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그 오빠들을 조심해 60화
"집에 언니가 없으니까 너무 심심해."
"나도 그래. 오늘 이렇게 만나니까 좋다."
실은 얼마 전에도 통신석으로 얼굴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만나는 것과는 느낌 자체가 달랐다. 나는 방금 전의 격렬한 인사로 삐뚤어진 루이제의 모자를 고쳐 주며 웃었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눈동자가 내 등 뒤로 향했다.
"헉, 그런데 언니. 뒤에 누구야?"
루이제는 이제야 내 뒤에 있는 사람이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대번에 크게 떠진 그녀의 눈을 보니 키득 웃음이 나왔다.
"내 호위 기사인 비숍 경이야."
"대박, 완전 내 취향."
루이제가 감탄하며 엄지손가락을 처억 치켜들었다.
"비숍 경? 이름이 뭐예요? 통신석 번호 뭐예요?"
억, 그런데 루이제, 왜 그렇게 추파를 던지듯이 말하는 거니? 나는 도대체 루이제가 어디에서 이런 걸 보고 배워서 따라 하는 건지 예전부터 궁금했다. 그녀의 유모인 베키인가? 아니면 이번에도 그녀의 소꿉친구인 마리안?
루이제의 물음에 에단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호위 중에는 사적인 대화를 나누지 않습니다."
에단은 단호박 같았다. 하지만 루이제는 그런 태도에 마음 상하는 기색 없이 오히려 탄성을 내뱉었다.
"와, 더 내 취향."
처억, 그녀가 한 번 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루이제는 에단이 꽤 마음에 든 눈치였다. 하긴, 내가 보기에도 에단의 얼굴은 루이제의 취향에 딱 들어맞긴 했다. 그런데 루이제는 이런 과묵한 타입을 좋아했었던 건가? 그건 처음 알았는걸?
"앞으로 언니랑 밖에서 더 자주 만나야겠다."
루이제는 매우 흡족한 얼굴로 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그만 안으로 들어가자."
우리가 오늘 방문할 곳은 퀸 아라벨라 의상실이었다.
그곳이 어떤 곳이냐 하면! 바로 지난 생에서 내 눈물에 젖은 웨딩드레스를 맞춤 제작했던 곳이지! 으어, 다시 생각하니 원통하구나!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쟁취했던 내 웨딩드레스!
"어머나, 귀한 손님들이시군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의상실의 사람들은 우리를 크게 반겨 주었다.
일단 에른스트나 바스티에라고 하면 아를란타에서도 알아주는 가문이었던 데다, 지금은 퀸 아라벨라가 막 개업한 시점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개업일부터 입소문을 타서 오늘도 예약을 하고 오긴 했지만, 이곳에서 옷 한 번을 맞추려면 한 달 이상을 기다려야 했던 미래에 비해서는 확실히 약속 시간을 잡기가 수월했다.
"평소에 안 입는 스타일이긴 한데 이런 것도 예쁘다. 오늘 몇 벌이나 맞출 거야?"
"글쎄, 일단 두세 벌 정도가 아닐까? 너는?"
"나도 그 정도. 다음에 마리안도 데려와야겠다."
루이제와 나는 의상실에 있는 이런저런 옷들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기성복이 아니라 맞춤복을 주문할 예정이었다.
그래서 일단 원하는 드레스의 형식을 대강 고르고 나면 퀸 아라벨라의 주인인 마담과 상의를 거쳐 세부적인 디자인을 정해야 했다.
게다가 우리는 이 의상실에 온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오늘 치수도 재야 할 것이었다.
"그럼 천천히 살펴보세요.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언제든 편하게 말씀해 주시고요."
우리는 푹신한 소파에 앉아 의상실에서 내준 차를 마시며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보고 기다리라니?"
그런데 그때,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
꽤나 카랑카랑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루이제와 나는 잠시 시선을 맞대다가 우리가 들어와 있는 방의 입구 쪽을 응시했다.
"도대체 안에 있는 게 누구인데?"
사실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의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귀족들은 어디를 가도 있었으니까.
