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오빠들을 조심해!-53화 (53/138)

# 53

그 오빠들을 조심해 53화

물론 오늘의 만남은 우연한 것이었지만 얼마 후 나는 다른 두 형제와 함께 유진이 기다리고 있는 에른스트로 돌아갈 것이었으므로.

그 후 유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나와 눈을 마주하는 동안 그의 검은 눈동자가 서서히 얕은 물살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나야말로······."

그리고 잠시 동안의 시간이 더 흐른 뒤, 그는 마치 소년 시절로 되돌아간 것처럼 제 안의 약한 부분을 내게 드러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기다려 줘서 고맙다."

***

밖으로 나왔을 때는 어느덧 하늘 꼭대기에 걸려 있던 해가 첨탑의 십자가 밑으로까지 내려와 있었다.

건물 앞에는 마차 두 대가 대기하고 있는 중이었다. 마차 앞에 호위 기사들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밖으로 나온 우리를 발견했는지 가까이에 있던 마차에서 금발 머리의 남자가 내려섰다.

"나오셨군요."

"오래 기다렸나?"

"뭐, 생각보다는 아닙니다."

아까도 보았던 유진의 동행인은 이지적인 느낌의 청년이었다. 나이는 이십 대 중후반 정도일까. 행색이나 분위기로 보아서 유진의 호위는 아닌 것 같았고, 오히려 참모에 가까운 인상이었다.

남자의 녹색 눈동자가 나를 향하는 순간 그 느낌은 확신이 되었다.

"이쪽은 로웬그린 스왈로츠야."

"부족한 몸으로나마 공작님의 보좌를 맡고 있습니다."

유진이 먼저 소개하자 그가 나를 향해 정중히 인사했다.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마주한 사람을 응시했다. 지난 생에도 그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유진의 옆에 서 있는 남자의 존재에 호기심이 생겼다.

유진의 보좌라고? 지난 생에서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은 고지식한 느낌의 아저씨였는데.

로웬그린 스왈로츠라고 하는 남자는 나 못지않게 호기심 어린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알겠지만 이쪽은 내 여동생 하리."

"처음 뵙겠어요. 하리 에른스트예요."

유진은 아직도 내가 조금은 낯선지 여동생이라는 단어 앞에서 잠시 말을 끌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짧은 순간의 일이었다. 어쩌면 이제껏 다른 사람 앞에서 나를 소개할 일이 없었던 탓인지도 몰랐다.

"시간이 늦었으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좋겠다."

루이제는 마차에 타고 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굳이 마차 문을 열어 확인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라, 유진은 곧바로 나를 향해 말했다.

과연 그의 말처럼 슬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럼······."

하지만 이렇게 헤어지려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나중에 봐, 오빠."

그렇다 해서 지금 내가 그를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지만.

내 손을 잡은 유진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이번에는 유진이 나를 정식으로 에스코트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까처럼 격의 없게 편안히 손을 붙잡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 조만간 또."

유진도 아쉽기는 마찬가지인지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여운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유진을 이대로 그냥 보내려니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끄응, 나는 약간 충동적으로 지금까지 들고 있던 것을 유진에게 떠안겼다.

"이거 오빠 가져. 선물이야."

이, 이것은 갸륵한 동생의 마음이라고나 할까?

타지로 나갔다가 오랜만에 집으로 온 아들에게 평소 좋아하던 음식을 상다리 휘어지게 차려 준다거나, 아니면 이제 곧 시집갈 딸에게 이것저것을 바리바리 싸주는 것처럼, 나도 유진을 그냥 보내기가 좀 그래서 뭐라도 주고 싶었다.

하지만 문제라면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꽃다발뿐이었다는 점이다.

그, 그래도 작약은 예쁘니까요. 가져가서 화병에 꽂아 두고 보면 기분 전환도 되고 좋을 거라고!

유진은 엉겁결에 내가 떠넘긴 작약 다발을 받았다. 내 품에서는 거의 가득 찼던 꽃다발이 유진의 품 안에서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그는 무심코 내가 주는 것을 받아 놓고 잠시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선물이라고?"

"아까 산 건데, 응, 오빠한테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솔직히 그냥 가져다 붙인 말이었다.

하지만 말하고 나서 보니 제법 그럴듯했다. 서늘한 느낌을 풍기는 남자와 꽃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은근히 묘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었다.

