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그 오빠들을 조심해 51화
이러나저러나 해도 로웬그린은 유능했기 때문에 일단 한 번 집중하기 시작하자 옆에 쌓여 있던 일거리도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로웬그린의 눈길이 슬쩍 마주 앉은 사람에게 향했다.
그의 상사인 유진 에른스트는 아까부터 고개 한 번 들지 않고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평소에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양반이 이렇게 마차 안에서 업무를 보면서까지 굳이 시간 내서 외출한 이유를 생각하자 절로 기분이 복잡 미묘해졌다.
"공작님도 참 대단하십니다. 이렇게 공사다망하신 와중에도 동생분들 선물을 직접 고르러 가시고."
비꼬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평소에 피도 눈물도 없이 냉철하다 소문난 젊은 에른스트 공작이 동생들에 관한 일에서만큼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헌신적인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놀라웠을 뿐이다.
없는 시간을 쪼개서 그들에게 보낼 선물을 사러 간다거나, 동생에게 온 편지에 때마다 잊지 않고 답장을 보낸다거나 하는 일이 그랬다.
특히 유진은 여동생의 선물에 아주 공을 들였다. 척 보기에 여자아이들 선물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는 티가 났다.
한번은 로웬그린에게 '어린 여자애들은 도대체 뭘 좋아하지?'라고 심각하게 물었다가 그를 사레들리게 한 적도 있었다.
"이제 옷이나 구두 같은 것 말고 다른 선물은 어떠십니까?"
대대로 황실의 검이자 방패였던 에른스트였다. 그런데 그 에른스트에서도, 특히나 승계 이후 아를란타에 무수한 피를 뿌려 온 현 에른스트 공작에게서 설마 이런 사람다운 면모를 찾을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전부터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만 한창 성장기니까 선물을 받고 곤란한 일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그런가? 몇 년 전에 비해 그렇게 많이 자랐을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서."
"원래 애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크니까요."
로웬그린이 처음 유진을 만났을 때만 해도 그는 아직 앳된 티가 남은 소년이었다.
그 당시의 로웬그린은 황실과 손을 잡고 악신이라도 든 양 귀족들을 일망타진하기 시작한 유진 에른스트를 보고 '어린놈이 참으로 독하기도 하지'라며 혀를 찼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두 눈에 독기를 품고 제 일가친척까지 모조리 쳐내려 하는데, 그 모습을 보고 질린 기분이 들지 않는 게 더 이상했다.
물론 지금의 로웬그린은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유진의 옆에서 그를 지켜봐 왔고, 또 그러는 사이 항간에서 떠도는 에른스트의 역사를 들으며 유진이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로웬그린은 오늘도 동생들의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확연히 부드러워진 유진의 얼굴을 보며 남몰래 혀를 찼다. 저런 모습은 5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약혼녀분과 친목 도모 겸 식사라도 한 번 하시죠."
"한동안은 바쁘니 나중에."
하지만 화제가 바뀌자마자 유진은 금세 로웬그린과의 대화에 흥미를 잃은 듯 보였다. 서늘한 무표정의 얼굴이 다시금 무릎 위에 올려진 종이로 향했다.
유진의 성격상 약혼녀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을 리 없었지만 어차피 딱 거기까지의 선이었다. 로웬그린은 처음 만났을 때의 앳된 구석이라곤 남아 있지 않은 유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겠냐니, 무엇이?"
"얼굴 한 번 직접 본 적 없는 사람과 약혼하고 결혼해서 평생을 같이 살아도 괜찮으시겠냐는 말입니다."
괜한 오지랖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미운 정도 정이라는 말이 맞는지,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찜찜해서 입을 가만히 두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역시나 유진은 그의 말이 가렵지도 않다는 듯 건조하게 대답했다.
"이 바닥에서는 그런 결혼이 보편적이지. 평범한 일을 특이한 듯이 말하지 마."
로웬그린은 이번에도 이어질 대답을 뻔히 짐작하면서도 굳이 또 다른 질문을 꺼냈다.