쓰읍, 그런데 괜한 생각인가. 왠지 밖에서 말하는 걸 들으니 꼭 저 사람이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뭐? 에른스트라고?"
문득 밖에 있던 사람이 놀란 듯이 반문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직후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굽 소리와 누군가를 만류하는 듯한 다급한 목소리가 뒤섞여 귓가를 스쳤다.
"막을까요?"
뒤에 있던 에단이 조용히 물었다. 그 역시 밖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것 같았다.
"일단은 기다려 보세요."
나는 에단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어차피 귀족 아가씨인 것 같은데 괜히 호위 기사까지 앞세워 문제를 일으킬 건 없었다. 게다가 왠지 저 사람, 내가 아는 사람이 맞는 것 같아.
우리가 있는 방의 출입구는 문이 아니라 위에서부터 드리워진 천으로 공간이 분리되어 있었다.
"정말 이러시면 안 되는······!"
"안 되긴 뭐가 안 돼?"
잠시 후, 새된 음성이 안으로 새어 드는 것과 동시에 펄럭 소리를 내며 붉은 천이 걷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소란의 주인공은 눈꼬리가 약간 올라가 까탈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금발 머리의 소녀였다.
아이고, 역시 너냐?
나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마자 떨떠름한 기분이 되었다. 왜냐하면 내가 예상했던 사람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은 라벤더 코르디스.
지난 생에서 유진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내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였던 여자였다.
어쩐지 지금도 막무가내더라니. 그래, 밖에서 언뜻 들리는 목소리나 말투 같은 게 꼭 너 같은 느낌이었어.
"당신이 바로 소문의 그······."
그녀는 나를 보더니 두 눈을 크게 떴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나를 보고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곧 자신의 그런 반응에 어쩐지 자존심이 상한 듯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다시금 얼굴을 펴고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당신이 하리 에른스트?"
라벤더 코르디스가 나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녀의 태도는 실로 거만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놀라울 것도 없었다. 원래도 그녀는 제멋대로인 성격이었지만 특히 내게는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 내 출신을 트집 잡아 무시하는 것도 예삿일이었다.
에리히는 그녀가 유진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와 피도 섞이지 않았으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는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그 말을 듣고 긴가민가했으나, 나중에는 나도 그의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라벤더 코르디스의 매서운 눈초리는 내가 유진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일 때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생각할수록 웃기네. 유진의 옆에 버젓이 있는 약혼녀를 두고 나한테만 그런 태도를 보이는 건 좀 아니지 않아? 어차피 유진이랑 결혼할 사람은 로자벨라 벨론티아인데 말이야.
나는 소파에 앉은 채로 내 앞에 있는 라벤더 코르디스를 응시했다.
지난 생에서 나는 모든 사람에게 으레 그래왔듯이 그녀에게도 친절하게 대하려 노력했었다. 그게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내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이기도 했고, 이미 나 스스로 내 출신의 부족함을 뼛속 깊이 새기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니 아마도 예전의 나였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웃음을 지으며 '내가 하리 에른스트가 맞다'고 말했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인사를 나누고 싶은 거라면, 먼저 자기소개부터 하는 것이 맞는 순서 아닐까요?"
나는 여전히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상태로 마주한 사람을 보며 약간 차갑게 말했다.
라벤더 코르디스는 이미 우리가 있는 의상실의 방에 무단 침입한 것으로 충분한 실례를 저질렀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이런 식으로 다짜고짜 상대방의 신상을 캐묻기까지 하다니. 나를 어지간히 무시하지 않고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내가 라벤더 코르디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삐뚤어졌어! 이제는 나도 나한테 무례하게 구는 사람에게는 예의를 차려주지 않을 생각이었다.
게다가 이미 나라는 존재 자체가 라벤더 코르디스의 눈엣가시라면, 내가 아무리 그녀와 잘 지내보고 싶어 용을 써도 소용이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과감히 포기하겠다! 라벤더 코르디스, 친해지기에는 내게 너무나 먼 사람이여!
라벤더 코르디스는 내 반응에 놀란 듯, 다시 한번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내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말을 받아칠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곧 그녀의 눈매가 꿈틀거리며 약간 찌푸려졌다.
