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그 오빠들을 조심해 50화
다행히도 저런 내용의 편지를 몇 번인가 보내자 카벨도 말귀를 알아먹는 눈치였다. 물론 다음 성적은 어떨지 시험을 봐야 알겠지만 그래도 일단은 공부할 의욕이 생긴 것 같아 다행이었다.
"이제 진짜 봄이네."
나는 카벨에게 보낼 편지를 봉한 뒤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밖에는 분홍색 꽃잎이 흰 눈송이처럼 점점이 흩날리고 있었다.
창문 밖에서 솔솔 불어오는 따스한 봄바람을 만끽하며 이번에는 유진에게 쓰는 편지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요즘은 날씨가 포근해서 산책을 나가기에도 좋은 것 같아. 그래도 밤에는 잊지 말고 꼭 창문을 닫고 자야 해. 일교차가 커서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까. 그렇지 않아도 오빠는 하는 일도 많고 바쁜데 몸까지 아프면 안 되잖아.]
크흠, 유진에게 보내는 편지와 카벨에게 보내는 편지의 온도가 많이 다른 것 같다고? 기, 기분 탓일 거다. 아마도.
[ps. 다시 만나는 날을 언제나 기다리고 있어.]
마지막 문장을 써넣은 뒤 나는 잉크가 빨리 마르도록 종이를 흔들었다.
지난겨울에 처음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우리가 에른스트에 돌아가기로 결정된 시기는 올봄이었다. 그러니 이제는 정말 그와 만나게 될 날도 머지않은 것이다.
나는 아직 정확한 날짜조차 잡히지 않은 그날이 벌써부터 기다려졌다.
"언니, 나랑 밖에 나가자!"
알버트에게 오늘 부칠 편지를 건네주고 뒤돌아서는데 루이제가 갑자기 기둥 뒤에서 툭 튀어나왔다.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고 있었다.
"지금?"
"응! 엄마 오시기 전에 꽃 시장 안 가 볼래?"
아, 그러고 보니 오늘 꽃 시장이 열린다고 했던가. 플로라 부인이 어제 들려준 이야기에 루이제도 호기심이 생긴 게 분명했다.
뭐, 잠깐이니까 알버트에게 말하고 나가면 괜찮겠지.
"그래. 대신 오늘은 진짜 꽃 시장만 가는 거야, 알겠지?"
"와아!"
곧바로 우리는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언니, 잠깐 이리 좀 와 봐."
그런데 루이제는 오늘따라 들뜬 기색이었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가 보니 몇몇 하녀와 함께 무어라 작당 모의를 하고 있는 루이제가 보였다.
"언니랑 나랑 맞춰서 꾸미고 나가자! 친자매처럼! 단짝 친구처럼! 마리안이 그러는데 요즘 유행이라고 하더라!"
"뭘 어떻게 하려는 건데?"
"언니는 그냥 가만히 있으면 돼."
봄이라 그런지 루이제는 깜짝 외출에 유독 신이 난 눈치여서 나도 그냥 그녀의 어리광에 져 주고 말았다.
평소 손재주가 좋은 하녀가 루이제와 내 머리를 만져 주었다.
오늘은 머리카락을 양옆으로 조금씩 땋아서 동그랗게 말아 올린 머리 모양이었다. 루이제도 나와 똑같았다.
그 후 우리는 색색의 꽃으로 장식한 챙이 넓은 모자를 썼다. 도대체 뭘 어떻게 맞춰서 꾸미자는 건지 궁금했는데 루이제는 이 정도로 만족하는 기색이었다.
옷까지 맞춰 입기에는 평소 우리 둘의 취향이 좀 갈려서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둘 다 전반적으로 흰색에 금색으로 포인트가 들어간 원피스를 입었다.
다른 때보다 다소 화려한 게 아닌가 싶었지만 봄이기도 하고, 또 루이제가 이 정도는 하나도 과하지 않다고 야단을 부려서 결국은 이 상태로 외출하기로 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오늘따라 두 분 모두 봄처럼 화사하십니다."
친자매처럼 사이좋게 팔짱을 끼고 문을 나서는 우리를 집사 알버트가 웃으며 배웅해 주었다. 우리도 그의 칭찬에 기분이 좋아져서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마차에서도 루이제는 내내 들뜬 기색이었다. 기분이 밝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꽃 시장이라고 해봤자 평소 우리가 들르던 번화가의 거리에서 열릴 예정이었기 때문에 가는 길이 익숙했다.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해 마차가 멈추어 섰다.