"꽃 선물을 받는 건 처음인데."

문득 앞에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려서 보니 유진이 나를 향해 여트막하게 웃고 있었다.

"나보다는 너한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지만."

꼭 봄볕에 녹아내리는 얼음 같았다. 얼굴 위에 고여 있던 싸늘함을 거둬 내고 따스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나를 응시했다. 그 얼굴이 꼭 에른스트 부부가 살아 있던 때의 14살의 유진 같았다. 그걸 보자 가슴이 약간 찡해졌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그때까지도 옆에 서 있던 로웬그린이 그런 유진을 향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는 것이 보였다.

보는 눈이 있는 데다가 아무래도 이 나이를 먹고는 조금 쑥스럽기도 했지만······.

나는 미소 지은 유진의 얼굴을 잠시 동안 말없이 바라보다가 팔을 들었다. 안고 있던 꽃을 이미 유진에게 넘긴 뒤였기 때문에 양손을 모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다.

나한테 끌어안기는 순간, 유진이 굳어졌다. 솔직히 체격 차이 때문인지 내가 유진을 안았다기보다는 안긴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내 팔에 둘러싸인 몸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가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그를 곧바로 놔주지 않고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속삭였다.

"금방 다시 만나."

그리고 이내 팔을 풀고 그에게서 떨어지려던 찰나에 등 뒤로 온기가 스몄다.

"금방 데리러 갈게."

귓가에 자그마한 속삭임이 날아들었다. 그 직후 내 어깨와 등을 힘주어 꽉 끌어안았던 팔이 떨어져 나갔다.

그렇게 나는 유진과 헤어진 뒤 마차에 올랐다.

안에 먼저 타고 있던 루이제가 나를 보고 입을 열었다.

"인사 다 나눴어?"

"응, 오빠가 너하고도 제대로 인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는데."

처음 만났을 때는 유진도 나도 경황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난 유진의 보좌관이라고 하는 로웬그린 씨와 인사를 나눴는데, 루이제는 계속 마차 밖으로 나오지 않아서 신경이 쓰였다.

이미 마차가 출발한 뒤였기 때문에 이제 와서 인사를 나누는 건 어차피 무리이기는 했다.

"어차피 얼마 안 가서 또 우리 집에 올 거 아니야. 언니 데려가려고."

그렇게 말하는 루이제는 약간 뾰로통해 보였다.

"뭐, 그렇다고 그 오빠가 싫다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녀는 그 뒤에 얼른 덧붙였다. 여전히 뚱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서도 나를 생각해서 말해주는 게 여실히 느껴졌다.

아이고, 귀여워라. 보아하니 내가 바스티에를 떠나 에른스트로 돌아가는 게 꼭 나를 유진에게 빼앗기는 기분이라 조금 삐진 모양이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애라니까.

"에른스트에 가도 매일 너 보러 놀러 올 건데?"

"진짜?"

"그럼 넌 나 보러 안 올 거야?"

"아니, 매일 갈 거야!"

루이제는 금방 기분이 풀어졌다. 잠시 후 그녀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하다가 나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아까는 깜짝 놀랐어. 이렇게 직접 보는 건 엄청 오랜만인데 유진 오빠 되게 멋있어졌더라."

루이제는 여전히 유진이 조금 얄밉지만 그래도 인정할 건 인정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처음에 멀리서 언니랑 둘이 서 있는 걸 봤을 때는 모르는 사람인 줄 알았어."

나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가? 난 유진이 그렇게 많이 변했는지 잘 모르겠는데. 물론 전에 비해 많이 자랐구나, 이제는 어른이구나, 하는 느낌은 있지만 몰라볼 정도로 멋있어졌다거나 한 건 잘 모르겠다.

이미 보아온 세월이 있어서 무뎌진 건가. 뭐, 객관적으로 봤을 때 삼 형제 중에 인물이 달리는 사람이 없기는 하지.

나는 왜인지 자식 칭찬을 들은 팔불출 엄마 같은 마음이 되어 그 후에도 한동안 더 이어지는 루이제의 칭찬을 흐뭇하게 들었다.

***

그 후 우리가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 날이 앞당겨졌다.