하지만 잠시 후 놀랍게도 그녀는 나를 향해 얼굴을 구기는 대신 호호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반가운 마음이 앞서 인사를 깜빡했네요."
뜻밖의 말에 나는 다소 놀랐다.
어라? 뭐지, 이 반응은?
나는 라벤더 코르디스가 나를 향해 이런 식으로 웃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지난 생에서의 그녀는 나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무척이나 적대적이었고, 나를 못마땅하게 여긴다는 사실을 굳이 숨기려 들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왜 다른 거지?
"라벤더 코르디스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오히려 찜찜해진 것은 나였다.
"방금 전에는 내가 무례했죠? 가끔 생각하는 것보다 행동이 앞서서 이럴 때가 있어요."
라벤더 코르디스는 의외로 정상적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이 사람이 왜 이러지?' 싶을 정도로 나한테 굉장히 살갑게 대하고 있었다. 물론 방금 전 나를 처음 봤을 때 무시했던 건 맞는 것 같은데 지금은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다 솔직한 성격이라 그런 거니까 에른스트 양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세요. 호호호!"
게다가 저 간드러진 웃음소리!
뭘 잘못 먹었는지 나한테 친한 척을 하는 라벤더 코르디스의 모습에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좁히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걸까? 으음, 혹시 아직은 유진을 좋아하기 전이라거나······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이상한데? 나한테 이렇게 가식을 떨 이유가 없잖아?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일단 그녀의 속내를 파악하는 걸 그만두고 마주 인사했다.
"코르디스 양이었군요. 전 하리 에른스트예요. 예상치 못한 만남이지만 그래도 만나서 반가워요."
"그럼 옆에는 바스티에 양이겠네요."
"루이제 바스티에예요. 굉장히 독특한 인사법이네요?"
루이제의 도전적인 말에 라벤더 코르디스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루이제는 허락 없이 갑자기 난입한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았다.
라벤더 코르디스는 눈치 있게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듯, 또다시 '호호호!'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제가 방해가 된 모양이네요. 반가운 마음이 다소 과했나 봐요. 그럼 전 이만 나가볼게요. 부디 오늘의 실수를 다음에 만회할 기회를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녀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사과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고 말한 뒤 웃는 낯으로 방을 나섰다.
"갑자기 들이닥쳐서 웬 친한 척? 이상한 여자야."
라벤더 코르디스가 퇴장한 뒤, 루이제가 간단하게 그녀를 평했다.
"불편을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방금 전의 실수는 다시 한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의상실의 사람들도 우리에게 몇 번이고 머리 숙여 사과했다. 사실 불청객을 막지 못한 것은 그들의 과실이 맞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라벤더 코르디스를 직접 막기란 확실히 어려웠을 것이었다.
어쨌든, 그들이 거듭 미안해하며 우리에게 파격적인 할인을 제안했기 때문에 루이제와 나는 못 이긴 척하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나저나 라벤더 코르디스는 도대체 뭐였던 걸까?
나는 그녀가 나한테 보였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아 깊은 의혹에 휩싸여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이 나오지를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착실히 흘러, 드디어 대망의 날이 밝았다.
유진의 약혼녀인 로자벨라 벨론티아와 만나는 날이 온 것이다.
"고마워요, 비숍 경."
나는 에단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려섰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은 벨론티아의 저택 앞이었다. 오늘 나는 이곳에서 그녀를 만날 예정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벨론티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벨론티아의 집사가 나를 맞아주며 인사했다.
로자벨라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지난 생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초대받았을 때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나는 곧 시야에 들어온 사람에 두 눈을 약간 크게 뜨고 말았다.
"어서 와요, 에른스트 양."
어깨 위로 굽이치는 탐스러운 금발 머리와 신록을 품은 듯한 녹색 눈동자. 그리고 어디에서건 잃지 않는 고고한 품위를 가진 여인이 내 눈앞에 나타났다.
"벨론티아에 와줘서 고마워요."
뜻밖에도 문 앞까지 직접 나를 마중 나온 로자벨라 벨론티아가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