나는 문 앞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사람을 향해 웃어주었다.
"고마워요, 체셔 경."
그는 우리의 호위로 따라온 기사였다. 내 인사에 그의 뺨이 슬쩍 붉어졌다.
그것을 보고 나는 내심 감동했다.
크으, 아무래도 내 미모가 슬슬 돌아오는 모양이다.
물론 내 미모에 물이 올랐던 건 지난 생이니까 '돌아왔다'고 하는 건 좀 말이 안 되긴 했다.
하지만 다시 7살로 되돌아가는 바람에 지금까지의 내 기다림이 장장 몇 년이었던가. 이제 한 1, 2년만 더 지나면 내 미모의 역사는 본격적으로 시작되겠지. 빨리 와라, 그날이여!
"와아! 벌써부터 꽃 냄새가 나는 것 같아!"
과연 루이제의 말처럼 공기 중에 은은한 꽃향기가 스며있는 것 같았다. 꽃 시장이 정오부터 열린다고 했으니 아마 지금쯤이면 한창 손님을 맞고 있을 터다.
우리는 그곳을 향해 함께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도착한 곳에는 그야말로 봄을 한데 모아 놓은 듯한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색색의 화사한 꽃들이 진열된 모습은 가히 장관이었다.
"루이제, 너무 멀리까지는 가지 마."
"알았어!"
봄이기 때문인지 제철을 맞은 꽃을 사러 시장을 찾은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잠시 주위를 살피다가 어느 한 곳에 멈춰 서고 말았다.
붉은색과 연분홍색, 그리고 흰색이 섞여 있는 작약이 무척 탐스럽고 예뻤다.
크으, 이건 안 살 수가 없다! 결국 나는 충동적으로 작약을 한 아름 구입했다. 그런데 주인아주머니가 덤을 너무 많이 줬다. 마차까지 잘 안고 가지 않으면 흘리겠는데?
"제가 들어드릴까요?"
"괜찮아요. 루이제랑 나눠 들면 되니까요."
자네는 무슨 일이 있을 때 우리를 지켜 줘야 할 사람이 아닙니까? 그런데 꽃을 들고 있으면 안 되지.
나는 웃는 낯으로 호위 기사의 청을 거절한 뒤 루이제를 찾았다.
그런데 이 아가씨가 어디로 갔는지, 도통 눈에 보이지를 않는 것이었다.
끄응, 왜인지 이럴 거 같아서 아까도 멀리 가지 말라고 미리 당부했던 건데. 하지만 루이제에게도 그녀를 호위하는 기사가 붙어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별로 걱정되지는 않았다.
"루이제 아가씨가 저쪽으로 가시는 걸 봤습니다."
기사의 말을 따라 나는 꽃 시장을 가로질렀다. 조금 더 걷자 평소 우리가 쇼핑하던 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흑, 루이제. 오늘은 분명 꽃 시장에만 들렀다가 돌아갈 거라고 했는데 왜 이쪽으로 온 거야? 혹시 길을 잃은 건······ 아니겠지?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인 데다가 여기는 예전에도 우리가 종종 와 봤던 곳이기도 하니까. 그럼 역시 사고 싶은 거나 구경하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건가?
길이 엇갈릴 수도 있으니 일단 마차로 가 있는 게 나을까 싶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앗."
아무래도 마음이 앞서 내가 부주의했던 모양이다. 나는 미처 앞에 있던 사람을 발견하지 못해 그만 정면에서 몸을 부딪치고 말았다.
후두둑.
그 바람에 품에 안고 있던 꽃이 흘러넘쳐 몇 송이가 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순간 균형을 잃었지만 나와 부딪힌 사람이 반사적으로 팔을 붙잡아줘서 다행히 뒤로 넘어지지는 않았다.
으억, 이럴 때는 원래 호위 기사님이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아까부터 왠지 좀 미덥지 못하기는 했는데!
나는 앞에서 나를 잡아준 사람에게 고맙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차마 아무런 말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그대로 숨을 멈추고 말았다.
머리 위에서 울린 나직하고도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로 흘러드는 것과 동시에,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 죄송합니다. 부디 결례를 용서하시길."
