 동시에 은은한 차향이 코끝을 스쳤다.
"염려해 주신 덕분에 편안히 왔어요. 바깥의 경치가 좋아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는걸요."
이제 18살인 로자벨라 벨론티아는 그야말로 눈부신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크으, 언니. 10년 후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아름다우시군요. 10년 후에는 성숙한 매력이 장난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풋풋하면서도 상큼한 매력이 있어!
솔직히 그녀는 내가 본받고 싶은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우아하고 지적이고, 손끝 하나에서부터 기품이 흐르는 레이디 중의 레이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범접하기 어려운 느낌도 있었지만······.
"로즈가든의 버베라 차예요. 에른스트 양의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어른의 눈으로 다시 보게 된 로자벨라 벨론티아는 그렇게까지 대하기 어려운 느낌은 아니었다.
"고마워요. 향이 좋네요."
원래 지난 생에서의 그녀와 나는 데면데면한 관계였다.
나는 앞서 말한 이유로 로자벨라에게 심리적 거리감을 느꼈고, 그녀도 내게 예의는 지켰지만 필요 이상으로 친근하게 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녀와 나 사이에는 늘 보이지 않는 거리감이 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가 그때보다 나이가 들었기 때문일까? 예전에는 한없이 높고 먼 사람으로만 보이던 로자벨라 벨론티아가 생각보다 평범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아니, 그래도 물론 여전히 그녀는 뭇 여인들의 귀감이 될 만한 아름답고 우아한 레이디였다. 그러나 예전에 내가 그녀에게서 느꼈던 어떤 아우라 같은 것을 지금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아직 그녀가 어리기 때문일까, 아니면 더 이상 내가 그녀를 동경하던 어린 소녀가 아니기 때문일까?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마주한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나는 그녀를 내심 부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로자벨라는 내가 그토록 되고 싶었던 귀족 아가씨의 표본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우아함이나 품격은 나 같은 사람이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전부터 이렇게 직접 에른스트 양의 얼굴을 보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제법 그녀가 가깝게 느껴졌다. 예전의 로자벨라가 내 손에 닿지 않을 것처럼 높은 곳에 있는 사람으로 느껴졌던 것과는 달리.
"그런데 당신은 내 상상과는 조금 다른 사람인 것 같네요."
내가 그녀를 살피고 있는 것처럼 그녀 역시 나를 조용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나를 파악하는 일을 끝냈는지, 로자벨라가 미소를 드리우며 입을 열었다.
"어떤 점이 말인가요?"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테이블 위에 소리 없이 내려놓은 뒤 반문했다.
"마차에서 내려 저택 안으로 들어서는 당신을 처음 봤을 때, 꼭 제 숙모님을 보는 줄 알았어요."
로자벨라의 숙모님인 라지스 부인은 지난 세대 때 사교계를 주름잡았던 인물로, 자제들의 훈육이 엄격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한테서 그런 사람의 모습이 엿보였다니?
앗, 혹시 나한테서 나이에 맞지 않는 노숙한 분위기가 흘러나온다는 의미는 아니겠지? 내가 겉모습은 아직 꽤 어리지만 속 알맹이는 아니다보니 괜히 찔리는데······.
"그녀는 제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귀부인 중 하나예요. 어떤 상황에서도 고결한 품위를 잃지 않죠."
하지만 말하는 걸 계속 들어보니 나를 돌려서 흉보려는 의도는 아닌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에른스트 양에게는 빈틈이 보이지 않네요. 솔직히 감탄스러울 정도예요."
그러니까 직설적으로 요약하자면, 생각과 달리 나한테서 평민 여자애 같은 느낌이 안 나서 놀랐다는 거구나.
하기야, 진짜 이 나이의 나였다면 로자벨라를 실망시키고도 남았을 것이다. 물론 예전이라고 해서 내가 예법 수업을 게을리한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그들이 보기에는 수박 겉핥기 같은 흉내 내기일 따름이었겠지.
그러니 로자벨라 벨론티아로서는 지금 내게 최고의 찬사를 해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이렇게 인정받다니,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피나는 노력을 기울였던 보람이 있다고 해야 할까.
