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그 오빠들을 조심해 52화
꽃으로 장식된 모자에 달린 노란 리본이 그의 눈앞에서 너울거렸다. 봄바람에 휩쓸려 다가온 것은, 그녀가 들고 있는 작약의 향내와 섞인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였다.
그 속에서 마침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게 된 하리가 입을 열어 그를 불렀다.
"유진 오빠."
'단언하지 마십시오. 심장을 뛰게 하는 사람은 내일, 아니, 오늘 당장에라도 만날 수 있는 거니까요.'
그 순간, 마차 안에서 들었던 말이 떠오른 것은 어째서일까.
마치 로웬그린이 등 뒤에서 그를 비웃고 있는 것만 같았다.
15. 내 집, 내 가족, 내 것
"유진 오빠."
헤어져 있던 몇 년간 유진의 앞에서 직접 불러 보고 싶었던 그의 이름이었다. 내 입에서 새어 나간 작은 속삭임이 마주한 사람의 귀에도 제대로 도착한 듯했다.
서서히 크게 떠지던 검은 눈동자에 이윽고 놀라움보다 더 큰 경악이 떠올랐다.
"당신이, 아니, 네가 하리라고······?"
유진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도 키가 많이 컸고, 나이가 들면서 완전히 여문 몸은 전에 비할 수 없이 다부져 보였다.
수려한 외모는 여전했지만, 소년에서 청년이 된 얼굴은 전보다 선이 굵어지고 한결 더 남자다워졌다. 목소리도 어릴 때보다 확연히 낮아져 있었다.
언젠가부터 가만히 있어도 서늘함을 풍기게 된 얼굴이 지금은 믿을 수 없는 무언가를 목도한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상태였다.
유진의 뒤에 있던 금발 머리의 남자가 '어린애라더니, 완전히 아가씨잖아!'라고 충격을 받은 듯이 중얼거렸다. 누구인지는 몰라도 유진의 동행인인 모양이었다.
"언니."
방금 전에 멀리서 나를 불렀던 루이제가 쪼르르 다가왔다. 그녀의 뒤에 있던 호위 기사는 그새 루이제에게 많이 시달린 듯 진이 빠져 보였다.
루이제는 내 앞에 있는 유진을 본 뒤 무언가를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아, 혹시······."
그녀도 유진의 얼굴을 알아본 모양이었다. 루이제는 눈썰미가 좋은 편인 것 같았다. 그녀도 바스티에에 찾아온 그를 만난 적이 있었지만, 그것은 꽤 오래전의 일이었는데.
나는 이런 날 유진을 앞에 두고 울고 싶지 않아서 손을 들어 물기가 배인 눈을 문질렀다.
"응, 우리 오빠야."
그 순간 나를 향한 유진의 눈빛이 약간 변했다. 하지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까지는 알 수가 없었다.
"자리를 옮겨서 이야기를 나누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금발 머리 남자가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정리했다.
"그게 좋겠군."
그제야 유진도 방금 전까지의 동요를 가라앉히고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제법 침착하고 냉정하게 느껴졌다.
"손을······."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무심코 나를 향해 손을 내밀다 말고 멈칫했다. 나는 어정쩡하게 들린 그의 왼쪽 팔을 시야에 담았다.
보아하니 우리가 어릴 때 밖으로 외출할 때마다 그랬듯, 내 손을 잡고 이동할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지금 우리 나이에 어울리지 않았다. 유진도 나도 더 이상은 어리지 않았으니까.
나는 손을 잡아주지 않으면 길을 잃을지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었고, 유진도 밖에서 어린 동생을 책임지고 챙겨야 할 어린 소년이 아니었다.
"공작님, 에스코트를 하셔야죠."
금발 머리의 남자가 그런 유진을 보고 '이 사람이 진짜 왜 이래' 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옆에서 속삭인 그의 말에도 유진은 여전히 나한테 쉬이 손을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어중간한 위치에 놓인 그의 손에 주저함이 담긴 것이 느껴졌다.
유진이 이런 문제로 이렇게 갈피를 못 잡고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게 조금 웃겨서 나는 눈가를 만지며 그만 작게 웃어버렸다.
