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그 오빠들을 조심해 59화
유진은 방금 전 에리히가 던지듯 내려놓은 술병을 들어서 어느새 빈 유리잔에 다시 술을 따라 부으며 태연히 대꾸할 뿐이었다.
"쓸데없는 데 진 빼지 말고 카벨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나 이야기해 봐."
"둘째 형 얘기는 쓸데없이 왜 듣고 싶은데?"
"사고도 적당히 쳐야 수습하기가 편하니까."
요컨대, 카벨이 요즘은 심각한 사고를 치고 다니지 않는지 말해보라는 것이었다. 하기야 졸업 전까지 카벨과 함께 학술원에 재학했던 유진이니, 제 동생이 얼마나 포악을 떨고 다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였다.
에리히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학술원에서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래도 요즘은 잠잠한 편이야. 솔직히 말하자면 이제는 다들 그 성격을 아니까 더러워서 피하는 거지만. 요하네스랑은 여전히 으르렁거리고."
"요하네스가 의외로 카벨을 잘 상대해 주고 있나 보네."
유진은 냉정한 평가를 내렸다. 사실 에리히가 생각하기에도 일일이 제 둘째 형을 상대해 주는 요하네스가 어떨 때는 존경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에 에리히의 얼굴이 약간 찡그려졌다. 그는 유진을 보며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건 진짜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문제인데."
그러고 나서도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바스티에랑 사돈이라도 맺을 생각이야?"
하지만 유진은 고려할 가치도 없는 문제라는 듯이 곧바로 대답했다.
"그런 일로 너희한테 강요할 생각은 없으니까 괜한 생각할 필요 없어."
그러고 난 뒤 그는 에리히를 향해 약간 찡그린 듯이 미소 지었다.
"뭐, 네가 바스티에에 사위로 들어가고 싶은 거라면 진지하게 고려해 볼게."
"농담은."
에리히는 콧방귀를 뀐 뒤, 유진에게 덧붙였다.
"형, 결혼 빨리 하지 마."
"왜?"
"형만 혼자 어른이 되는 건 싫으니까."
그리고 무심코 말한 바로 그 순간, 에리히는 마주한 유진의 얼굴을 보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아, 그 표정 뭔데. 뭐, 내가 못할 소리라도 했어?"
하지만 그렇게 소리치는 그의 얼굴은 약간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방금 전 약간 이상한 소리를 했다 싶었던 것이다. 밤이라서 감상적으로 변하기라도 했나.
"난 그만 가서 잘래."
에리히는 괜히 신경질적으로 말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으로 이어지는 그의 걸음은 민망함을 감추듯 퍽 거칠었다.
유진은 그런 동생의 뒷모습을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한 오묘한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
"에취!"
누가 내 얘기하나.
카벨은 괜히 간질간질한 코를 손가락으로 쓰윽 훑으며 눈매를 구겼다. 고개를 들자 앞에서 한창 무언가를 설명하는 중인 교수가 눈에 들어왔다.
쓰읍, 방금 전까지 아마 저도 모르게 졸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갑자기 재채기가 나오는 바람에 졸고 있던 걸 교수에게 들키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지금 카벨은 낙제생을 위한 보충수업에 강제 참석해 있었다. 그는 황금 같은 주말에 집에도 못 가고 이게 무슨 개고생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책상 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곳에는 아직 책장도 펼치지 않은 책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곧 시야에 들어온 책의 제목에 카벨은 저도 모르게 몸서리치며 토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편미분방정식에 의한 시공간의 곡률 연구와 특수 상대성 이론에 기반한 게일 쉴러의 논리가 가진 오류와 그 비판 그리고 재해석』
미쳤다, 돌았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분명히 외국어는 아닌데, 당최 무슨 소리인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더욱 혼돈인 것은, 이것이 작년에 배운 적이 있는 교과목이라는 사실이었다. 물론 카벨은 자신이 이런 내용을 공부한 적이 있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하지만 교과서의 윗부분에는 분명 자신의 글씨체로 '카벨 에른스트'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고, 그 안에는 수업 시간에 낙서한 듯한 흔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책의 알맹이만 지우개로 박박 지워 버린 것처럼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수업을 들을수록 카벨의 정신은 점차 저 우주 먼 곳 어딘가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딱 하나뿐이었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의한 이 시공간의 연구는 마법에도 응용될 수 있는데 거기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문제점이······."
X나 무슨 소리인지 한 개도 못 알아듣겠다.
"여기에서 우리는 앞서 살펴본 게일 쉴러의 치명적인 논증 오류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죠. 다들 이해하시겠습니까?"