에른스트에서도 이것저것 준비할 게 많았을 텐데 아무래도 나를 만난 직후 마무리 준비를 서두른 것 같았다. 그래서 카벨과 에리히, 나도 본격적으로 바스티에를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해서 딱히 챙길 것이 많지는 않았다. 어차피 생활하는 데 필요한 전반적인 것은 에른스트에도 마련되어 있을 것이었으므로 각자 가지고 있던 소지품 정도만 챙기면 되었다.

어쨌든 각자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카벨과 에리히도 주말에 시간을 내 학술원에서 돌아왔다.

똑똑.

"잠깐 들어가도 될까?"

저녁 늦은 시간, 누군가 내 방문을 두드렸다. 밖에서 새어 든 것은 요하네스의 목소리였다.

"응, 들어와."

내가 허락의 말을 내뱉자 곧 문이 열렸다.

요하네스가 손에 들고 있는 컵을 들어 올리며 나를 향해 작게 웃었다.

"차 마실래?"

"고마워. 이리 와서 앉아."

모락모락 김을 내는 컵이 두 개인 것을 보니 함께 차를 마시자는 의미였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나도 그를 향해 웃으며 흔쾌히 자리를 권했다.

"아직 정리 중이었어?"

"아니, 정리는 이미 다 끝내서 지금은 그냥 한 번 둘러보는 중이었어."

내가 가져갈 짐은 별로 없었는데도 기분 탓인지 방이 전보다 휑해진 것 같았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은 요하네스가 잠시 내 방을 둘러보다가 희미한 웃음소리를 내뱉었다.

"네가 처음 여기 올 때가 생각나네."

요하네스 역시도 우리를 떠나보낼 때를 앞에 두고 감회에 젖은 눈치였다. 얼마 전부터는 바스티에 부부도 곧잘 아쉬운 기색을 내비치고는 했다. 루이제는 물론 말할 것도 없었다.

나도 방금 전까지 곧 작별해야 할 이 방을 미묘한 기분으로 둘러보고 있던 참이었다.

"생각해 보면 난 에른스트에서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널 여기에 데려오고 싶었던 것 같아."

요하네스가 옛 추억을 회상하듯 웃음 지었다.

아, 카벨과 싸웠을 때 얘기인가? 나도 처음 그를 보았을 때를 상기하며 픽 웃었다.

"기억나. 카벨 오빠한테 날 달라고 했었지."

그때 카벨과 요하네스가 몸싸움을 벌이기까지 했던 것이 떠올랐다. 어쩌다 카벨이 나를 향해 '쟤는 내 동생 아니야!' 하고 외치자 요하네스는 화를 내며 '그럼 나한테 줘!'라고 말했었다.

크으, 다시 떠올려 보니 참으로 아련하구나. 그때 카벨은 진짜 진상이었지. 요하네스는 그때도 지금처럼 참하고 멋있었고. 물론 예전의 요하네스는 지금보다 수줍수줍한 느낌이었지만.

"처음 네가 이 집에 온 날."

덩달아 옛 기억을 떠올리고 아련해진 나를 뒤로한 채로 요하네스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잇따른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보다 한결 진지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아, 이제부터는 내가 이 아이를 지켜줘야겠구나 하고 생각했어."

컵을 들고 있던 내 손이 허공에서 잠시 멈추었다.

"그때 하리 네가 너무 지치고 슬퍼 보여서 이제부터는 내가 널 웃게 만들어주고 싶다고, 그런 생각도 했었어."

나는 흔들림 없이 고요한 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진심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대답을 바라고 말을 꺼낸 것이 아니라는 듯, 다시금 입을 열었다.

"네가 이곳에 있던 시간이 꽤 긴 것 같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눈 깜짝할 새였던 것 같기도 해."

"6년이 짧은 시간은 아니지."

생각해 보면 6년은 꽤 긴 시간이었다.

"그래, 짧은 시간이 아니야."

아이는 소년이 되고, 소년은 청년이 될 정도의 시간.

"그리고 하리, 네가 에른스트에 있던 시간은 2년이었지."

그리고 요하네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나는 퍼뜩 놀랐다.

"그런데도 너한테는 바스티에보다 에른스트가 집인 거야?"

요하네스는 순수한 의미로 궁금한 것 같았다. 6년간 머물렀던 이곳보다 어릴 때 단 2년 동안만 살았을 뿐인 그곳이 내게 '돌아가야 할 집'인 것인지.

그 순간 '아, 그렇구나' 하는 깨달음이 나를 찾아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