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그 오빠들을 조심해 55화
그들은 무척이나 극진한 자세로 우리를 대했다. 평소에는 그림자처럼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다가도 무언가를 필요로 하면 눈 깜짝할 새 나타나 수족같이 움직였다.
무언가를 요구하면 두 번 말하게 하는 법 없이 곧바로 시키는 일을 하거나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었고, 단 한 번도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이나 말을 해 심기를 거스르는 법이 없었다.
마치 저택에서 일한 경력만 최소 20년은 넘는 전문가들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어쨌든 모두가 그런 식이었기 때문에 확실히 무언가를 부탁할 때 편하긴 했다. 하지만 그렇게 착실히 내 수발을 드는 사람들을 볼수록 나는 어쩐지 기분이 묘해졌다.
그래도 내가 꾸준히 말도 걸고 친절하게 대한 탓인지, 적어도 내 시중을 들어주는 사람들은 처음보다 내가 편해진 눈치였다.
카벨과 에리히는 아직 학기 중이었기 때문에 주말 동안만 집에 머물고 다시 학술원으로 돌아갔다. 그래서 이곳에 남게 되는 것은 유진과 나, 단둘뿐이었다.
하지만 낮 동안에는 유진도 일을 하러 나가야 했다. 그래서 나는 집에 적응도 할 겸 저택에 머물면서 휴버트와 전에 못다 한 회포도 풀고, 사용인들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처음에 나와 말을 섞으면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먼저 인사를 하고 말을 걸 때마다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이 의아할 정도였다.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는 말이 왜 있던가. 얼마 후에는 그들도 내가 말을 걸면 제법 의연히 대답해 주는 단계가 되었다.
"엄격하고 어려운 주인님이라고 해야 할지······."
하루는 내 옷 시중을 들어주는 하녀에게 유진에 대해 물어보았다. 우리가 없는 동안 그 혼자 이 집에서 어떻게 지냈는지가 궁금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내 물음의 의미를 잘못 알아들은 듯 자신이 본 유진에 대해 말해주었다.
"사실 지금까지는 항상 아침 일찍 저택을 나서 밤늦게 돌아오시니 마주치는 일이 거의 없었지요. 그래도 어쩐지 대하기 어려운 분이라는 인상이 있었어요."
비단 그녀뿐만이 아니라 에른스트의 사용인들이 유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주로 이러했다. 저택에는 많은 사용인이 있었고, 개중에는 이전부터 이곳에서 일했던 낯익은 얼굴도 몇 있었지만 그들은 대개 유진에 대해 말을 아꼈다.
그래서 지금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은 에른스트에 들어온 지 이제 2년이 되었다고 하는 신입 하녀였다.
사실 2년 차라고 하면 완전한 신입이라고 하기에 무리가 있었지만 에른스트에서는 가장 짧게 일한 축이라고 했다.
"그래도 에른스트는 다른 곳보다 대우가 좋아요. 그래서 저도 되도록 여기에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리고 요즘은 공작님도 전보다 무섭지 않으시니까······. 아, 아니요. 그렇다고 저희를 나쁘게 대하셨다는 게 아니라 원래도 충분히 좋은 주인님이셨어요."
유진은 요즘은 그리 바쁘지 않은지 꼭 일찍 귀가해 나와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아침 식사도 유진이 나가기 전에 내가 일찍 일어나 함께하곤 했기 때문에 나는 집에서 점심만 혼자 먹으면 되었다.
"지금까지는 항상 밤늦은 시각에 들어오셨는데 아가씨를 정말 많이 아끼시는 것 같아요."
지금까지 유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 준 하녀가 조심스럽게 건넨 말에 나는 그저 한 번 웃고 말았다.
똑똑.
"잠깐 들어가도 될까?"
그러던 어느 날, 유진이 어쩐 일로 평소보다 일찍 돌아왔다.
시간은 오후 3시 정도로, 나는 얼마 전부터 내 앞으로 오기 시작한 우편물을 뜯어보고 있었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덧 방문 앞에 서 있는 유진의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방이 좀 갑갑해서 창문과 문을 활짝 열고 환기를 시키던 중이었는데.
"오빠, 왜 이렇게 일찍······ 앗!"