"그럼 동생분들도 정략혼 시키시려고요?"
"동생들이 왜 그래야 하지?"
방금 전 자신이 한 말과 모순된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진은 대번에 부정했다.
"그게 보편적이라고 방금 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그 애들까지 그런 의무를 져야 할 이유는 없어."
마치 단 한 번도 고민해 본 적 없던 사실을 읊는 듯한 말투였다.
로웬그린이 생각할 때 아마도 유진은 동생들이 마음에 둔 사람이 허드렛일을 하는 하녀나 하인, 또는 지금 이 마차를 끌고 있는 마부나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농가의 사람이라 해도 반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러니 옆에서 그런 유진을 지켜보는 입장으로서는 속이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은 당신의 행복에만 너무 엄격한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로웬그린이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 와중에도 서류에 사인을 하고 있던 유진의 손이 우뚝 멈추었다.
[어떤 선택이든 유진 오빠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문득 예전에 하리가 그에게 보냈던 편지 속의 한 문장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유진은 그 말을 잠시 동안 곱씹어 생각하다가 이내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애초에 내 행복은 결혼에 무게를 두고 있지 않으니 상관없어."
그런 말을 편지에 적어 보냈던 하리의 염려가 무엇인지도 알고, 또 방금 전 로웬그린이 그에게 이런 말을 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자신이 희생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하는 모든 일은, 오로지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위한 일이었으므로.
"어차피 달리 마음에 두고 있는 상대도 없고, 그렇다면 최선의 선택을 할 뿐이야."
그것을 위해서라면 애정 없는 결혼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의 소중한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편안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게 된다면.
"글쎄요. 그렇게 단언하지 마십시오."
하지만 로웬그린은 그런 유진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심장을 뛰게 하는 사람은 내일, 아니, 오늘 당장에라도 만날 수 있는 거니까요."
그의 목소리는 확언하듯 단호했다. 그러나 유진은 로웬그린의 말을 듣고 실소할 뿐이었다.
"왜 웃으십니까? 이래 봬도 인생 선배의 조언이니 새겨들으셔도 좋습니다."
"잡담할 시간이 있으면 일이나 해."
"마차 멀미가······."
"초과 수당도 같이 토해야 할 텐데."
"일하겠습니다."
잠시 후, 마차가 목적지에서 멈추어 섰다.
그새 핼쑥해진 로웬그린이 먼저 마차에서 내려섰다. 유진은 그래도 이동하는 동안 업무를 마무리해서 꽤 만족스러운 기분이었다.
"어디로 가실 겁니까?"
로웬그린의 물음에 유진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귀족을 상대로 한 온갖 상점들이 즐비한 거리이기 때문인지 주위에는 호화로운 간판을 단 건물이 많았다.
이번 선물은 아주 특별했기 때문에 특히 고민이 되었다. 당연했다. 동생들을 에른스트에 다시 맞이하게 된 날을 위한 선물이었으니까.
"이쪽으로."
마침내 유진은 결정을 내리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사실 카벨과 에리히의 선물은 이미 정해 두었으나 하리에게 줄 것이 마땅치 않던 참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하리가 그에게 보냈던 편지 속의 내용을 되새겨 떠올려 본 뒤 가까스로 마음을 정할 수 있었다.
"응? 어디서 꽃향기가 나는 것 같네요."
"꽃향기라고?"
"예. 그러고 보니 오늘 꽃 시장이 열린다는 것 같기도 했는데······."
로웬그린의 말을 듣고 유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과연 그의 말처럼 어디에선가 은은한 꽃향기가 흘러드는 것 같았다.
그런가. 벌써 봄이구나.
비어 있던 에른스트가 다시금 예전의 생기를 되찾을 날도 이제는 정말 머지않은 것이다.
"앗."
어울리지도 않는 감상에 젖어 있던 탓일까. 유진은 그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을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오가는 이들이 많아 시끄러운 거리임에도 턱 밑에서 들린 짤막한 음성이 유독 선연했다.
