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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54화 (54/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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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 54화

다른 사람들이 볼 때는, 내가 에른스트에서 살아온 날보다 바스티에에서 살아온 날이 훨씬 길었다.

게다가 내가 에른스트에서 지냈던 2년 동안은 순전히 좋은 기억만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 보통의 아이라면 에른스트보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바스티에를 오히려 진짜 집으로 여길 만도 했다.

'그러니까, 혹시 지금 생활이 좋으면······.'

혹시 얼마 전 만났을 때 유진이 내게 하려던 말도 그런 생각에서 기인한 것이었을까?

하지만 나는 그 보통의 경우가 아니었다. 이미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나는 에른스트에서 살아왔으니까. 그리고······.

'당연하지.'

'넌 우리 동생이잖아.'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목소리가 다시금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방금 전 꿀을 탄 차를 마셔서 그런지 입안이 달았다.

하지만 아니, 아니야. 사실 나는 그때 그가 그런 말을 해주지 않았어도 그 집을 떠나지는 못 했을 것이다.

나는 말없이 그저 어렴풋하게 웃었고, 요하네스는 거기에서 내 대답을 읽어 냈다.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미소 지었다.

"그곳에 가게 되어도, 네가 바스티에를 그리워해 줬으면 좋겠어."

"그리울 거야."

"지금 에른스트를 생각하듯이, 언젠가 바스티에에 다시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미안하게도, 그 말에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요하네스는 그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웃을 뿐이었다.

"지금은 큰 욕심을 부리지 않을게."

그 후 요하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쉬어.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니까."

나는 뒤돌아서는 그를 향해 진심을 담아 말했다.

"고마워, 요한 오빠."

그러자 요하네스가 나를 돌아보았다.

"항상 오빠에게 고마웠어."

그는 그렇게 말하는 나를 보며 다시 한번 웃어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바스티에에는 긴 시간 기다려 왔던 손님이 방문했다.

"어서 오렴, 유진."

나는 2층의 층계참 위에 서서 바스티에 부부를 마주하고 있는 사람을 내려다보았다.

"형!"

"유진 형."

카벨과 에리히도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들의 부름에 유진의 검은 눈동자가 우리를 향해 미끄러졌다.

"데리러 왔어."

나지막한 목소리가 귓가를 가로질렀다. 나는 다시 만난 그를 웃으며 반겨주었다.

"어서 와, 오빠."

그렇게 우리는 바스티에를 떠났다.

그리운 집. 유년 시절의 아릿한 기억이 조용히 잠들어 있는 우리들의 요람. 에른스트로의 귀환이었다.

***

"어서 오십시오, 공작님."

에른스트에 도착하자마자 낯익은 얼굴이 우리를 반겼다. 나는 고개 숙여 인사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아가씨, 도련님들.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휴버트."

집사 휴버트는 내 기억보다 조금 마르기는 했지만 그 외에는 이전과 달라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역시도 세월을 비껴가지는 못해서, 전보다 약간 희게 센 머리카락이나 눈가의 주름 같은 것이 눈에 띄기는 했다.

"오랜만이에요, 휴버트. 잘 지냈어요?"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내가 반가움을 표하자 휴버트도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동안 몰라보게 많이 자라셨군요."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가 잠시 아득한 빛을 띠었다. 아마도 6년 전의 내 모습을 되짚어 떠올리는 것 같았다.

"하리, 안으로."

"그래, 인사는 그쯤하고 빨리 들어가자구."

하지만 휴버트와 회포를 다 풀기도 전에 유진과 카벨이 나를 재촉했다. 크으, 유진은 그렇다 쳐도 둘째 진상 넌 좀 정이 없는 것 아니니? 휴버트가 예전에 개망나니 같은 널 얼마나 큰 인내로 보듬었는데!

"인사는 나중에 다시 해도 되잖아. 어차피 이제는 계속 여기서 살 거니까."

"왈왈!"

그때, 에리히가 지나가듯 말을 던지며 나를 지나쳐 갔다. 그 후 페니가 신이 난 듯이 꼬리를 흔들며 앞으로 달려갔다.

"아가씨,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휴버트가 웃으며 하는 말을 듣고 나도 멈춰 있던 걸음을 옮겼다. 그래, 에리히의 말이 맞았다. 앞으로 시간은 많았으니까.