뒤이어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다 말고 작은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옆에서 차를 따라 주던 하녀가 내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듯, 찻잔 대신 그 옆으로 짚은 내 손에 뜨거운 액체를 부었기 때문이다.
나는 화들짝 놀라 테이블에서 손을 뗐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본의 아닌 실수였던 만큼 하녀도 당황하며 내게 사과했다.
"괜찮아?"
그때, 옆에서 뻗어진 누군가의 손이 급히 내 손목을 감싸 쥐었다. 어느덧 가까이 다가온 유진이었다. 내 손에서 흐른 물기가 맞닿은 유진의 손까지 젖게 만들었다.
"괜찮아. 찻물이 그렇게 뜨겁지는 않았어."
솔직히 방금 전에 갓 끓여 온 물이었기 때문에 피부가 꽤 아렸다. 하지만 유진이 심각한 얼굴로 빨갛게 물든 내 손등을 내려다보고 있어서 나는 일부러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물론 유진은 믿지 않는 눈치였다. 다음 순간, 날카로운 빛을 띤 검은 눈동자가 내 옆에 있는 사람에게 날아가 꽂혔다.
"정신을 어디에 팔고 있으면 이런 실수를 하지?"
나도 모르게 흠칫할 정도로 냉랭한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하녀를 더없이 싸늘한 얼굴로 응시하고 있는 유진을 시야에 담았다.
한기 어린 시선을 정면에서 받은 하녀가 아연실색해서 무릎을 꿇었다.
"죄, 죄송합니다! 좀 더 조심해야 했는데 제가 부주의해서······. 결코 고의로 그런 게 아니라······."
"지금 누가 변명을 듣고 싶다고 했나?"
유진의 눈동자가 마치 까만 얼음 조각 같았다. 동시에 그것은 바라보기만 해도 베일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첨예하고 시렸다.
"의도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어. 그렇다고 지금 벌어진 일이 없던 것이 되지는 않으니까."
나는 위압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유진과 그 앞에서 떨고 있는 하녀를 보다가 유진이 다시금 입을 여는 순간 먼저 말했다.
"괜찮아, 오빠. 어차피 실수고. 그렇게 크게 데지도 않았어."
유진에게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팔을 살짝 붙잡자 그의 입술이 천천히 다물어졌다.
내 행동과 말에서 달래는 듯한 기색을 읽었는지 곧이어 유진의 눈동자가 내게로 미끄러졌다. 시야에 비치는 까만 눈이 여전히 차가웠지만 그래도 방금 전보다는 아주 조금 나았다.
나는 얼굴이 백지장처럼 희게 질린 하녀를 향해 말했다.
"치료하고 올 동안 방을 치워 줘."
"네, 네. 아가씨."
다행히도 그 후 유진은 별다른 말을 더 하지 않았다. 일단 내 손을 치료하는 일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해서인지도 몰랐다.
곧바로 나는 응급처치를 받았고, 그 후 기분이 조금 복잡해졌다. 벌어진 일에 비해 유진의 반응이 다소 과하다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직접 내 손을 치료해 주는 유진의 손길이 방금 전 실수한 하녀에게 오금이 저릴 만큼 차가운 눈빛을 보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조심스러웠다.
생각해 보면 아까 전 나한테 가까이 다가와 붉게 물든 손을 들어 올렸을 때도 그랬다.
"아프지 않아?"
"안 아파. 오빠 은근히 걱정이 많구나? 나이가 들수록 그렇게 된다던데."
나는 분위기를 환기할 겸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하지만 뒤이어 유진이 조용히 읊조린 말에 잠시 말문이 막힐 뻔하고 말았다.
"넌 괜찮지 않아도 다 괜찮다고 하니까."
"어, 아닌데? 진짜 괜찮을 때 괜찮다고 하는데?"
아니, 당연히 참을 만하고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하지! 내가 뭐 당장 아파서 죽을 것 같은데도 무작정 버티기만 하는 줄 아나?
"그야 넌 그렇게 말하겠지."
그래도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유진의 얼굴에 계속 서려 있던 한기가 조금 더 누그러져서 다행이었다.
"방금 전 일에는 내 탓도 있으니까 아까 그 하녀한테도 더 화내지 마."