카벨은 슬슬 좀이 쑤시는 몸을 애써 티 나지 않게 뒤틀었다.
애초에 난 검술학부인데 이딴 걸 왜 공부해야 하지? 검술학부생은 검술만 잘하면 장땡이잖아! 실전은 내가 짱 센데? 대련 시간에도 내가 죄다 발라 버리는데? 매일 이 몸의 독보적인 활약에 입도 못 다물고 감탄하는 놈들이 쫙 깔렸는데!
지금 당장에라도 강의실을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이 가슴 속에서 꿈틀거렸다.
'와, 보충수업도 꼬박꼬박 나가서 열심히 듣고 우리 카벨 오빠 진짜 멋있네!'
하지만 점점 그득히 쌓여 가던 불만은 얼마 전 통신석을 통해 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를 상기하는 순간 푸시식 식어버렸다.
'이번 시험은 정말 기대해도 되겠다. 오빠가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고 있으니까!'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카벨의 입꼬리가 점점 들썩들썩했다.
하지만 곧 그는 심각한 얼굴로 고뇌하고 말았다.
잘 본 시험 점수라는 건 도대체 몇 점일까? 솔직히 반타작만 하면 완전 잘한 거 아닌가?
어쨌든, 이번 시험도 낙제를 받으면 하리가 실망할 것이 분명했다. 어쩌면 '오빠는 내 생각만큼 그렇게 멋있지는 않구나?'라며 싸늘한 얼굴을 할지도 몰랐다.
그런 상상을 하는 동안 카벨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그건 절대 안 돼! 난 지금처럼 계속 멋진 오빠여야 한다고!
"자, 그럼 오늘 수업한 내용 중에 질문이 있습니까?"
수업은 이제 막바지였다. 언제나처럼 교수는 수업을 끝내기 전, 학생들에게 마지막으로 궁금한 점이 있으면 질문하라고 말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학생들이 생각하는 것은 대개 비슷할 터였다.
'입 열지 마! 말하지 마! 그냥 아무것도 물어보지 마!'
수업이 끝날 때가 되자 죽은 동태 같던 학생들의 눈동자에도 어느덧 초롱초롱한 생기가 가득 차올랐다. 의자에 걸쳐 있는 엉덩이도 벌써부터 들썩들썩했다.
"그럼 오늘 수업은 이만······."
"교수니이이이임!"
하지만 바로 그때, 누군가의 우렁찬 목소리가 교수의 퇴장을 막았다.
믿을 수 없게도, 그를 불러 세운 것은 카벨이었다.
"그, 그래요, 에른스트 군. 무슨 문제라도?"
교수는 차마 카벨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질문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이 망나니가 왜 저렇게 무서운 얼굴로 자신을 불렀을까 당황스러워했다.
그것은 다른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설마 카벨이 교수에게까지 시비를 거는 것일까 싶어 숨조차 죽이고 그를 쳐다보았다.
"방금 전에 수업했던 내용······."
헉, 혹시 방금 전에 수업했던 내용이 아주 구리다던가, 뭐 그런 말이라도 하려는 걸까?
교수까지 긴장하고 카벨의 입을 주시했다. 하지만 이어진 그의 말은 모두의 예상을 빗나갔다.
"잘 이해를 못 했는데,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앗!"
바로 그 순간, 모두가 입을 쩌억 벌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뭐······? 우리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설마 지금 수업내용을 다시 설명해달라고 한 거야? 누가? 식당 메뉴판도 두 번 보기 싫어하는 저 카벨 에른스트가?
"서, 설명을 다시 해달라고?"
"넵! 이번에는 토씨 하나 안 놓치고 열심히 들을 테니까 다시 설명해 주세요!"
헉! 오늘 카벨 에른스트 밥에 약 탄 거 누구야?!
학생들을 혼란의 도가니탕에 빠뜨린 카벨은 뻔뻔한 얼굴로 교수를 향해 재수업을 요구했다.
물론 이미 수업 시간은 모두 끝난 뒤였기 때문에 교수의 재량껏 거부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죽기 전에 볼 수 없을 줄 알았던 카벨의 학구열에 교수는 감동했다.
"오오, 그래요! 이렇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일이! 자, 여러분! 책을 다시 펼치세요! 우리 모두 오늘 수업 내용을 완벽히 이해할 때까지 해봅시다!"
"네엡!"
하지만 뭘 잘못 먹었는지 기운이 넘치는 것은 저 두 사람뿐이었다.