"그냥 손잡아줘.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그렇게 말한 뒤 내가 먼저 유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손끝이 유진에게 닿는 순간 그가 눈에 띄게 흠칫했다. 하지만 마침내 손이 완전히 맞닿았을 때는, 굳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면서도 자신을 붙잡은 내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꽤 이상해 보일 것이 분명했지만 나는 만족스러웠다.
이어서 유진도 손가락을 움직여 내 손을 맞잡았다. 우리 두 사람은 그렇게 손을 붙잡고 자리에서 멈춰 있던 발을 뗐다.
***
그 후 들어오게 된 곳은 근처에 있던 건물이었다.
차와 티 푸드를 비롯해 간단한 음식과 음료를 판매하는 가게는 이야기를 나누기 좋을 정도로 조용했다.
하지만 전망 좋은 창가 쪽에 자리를 잡은 뒤에도 우리 사이에는 말이 오가지 않았다.
유진의 옆에 있던 남자, 그리고 루이제는 눈치 있게 자리를 비켜 준 상태였다. 나는 무심코 여기까지 들고 온 작약 다발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고개를 들자, 맞은편에 앉은 유진이 여전히 굳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어른이 된 유진의 모습을 오랜만에 보니 어쩐지 어색한 감이 없잖아 있었다. 물론 그가 반가웠지만 설마하니 이런 식으로 갑자기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어떻게 지냈어?"
내가 먼저 그를 향해 물었다. 그동안 편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유진이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
그런데 그는 대답이 없었다. 일부러 무시한 건 아닌 것 같았고, 다른 데 신경이 쏠려 미처 내 물음을 듣지 못했거나 무심코 그냥 흘려들은 것 같았다.
"오빠?"
내가 그를 부르자, 그제야 유진이 반응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듯한 그가 이내 약간의 당혹감과 난처함, 그리고 어색함이 뒤섞인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 미안해. 왠지 좀 낯설어서."
그 말을 듣고 아, 그런가 싶었다.
나는 지금보다 더 어른이 된 유진의 모습까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는 아니었으니까.
우리가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한 건 내가 12살일 때였다. 그리고 그마저도 통신석을 통해 본 단편적인 모습뿐이었고.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자란 지금의 내가 서먹할 만도 했다. 나도 오랜만에 본 그에게 약간의 어색함을 느낄 정도였으니.
"나는······ 그냥. 잘 지냈어."
그렇게 말하는 유진의 얼굴은 어느덧 원래의 평정을 거의 되찾은 상태였다.
"넌 어떻게 지냈어?"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는 대신 질문을 되돌렸다.
"바스티에에서 생활하는 데 불편함은 없었어?"
이미 몇 번이나 편지를 통해 묻고 답한 내용이었지만 그는 내 눈을 들여다보며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그런 것처럼, 아마 그 역시도 이렇게 직접 얼굴을 보고 묻고 싶었던 것 같았다.
"응, 없었어."
그런 그의 마음을 알 것 같아서 나는 웃으며 대답해 주었다.
"다들 잘해 주셨어. 항상 많이 신경 써주시고 배려해 주셔서 지내는 동안 불편한 점도 없었고."
아마 그런 것이 있었더라도 유진을 마음 쓰게 하고 싶지 않아 말하지 않았을 터였다. 하지만 바스티에에서의 생활은 정말로 편안했다.
"오빠가 걱정할 만한 일은 하나도 없었어. 처음 바스티에에 갔을 때부터 오늘까지도."
내가 지금 유진의 얼굴을 살피고 안심하는 것처럼 유진 역시 지금의 내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었다. 우리가 바스티에의 보호를 받으며 그곳에서 정말 충분히 잘 지냈다는 사실을.
"다들 우리를 가족처럼 대해 줬어."
나는 바스티에가 우리를 신의와 애정으로 대해 준 사실과 그곳에서의 생활이 편안했다는 사실을 유진에게 말했다. 어린 우리를 그곳에 맡긴 이후 늘 마음 무거워했을 유진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기를 바라며.