우리는 다 함께 저택의 내부로 들어섰다. 사용인들을 잠시 물렸는지 안에는 다른 사람이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방해 없이 집안을 둘러보기에는 그편이 더 좋기는 했다.

아까 저택의 외관을 볼 때도 그랬지만 이렇게 직접 안으로 들어와 보니 옛 기억이 더욱 선명히 새록새록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서 오렴, 얘들아.'

당장에라도 에른스트 부부가 나와 웃으며 우리를 맞아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래, 이제 두 번 다시 그런 일은 없겠지.

에른스트 부부가 죽은 후, 차라리 그들에게 정을 주지 않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몇 번이나 했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 자체를 후회하지는 않았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나는 충분히 행복한 꿈을 꾸었으니까.

"방은 너희들이 직접 정리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대로 놔뒀어."

유진의 말을 듣고 자리에 멈추었던 걸음을 뗐다.

2층으로 향하는 층계참을 밟고 올라가는 기분이 다소 묘했다. 카벨과 에리히도 각자 자신의 방으로 찾아갔다. 오직 유진만이 가만히 서서 그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익숙한 방문 앞에 잠시 동안 멈추어 있다가 문고리를 돌렸다.

달칵.

그리고 마침내 눈에 들어온 방 안의 풍경에 느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 방은 에른스트 부부가 손수 꾸며 주었던 대로 여전히 유치한 분홍색투성이였다. 분홍색의 벽지, 분홍색의 캐노피, 옅은 붉은 기가 도는 원목 가구들, 그리고 바닥에 깔린 분홍색의 카펫까지. 침대 위에는 그들이 내게 사 주었던 아기자기한 인형들이 아직 그대로 있었다.

그동안 사람을 시켜 꾸준히 관리를 한 듯 방은 깨끗했다. 방 안을 둘러보는 동안 점차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정말 예전 그대로네."

지금 내 시야에 비치는 풍경이 6년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 거의 완전히 똑같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마치 지금 이곳만 아직까지 시간이 멈춰 있는 느낌이었다. 다만 예전보다 작아진 것 같은 침대라든가, 전보다 높이가 낮아진 책상과 의자 같은 것이 내 지나간 시간을 반증하고 있었다.

나는 침대로 다가가 그 위에 있는 인형 중 하나를 집어 들었다. 기다란 귀를 늘이고 있는 토끼 인형은 새로 세탁을 했는지 때 하나 묻지 않은 흰색이었다.

예전에 내가 에리히에게 빌려줬다가 마지막 밤에 다시 돌려받았던 바로 그 토끼 인형이었다.

문득 옛날 생각이 나서 나는 설핏 웃으며 다시금 침대 위에 인형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나가자 나보다 한발 앞서 복도에 나와 있는 카벨과 에리히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 다 둘러보고 나왔어?"

"응! 별로 볼 것도 없던데?"

내 물음에 카벨이 곧장 대답했다.

그런데 기분 탓인가? 왜인지 두 사람은 생각보다 대충 방을 둘러보고 나온 느낌이었다. 게다가 둘 다 표정이나 분위기 같은 것이 오랜만에 집에 온 사람들답지 않게 태연해 보였다.

"두 사람은 왠지 좀 무덤덤해 보이네?"

"그야 우리는 전에······ 어억!"

"큰형이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어."

카벨이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다가 돌연 비명을 내질렀다. 옆에 있던 에리히가 팔꿈치로 카벨의 옆구리를 가격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전에?'라고? 방금 카벨이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지? 왠지 맥락상 오늘에 앞서 먼저 여기에 와본 적이 있다는 소리가 이어져야 할 것 같은데? 나 빼고 둘이 집에 온 적이 있었나?

"뭐 해? 빨리 와."

내가 눈을 가늘게 좁히고 그들을 쳐다보자 카벨이 슬쩍 내 시선을 피하며 끙끙거렸다. 반면 에리히는 태연히 나를 재촉했다.

어차피 카벨에게서 정보를 캐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나중을 기약하며 일단 두 사람을 따라갔다.

"아, 이 방도 오랜만이다."

잠시 후 우리는 놀이방 앞에 다다랐다. 내가 에른스트 부부를 따라 이 집에 와서 세 진상을 처음 만났던 곳. 그리고 에른스트 부부의 부고 소식을 들었던 곳이었다. 여기도 아직 예전 그대로의 모습일까?