"제 말에 혹시 기분이 상했다면 미안해요."
사실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똑같은 솔직함이라고 해도 라벤더 코르디스에게 받는 느낌과는 다소 달랐다.
로자벨라는 나를 깔아보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성품은 지난 생에서 이미 겪어봐서 나도 충분히 알고 있었고.
"기분 상하지 않았어요. 저를 라지스 부인과 닮게 봐주셨다니, 오히려 과찬이 아닌가 싶네요."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녀가 예전보다 나한테 호의적인 건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문 앞까지 직접 나를 마중 나올 정도로 내게 관심을 표하는 것을 보니, 아마 로자벨라도 지난 생과는 달리 나와 친분을 쌓을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사실 걱정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는데."
내 말에 이윽고 로자벨라가 미소를 지었다.
"에른스트 양과는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도 마주한 사람을 향해 웃어주었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우리는 한 가족이 될 사이니까."
***
하지만 에른스트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다소 복잡한 심경을 느끼고 있었다.
한 가족이라······.
사실 나는 지난 생에 새언니들과 그다지 친한 편이 아니었다.
로자벨라는 내가 쉬이 가까이 갈 수 없는 귀부인 같은 느낌이라 거리감이 있었고, 카벨과 결혼한 템페르토 양은 수줍음이 많고 낯가림이 심해서 친해지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 이유뿐만이 아니라······.
"좀 걷고 싶은데, 정원으로 가요."
에른스트에 도착해서 나는 곧바로 저택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여느 때처럼 그런 내 뒤를 에단이 조용히 따랐다.
벌써 여름이 다가오는지 코끝에 스치는 풀잎 냄새가 싱그러웠다.
"아, 술 땡긴다."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이런 날에는 테라스에 판을 깔고 앉아서 몰래 술이나 까는 게 제일인데. 그러고 보니까 내 금주 생활이 몇 년째야, 벌써? 지하 저장고에 있는 내 술은 고이 잘 있겠지?
물론 그건 내가 아니라 전 에른스트 공작의 것이었지만, 몇 년 전에 내가 마음속으로 찜해놨으니까 내 거 맞지, 뭐!
흠칫.
그런데 문득 내 뒤에서 크게 흠칫하는 움직임이 느껴졌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본 나는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에단을 발견했다.
그 직후 이번에는 내가 움찔했다.
이, 이런. 맞아, 당신 거기에 있었지?
하하,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요? 방금 무슨 일 있었어요? 뭐 못 들을 말이라도 들었어요? 이상하다, 나한테는 아무 소리도 안 들렸는데!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향해 무고한 얼굴로 방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그는 이미 내 혼잣말을 똑똑히 들은 눈치였다.
"음주를 하시기에는 아직 이른 나이인 것 같습니다."
에단이 심각한 얼굴로 읊조린 말에 내 미소가 흔들렸다.
으, 으앗! 이렇게 직구로 말하다니!
혹시 날 되바라진 애로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요? 오해랍니다! 제 정신연령은 이미 오래전부터 합법적인 성인이라구요! 그런데 술 좀 마시고 싶어 하면 어때서! 나는 억울하다, 억울해! 으아앙.
"음주라니요? 크흠,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어요."
게다가 내가 진짜 그의 말처럼 음주를 했다면 또 몰라, 어린 시절로 돌아오고 난 후로 알코올이라고는 한 방울도 입에 못 댔는데! 더 억울하다!
내가 천연덕스럽게 순진한 눈망울을 하고 에단을 올려다보자, 그는 내 표정에 넘어와 자기가 잘못 들은 것 같다는 반응을 보이······ 지 않았다.
"이번에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하지만 음주하시는 모습을 목격한다면 공작님께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런 그의 눈빛이 마치 어른 흉내를 내며 불장난을 하는 철없는 아이를 보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고 내 완벽한 미소는 와장창! 깨져 버리고 말았다.
으, 으앙, 억울해! 그런데 마땅히 해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는다. 으으윽.