내가 굳은 이유를 다르게 해석했는지 곧 팔을 붙들고 있던 손이 떨어졌다. 그 직후 다시금 정중하면서도 건조한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미처 앞에 계신 것을 발견하지 못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꽃을 안고 있는 내 손이 동요를 감추지 못해 움찔 떨렸다. 고개를 약간 숙이고 있는 데다 오늘은 챙이 넓은 모자까지 썼기 때문에 마주한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방금 전 들은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아, 어떡하지······?
나는 크게 술렁이기 시작하는 가슴을 안은 채 가까스로 얕은 숨을 입 밖으로 내쉬었다.
"떨어진 꽃은 배상을······."
"하리 언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 순간 내 앞에 있던 사람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방금 전과 달라졌다. 그의 목소리도 더 이어지는 법 없이 일시에 멈추었다.
나는······.
그와 다시 만나게 되는 날을 그동안 수도 없이 상상했다.
다시 만나게 되면 웃어줘야지.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더없이 환하게 웃어줘야지.
그리고 보고 싶었다고. 그동안 혼자서 고생 많았다고.
이제는 헤어지는 일 없이 같이 있자고······.
그렇게 말해줘야지, 하고 생각했는데.
"하리······?"
하지만 설마 이렇게 아무 말도 못 하고 바보같이 눈물이 나 버릴 줄은 몰랐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속삭이는 음성이 내 귓가에 날아들었다. 실로 오랜만에 그의 입으로 직접 불리는 내 이름은 놀라울 정도로 정겨운 느낌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눈물을 참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6년 전과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완연한 어른이 된 유진을 마주했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한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 얼굴을 그 안에 온전히 담아내고 있었다.
그동안 속으로 꾹꾹 억눌러 왔던 감정들이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마치 기다렸다는 듯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너무도 그리웠던 사람의 이름을 겨우 소리 내 불렀다.
"유진 오빠."
14.5 그 오빠, 유진
"인간적으로 이번 분기에는 추가 수당을 더 얹어주셔야 합니다."
움직이는 마차 안에서 로웬그린은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그의 목소리는 불만과 회의감, 그리고 체념으로 범벅되어 있었다.
"퇴근 시간을 칼 같이 지켜 주시는 것도 아니면서 마차 안에서까지 일을 시키다니, 정말 너무하신 것 아닙니까?"
그는 5년 전부터 에른스트 공작의 보좌를 맡은 로웬그린 스왈로츠였다.
하지만 그의 원망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은 오늘도 무정했다.
"누가 들으면 내가 악덕 고용주인 줄 알겠군."
맞은편에 앉은 로웬그린의 상사는 투덜거리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말했다.
"지난 5년간 근무 외 수당에 보너스까지 한 번도 잊지 않고 챙겨 준 거로 기억하는데."
물론 그건 그랬다. 특히 에른스트 공작은 로웬그린의 능력을 꽤 높게 보고 있는 편이어서 추가 수당과 보너스에 단 한 번도 인색하게 군 적이 없었다.
"게다가 받은 만큼 일한다고 한 건 본인 아니었나? 그럼 마땅히 밥값을 해야지."
크윽, 돈에 넘어가지만 않았어도!
로웬그린은 멍청했던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쳤다.
비록 그가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고 있다고는 하나, 가장 중요한 복지가 이 모양 이 꼴인 줄 알았더라면 절대로 그때 계약서에 사인하지 않았을······ 리는 사실 없었다.
그러기에 로웬그린은 대단히 속물적이고, 지금 그가 일하는 대가로 받고 있는 돈은 헉 소리가 날 정도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보면 결국은 자업자득인 꼴이었다.
"말은 입으로 하는데, 손이 왜 놀고 있지?"
그 와중에도 젊은 에른스트 공작은 부하 직원의 태만을 가차 없이 지적했다. 자신의 보좌관이 신세 한탄을 하며 좌절하든 말든 일만 제대로 하면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 야박함에 로웬그린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 마차 멀미가 있단 말입니다."
"초과 수당 건은 알테에게 미리 말해뒀어."
"평생 모시겠습니다."
그래, 원래 돈은 젊을 때 개처럼 벌어두는 거라고 했다. 노후 자금, 안심 보장! 이대로 퇴직할 때까지만 뼈를 묻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