졸지에 보충수업을 연장하게 된 학생들은 어버버 거리며 황당해했다. 하지만 그들의 자유를 갈취한 사람이 다른 누구도 아닌 미친개 카벨이었기 때문에, 누구 한 사람 앞장서 반대 의사를 내비치지 못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책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카벨의 미친 기행은 그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전 과목에 걸쳐 진행되었다.
그 후 그와 함께 보충수업을 받는 내내 고통받아야 했던 낙제생들은 카벨의 어울리지도 않는 학구열 때문에 다음 시험에서 덩달아 두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높은 성적을 받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들은 카벨 에른스트의 이름만 들어도 진저리를 치게 되었다나 뭐라나.
16. 새로운 만남이란
"갑자기 웬 꽃이야?"
귀가한 유진을 보고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의 손에 들린 꽃다발 때문이었다.
설마 나한테 주려고 사온 건 아닐 테고. 유진이 꽃을 좋아했던가?
"로웬그린이 가져왔어."
로웬그린 씨가?
유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좁히며 꽃을 내려다보았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로웬그린이 저 꽃을 가져온 경위가 썩 유쾌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장미네. 예쁘다."
유진의 손에 들린 꽃다발은 척 봐도 선물용으로 꾸며진 것 같았다. 로웬그린이 저런 장미꽃을 유진에게 선물한 이유가 도대체 뭘까?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내가 지나가듯이 던진 말에 유진이 옆에 있던 사용인을 불러 세웠다.
"화병에 꽂아서 하리 방에 가져다 놔."
"네, 공작님."
그 모습을 보고 내가 물었다.
"나한테 줘도 되는 거야?"
"이제 내 거니까 내 마음이지."
으엥, 로웬그린 씨가 들으면 섭섭해할 소리를.
역시 유진은 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럼 지난번에 내가 준 꽃도 처치 곤란이었을 텐데. 크흑, 나는 지난번에 내가 그에게 선물했던 작약의 안부를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그냥 내가 할게. 나한테 줘."
내가 앞으로 손을 내밀자 아직 옅은 화상 자국이 남은 손등에 잠시 그의 시선이 머물렀다. 하지만 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벨론티아 양에게서 초대장이 왔어."
나는 그에게서 꽃다발을 받아 들며 지나가듯 말했다. 그러자 유진의 손이 한순간 멈칫했다.
"언제 한 번 단둘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더라."
사실 로자벨라 벨론티아와는 빠른 시일 내에 만나게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유진의 약혼녀였고, 나는 비록 피는 섞이지 않았어도 대외적으로는 그의 여동생이었으니까.
"난 가겠다고 답장을 보낼 생각이고."
만약 그녀에게서 초대장이 오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가 먼저 그녀에게 만남을 청했을 터였다.
"오빠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그래."
지난번 유진이 했던 말처럼 나는 그에게 허락을 구하지는 않았다. 유진도 그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담담히 대꾸했다.
"그렇게 알고 있을게. 말해줘서 고마워."
유진에게서는 아무런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내가 그의 약혼녀를 만나는 것이 탐탁지 않다거나, 아니면 반대로 우리가 친분 도모를 하는 것이 기껍다거나.
유진은 정말 말 그대로 내가 로자벨라 벨론티아를 만나든 말든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조만간 루이제랑 만나서 같이 의상실에 가려고. 오빠 약혼녀를 만나는 자리인데 후줄근해 보이면 안 되잖아."
하지만 내가 장난스럽게 덧붙이자 그 말에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작게 웃었다.
"네가 거적때기를 걸쳐도 그렇게는 안 보일 텐데."
그 후, 유진은 웃음기를 거두고 말을 이었다.
"외출할 때는 꼭 에단을 데리고 가."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지금도 내 뒤에 서 있는 에단이 있었다. 에단은 유진의 말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는 장미 꽃다발을 품에 안고 먼저 위층으로 올라가는 유진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
"하리 언니!"
며칠 뒤, 나는 루이제를 만났다.
"보고 싶었어, 언니!"
그녀는 나를 만나자마자 반갑게 내 손을 부여잡고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나도 보고 싶었어! 그동안 잘 지냈지?"
나도 거기에 동참해서 우리는 꺄르륵 웃으며 사이좋게 손에 손을 붙잡고 길 한복판의 훌륭한 민폐 소녀들이 되었다.
화사하게 차려입은 아가씨들이 대로변에서 치맛자락을 펄럭이고 있는 모습에 자연스럽게 주변의 시선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양껏 재회의 기쁨을 누린 뒤 다시 멈추어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