유진은 내 말을 가만히 듣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 바스티에와 연락을 주고받을 때마다 너희를 진짜 가족처럼 여긴다는 말을 나한테도 하고는 했어."
그의 목소리는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나직하고 담담했다.
"너희들의 소식을 전해 들으면서 내 생각보다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안심이었고······ 그래, 바스티에가 너희를 가족처럼 대우해 준다는 건 내게도 무척 고마운 일이지."
하지만 기분 탓인지 내 귀에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마치 제 안의 어떤 흔들림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몇 번인가 농담처럼 앞으로도 너희들과 다 같이 바스티에에서 지내고 싶다는 의사를 표한 적이 있었는데, 내 생각에는 마냥 농담인 건 아닌 것 같아."
나는 여전히 서늘하게까지 느껴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잇는 그를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혹시 지금 생활이 좋으면······."
거기까지 말한 뒤, 유진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몰랐겠지만······ 나는 지금의 그가 이 뒤의 말을 하고 싶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 오빠가 그랬었지."
나는 그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 뒤의 말을 덧붙이기 전에 입을 열었다.
"우리를 꼭 데리러 오겠다고."
그날의 기억은 까마득할 정도로 아주 오래된 것 같기도 하고, 또는 바로 어제 있던 일처럼 지독히 생생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매일 오빠를 기다렸어."
어쨌든 그날 유진이 우리에게 했던 약속을 나는 단 하루도 잊어본 적이 없었다.
내 조용한 음성에 굳게 다물어져 있던 유진의 입이 다시금 떼어졌다.
"정리가 끝나면 바로 갈 생각이었어. 늦어져서 미안해."
나는 그를 책망하고 싶은 것이 아니었는데, 유진은 내 말을 다르게 받아들인 듯했다. 방금 전 그가 하려던 말도 그렇고 어쩜 이렇게 바보 같은 사람인지 모르겠다.
지금 유진은 자신이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날로부터 너무 긴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가 에른스트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편지 속의 유진은 차라리 좀 더 솔직했다. 나는 그가 다시 예전처럼 에른스트에서 가족들과 다 함께 모여 사는 것을 얼마나 간절히 바라는지 알고 있었다.
그에게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고민하며 나는 말을 이었다.
"우리가 통신석으로 연락하지 않게 된 게 4년 전이던가? 그래서 이렇게 얼굴을 보게 된 건 엄청 오랜만이지."
물론 편지 속에서도 유진은 언제나 우리를 책임지고 돌봐야 할 완전한 보호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도 아주 가끔은 자신의 약한 모습을 내비칠 때가 있었다.
우리가 유진을 바스티에에 오지 못하게 하고 또 통신석으로 먼저 연락하는 것을 멈춘 이유는 그를 무리하게 만들고 싶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사실 유진이 먼저 우리를 보고자 했다면 그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진도 4년 전부터 우리를 만나러 오거나 통신석으로 먼저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에 보내온 편지 속에서 그는 '너희를 보면 내가 약해지는 것 같아'라고 말했다. 단지 종이 위의 글자일 뿐인데도, 그 문장에서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무수한 감정이 배어 나오는 것만 같았다.
"보고 싶었어, 유진 오빠."
나는 그에게 할 말을 고민하는 것을 포기했다.
사실은 그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좀 더 차근차근 지금의 내 생각을 말할 수 있다면 이보다는 설득력 있게 마음을 전할 수 있을 텐데.
"나는 늘 오빠가 있는 에른스트로 돌아가고 싶었어."
하지만 무리였다.
지난겨울, 바스티에 부부로부터 이제 곧 에른스트로 돌아갈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가 얼마나 기뻤는지.
또 얼마 전 마침내 그 기념적인 날이 대략 정해졌을 때 내가 얼마나 가슴 벅찬 행복을 느꼈는지.
그리고 이렇게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지금 내가 얼마나 힘겹게 눈물을 참아 내고 있는지 유진은 몰랐다.
"그 마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어."
그와 함께 있고 싶다.
그것만이 지금의 나를 가득 채우고 있는 생각이었다.
"고마워. 약속을 지켜 줘서."
나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다. 그날의 약속을 잊지 않고 나를 다시 데리러 와 줘서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