"비숍 경이 잘못 들은 거라니까요? 그럴 일 없으니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속으로는 분통이 터졌지만 나는 애써 하하 웃으며 끝까지 잡아뗐다. 그래도 역시 에단은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닛, 기본적으로 무표정한데 왜 내 눈에는 저게 무슨 의미인지 다 읽히는 거지?!
나는 이불과 베개를 좀 뻥뻥 쳐주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이 묘하게 민망하고 창피한 마음을 어찌합니까!
에잇, 어쩌긴 뭘 어째. 저 얼굴을 보니 이미 텄네, 텄어. 에단 비숍은 지금 나를 불량 청소년으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사춘기 소녀로 생각 중이던가. 물론 어느 쪽이든 반갑지 않아, 크흑.
나는 입술을 삐죽이며 앞서 걸었다. 잠시 후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노란 꽃 무더기가 눈앞에 나타났다.
흥, 이렇게 되면 그냥 삐뚤어져 버릴 테야.
나는 이왕 불량소녀로 낙인찍힌 김에 지금까지의 내숭을 벗어 던지고 좀 더 편하게 행동하기로 했다.
사실 앞으로 언제까지 에단과 붙어 있어야 할지 모르는데 계속 지금처럼 하루 종일 그의 시선을 의식하고 지내는 것도 고역이었다.
나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꽃밭 한가운데에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 에단은 귀족 아가씨답지 않은 내 모습에 잠깐 움찔했지만 그래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정원의 외길로 이어진 꽃밭이었다. 노란 꽃에서 퍼지는 냄새가 은은하게 향기로웠다.
여기는 경치가 좋아서 벤치 같은 걸 만들어 두면 좋을 것 같은데. 나중에 휴버트한테 한번 말해볼까?
"에단 경, 이 꽃 이름이 뭔지 알아요?"
"모릅니다."
그럴 줄 알았다. 사실은 나도 막 그렇게 궁금하진 않은데 그냥 혹시 싶어서 한번 물어봤어.
그런데 쭈그려 있으려니까 다리가 아프다. 지금 내가 신고 있는 구두의 굽도 높은 편이고. 나는 에단을 힐끔 쳐다본 뒤 그냥 풀 위에 엉덩이까지 대고 앉아버렸다. 그러자 그의 입매가 작게 꿈틀거렸다.
앗, 이거 조금 재미있는 것 같기도?
"겉옷을 벗어드리겠습니다."
"괜찮아요."
지금 나더러 당신 겉옷을 깔고 앉으라고? 이렇게 그냥 앉으면 치마에 풀물이 들 것이 분명하지만 뭐 어떻습니까?
게다가 내 행동에 따라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한 에단이 아주 작게 움찔거리며 반응하는 모습이 은근히 재미있기도 했다.
나는 꽃밭 한가운데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가 급기야 뒤로 슬쩍 드러누워 버렸다. 그러자 에단이 한 번 더 흠칫거렸다.
헹, 내 자유로운 모습에 놀랐냐? 괜찮아, 난 어차피 사춘기 소녀니까! 크으, 어차피 술도 못 먹는데 그냥 삐뚤어져 버릴 테다.
그래도 굳이 입을 열어 품위를 지키라거나, 어서 자리에서 일어나라거나 하지 않는 게 에단다웠다. 대신 그는 내 바로 옆에 서 있기가 다소 난처한 듯이 조용히 뒷걸음질 쳐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짹짹.
어디선가 작게 지저귀는 새 소리가 들렸다. 하늘에는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떠다니고 있었다. 앗, 직사광선은 피부의 적인데! 뒤늦게 양산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귀찮아서 말았다. 대신 나는 슬쩍 옆으로 몸을 굴렸다.
옆으로 눕자 이번에는 노란 꽃과 초록의 풀잎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옆으로 느리게 손을 뻗어 꽃 한 송이를 꺾어 들었다.
'오빠, 벨론티아 양하고 결혼할 거야?'
오래전, 지금 이 자리에서 누군가와 나눈 적 있던 대화가 묻힌 기억 속에서 서서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