물론 유진이 따로 그녀에게 찾아가 벌을 주거나 할 것이라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평소 사용인들에게 무관심했다던 그가 이렇게 서릿발 같은 반응을 보인 것은 아마도 그만큼 화가 났기 때문일 터였다.
평소에 사용인들이 무결점에 가까운 완벽한 모습을 보이던 것도 그렇고, 다소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극진하던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그들은 작은 실수라도 저지르면 유진이 자신들을 잡아먹기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유진이 아무 짓도 하지 않고 무심한 모습을 보일 때조차도 사용인들은 그를 어려워했는데······. 오늘의 유진을 본 아까의 그 하녀는 앞으로 더하겠지? 그런 생각을 하자 조금 싫은 기분이 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초대장은 안 젖었을까."
"초대장?"
그러다 문득 아까 전 보고 있던 우편물이 생각났다.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하나씩 뜯어보고 있었는데 찻물에 젖지는 않았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에른스트에 돌아왔다는 소문이 벌써 퍼졌는지 여기저기서 편지를 보냈더라고."
원래 이 바닥 소문이 날개 돋친 듯 순식간에 퍼지기는 하지.
에른스트는 아를란타 황실의 오른팔과 같은 가문이다 보니 이전 생에도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내 출신을 알고 경멸하는 사람들조차 앞에서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친한 척을 할 정도였으니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삼 형제 앞으로 가는 편지들은 나와 비교할 수 없이 더 많을 것이었다.
"그중에 초대장도 몇 개 있었는데 가는 게 좋을까?"
솔직히 지금 당장 그런 곳에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어디까지 자유롭게 행동해도 될지 미리 유진의 생각을 들어 보고 싶었다.
물론 지난 생에도 유진은 내 행동에 제약을 두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랐으니까.
만약 유진이 한동안 외출을 삼가는 게 좋겠다거나, 중요한 몇 군데에는 참석하는 게 낫겠다고 한다면 그의 의견에 따라 줄 요량이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하지만 유진은 망설임 없이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어디든 가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뭐든지 해도 좋아."
귓가를 스치는 그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차분했다.
"만약 갖고 싶은 게 있다면 그게 뭐든 전부 가져도 돼."
그 안에 담긴 놀라운 내용과는 상반되는 담담함으로 유진은 말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들인 거니까."
내가 아는 유진은 이런 일로 빈말을 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나는 눈앞에 있는 검은 눈동자를 마주 보았다. 그러는 동안 지금 그가 진심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순간 속이 약간 아프게 뒤틀렸다.
하고 싶은 건 무엇이든 해도 되고, 갖고 싶은 건 무엇이든 가져도 된다니. 일국의 여왕도 아닌 일개 평범한 여자아이에게 할 만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유진이 그런 말을 할 수 있게 된 오늘까지, 그것과 맞바꿔 잃어 왔을 것들을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어쩐지 심장이 꽉 조이는 듯했다.
"'뭐든'이라니, 내가 무리한 걸 원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내가 그런 생각을 하는 걸 들키기 싫어서 애써 농담처럼 웃으며 말했다.
"만약 내가 지금 당장 줄 수 없는 걸 원한다고 해도 그게 뭐든 가질 수 있게 해줄게."
그러나 결국 내게는 과분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약속만을 재차 들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유진이 자신의 말을 지키기 위해 정말 그 어떤 노력도 불사할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오빠."
아마도 그의 약속은 내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다른 두 동생을 포함한 우리 모두를 향한 것일 터였다.
하지만 나는 유진이 그러는 게 싫었다. 나는 양손을 들어 유진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정면에서 마주한 그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말했다.
"난 오빠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유진은 또다시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너희들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야."
원래 이런 사람인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대답하는 데 너무 망설임이 없었다.
"오빠가 행복해야 우리도 행복해."
나는 그를 향해 다시 말했다. 하지만 유진의 얼굴을 보니 내 말을 가슴 깊이 새겨들은 기색이 아니었다.
"나는······."
"잠깐만, 그냥 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보아하니 지금 다른 말을 더 해봤자 또다시 답답한 소리를 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니까 차라리 안 들을 테다. 나는 잡고 있던 유진의 뺨을 눌러 말을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