"선물이 있어서 보여 주려고."

문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서 있던 유진의 말에 나는 의아해졌다. 하지만 내가 의문을 표하기도 전에 유진이 문을 열어젖혔다.

놀이방의 풍경도 옛 기억 속의 것과 거의 동일했지만 단 하나가 달랐다. 방의 한가운데에는 그동안 본 적이 없는 것이 뚜렷한 존재감을 자랑하며 서 있었다.

"하리, 네 거야."

나는 두 눈을 크게 뜬 채로 유진을 돌아보았다.

"전에 피아노를 배운다고 했던 게 생각나서."

그가 선물이라고 한 것은 눈부시도록 매끄러운 광택을 내는 새하얀 피아노였다.

유진의 말을 듣고 나서야 예전에 그에게 보냈던 편지에 루이제와 함께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썼던 것이 기억났다.

그 후로도 두어 번 정도 더 그 일을 언급한 적은 있었지만 그마저도 지나가듯 꺼낸 얘기였는데······.

얼굴을 보아하니 카벨과 에리히는 유진이 준비한 선물을 이미 알고 있던 눈치였다.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눈앞에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가 손을 올리자 피아노의 서늘한 온도가 손끝을 타고 그대로 전해져 왔다.

"고마워. 정말 마음에 들어."

나는 약간 감격한 상태로 유진을 향해 말했다. 그러자 마주한 얼굴이 미묘하게 내 반응에 안심한 듯한 빛을 띠었다.

혹시 준비한 선물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까 봐 걱정했던 걸까? 유진에게 이런 귀여운 구석이 있다니!

마음 같아서는 가서 얼싸안아주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전생에도 진상들에게 그런 식의 육탄 공세(?)는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마음속의 충동을 참아 내기로 했다. 그리고 그 대신 아주 격하게 피아노에 대한 이런저런 칭찬을 늘어놓았다.

"진짜 이렇게 예쁜 피아노는 처음 봐!"

"맞춤 제작을 하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어서. 다음에 새 피아노로······."

"아니야, 난 이게 좋아! 다른 피아노는 없어도 돼!"

한 번 내 것은 영원한 내 것! 맞춤 피아노가 아니라고 해서 헌신짝처럼 버리다니, 그건 안 될 말이지! 난 그렇게 매정한 여자가 아니랍니다!

"대충 다 봤으면 가서 밥이나 먹자."

"그래, 우리 밥 먹자!"

잉, 그런데 이 감동적인 순간에 꼭 산통을 깨야겠니?

에리히가 느닷없이 먼저 툭 던지듯 내뱉은 말에 카벨이 격하게 호응했다. 나는 피아노에서 손을 떼고 그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밥을 먹기에는 아직 좀 시간이 이르지 않아?"

"무슨 소리야? 집에 왔으면 제일 먼저 밥을 먹어야지!"

하지만 내가 말하자마자 카벨이 정색을 하며 소리쳤다.

쿠, 쿨럭. 도대체 언제부터 밥 먹는 게 집에 돌아온 신고식 같은 게 된 거지? 배가 많이 고픈가? 아니, 점심 먹은 지도 얼마 안 됐는데 왜 다들 집에 오자마자 밥 타령이야?

"그래, 식당으로 가자. 아마 금방 준비될 거야."

그런데 유진까지 픽 웃으며 두 사람의 말에 동조하는 것이 아닌가?

한창 자라나는 새 나라의 청소년들이라서 그런가······. 결국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들에게 떠밀려 식당으로 가야만 했다.

그날의 이른 저녁 식사는 도란도란한 이야기가 그치지 않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앞으로 이런 날이 또 있을까 싶은, 완벽한 하루였다.

***

나는 목욕 시중을 들어주는 하녀들을 앞에 두고 약간의 난처함을 느꼈다.

"이 정도는 내가 혼자 할 수 있는데."

시중받는 것은 익숙했기 때문에 딱히 그 자체에 거부감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에른스트의 하녀들은 내가 손 하나 까딱하게 놔두지 않았다.

"도련님들과 아가씨께서 생활하시는 데 작은 불편함 하나 없어야 한다고 공작님께서 지시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 말에 정중히 고개 숙여 대답한 뒤 다시금 세심하게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사용인들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들의 태도를 통해 에른스트의 분위기가 이전과는 다소 달라졌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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