몸이 부딪치는 순간, 그는 반사적으로 맞닿은 사람의 팔을 움켜잡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풍이 불었던 그의 눈동자는 이미 그 어느 때보다 싸늘하게 굳은 뒤였다.
그는 몇 년 전의 습격 이후로 일면식조차 없는 타인이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는 것을 허용해 본 적이 없었다. 아직도 그의 몸에는 그 당시 칼에 찔려 입은 흉터가 남아 있었다.
어찌 보면 그것이 이 질긴 싸움의 끝을 알리는 마지막 발악이었다. 그러나 앞으로의 혹시 모를 위험 한 자락이라도 용납할 수가 없어서 4년이라는 시간을 더 들인 것이었다.
이제부터 그의 가족들이 살아가게 될 세상은 조금의 위협조차 없는 안전한 곳이어야 했기 때문에.
방심했구나.
유진은 스스로의 실수를 날카롭게 책했다.
비어 있던 에른스트에 곧 가족들을 맞는다는 기대로 들떠서 마음을 너무 놔 버렸다. 만약 지금 부딪힌 사람이 그의 목숨을 노리고 다가온 자였다면 위험했을 것이 자명했다.
유진은 저도 모르게 마주한 사람의 팔을 더욱 꽉 움켜잡았다. 하지만 지금 그의 앞에 있는 것은 보통의 평범한 여자였다.
꽃으로 장식한 모자에 가려져 입매와 턱 언저리만 보일 뿐이었지만, 작게 벌어진 붉은 입술이 당혹감을 표출하고 있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여인, 혹은 소녀의 손에 들린 것도 그를 해치기 위한 무기가 아니라 곱게 다듬어진 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유진은 바닥에 떨어진 몇 송이의 꽃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의 손에 잡혀 있던 팔이 확연히 경직되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그는 다소 무례할 정도로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있었다. 한 손에 잡힐 만큼 가느다란 팔을 보니 그의 악력에 어느 정도 통증을 느끼고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아, 죄송합니다. 부디 결례를 용서하시길."
그 사실을 깨달은 직후, 유진은 곧바로 잡고 있던 팔을 놓았다.
뜻하지 못한 접촉에 당황해 그런 것이었지만 아마도 그것은 상대방 역시 마찬가지일 터였다.
"미처 앞에 계신 것을 발견하지 못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그가 거듭 사과하자 꽃을 안고 있던 하얀 손이 움찔 떨렸다. 아무래도 본의 아니게 겁을 준 것 같아 곤혹스러운 기분이 들기도 했다.
제대로 보니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자 아래로 은색의 머리카락이 하늘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을 본 순간 유진의 얼굴에 서려 있던 날카로움이 약간 덜어졌다.
물론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은 이보다 훨씬 어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쨌든 마주한 사람에게서 그가 몇 년간 그리워했던 사람과 비슷한 점을 찾게 되자 방금 전보다 마음이 풀어진 것도 사실이었다.
"떨어진 꽃은 배상을······."
"하리 언니!"
하지만 뒤이어 그의 귀를 파고든 목소리에 유진은 말을 이을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앞에 선 소녀가 방금 전의 부름에 작게 반응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라는 것처럼.
"······하리?"
무의식중에 그 이름을 입 밖에 내놓고 유진은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스스로를 조소했다.
당연하지 않은가?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가 알고 있는 하리일 리는 없었으니까.
그야, 그의 여동생은 이보다 훨씬 어리고 또 작은······.
그러나 그런 생각은 다음 순간 머릿속에서 흔적조차 없이 부스러져 버렸다.
마주한 사람이 마침내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기 때문에.
그 순간······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물기를 머금은 자색 눈동자가 굳어 있는 그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시야에 닿은 갸름한 얼굴이 낯설었지만 그 이목구비만큼은 기억 속의 것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당황스러웠다.
유진의 눈이 서서히 크게 떠졌다.
어느덧 어린 티를 완전히 벗어버린 소녀의 얼굴은 작지 않은 충격이 되어 유진의 가슴에 급격한 동요를 일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