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그 오빠들을 조심해 48화
거참, 둘 다 귀엽기도 하지. 6년이란 세월이 확실히 짧았던 건 아닌가 보다. 저 새침한 두 사람이 저렇게 티격태격할 정도로 친해진 걸 보면.
나는 계단을 올라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카벨은 아침 일찍부터 연무장에 가서 감감무소식이었고, 요하네스는 서재에서 책을 보고 있었다. 에리히와 루이제는 아래층에서 페니와 놀고 있는 데다 바스티에 부부도 외출했기 때문에 저택은 조용했다.
"피아노를 연습하러 가십니까, 하리 아가씨?"
"알버트."
그때, 내 눈앞에 외알 안경을 낀 백발의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는 노인이라고 부르기에 미안할 정도로 정정한 신사였다. 그는 바스티에의 집사로, 이름은 알버트였다.
에른스트에 있는 우리 집사는 이름이 휴버트였는데, 이름만 들으면 꼭 한 세트 같다. 혹시 집사들의 이름은 원래 다 이렇게 비슷한 걸까? 음, 그럴 리가 없지.
"피아노 소리가 전보다 탁하다고 하셔서 오전에 조율사를 불러 해결했습니다."
"아, 벌써요? 빠르네요."
"예. 그리고 청소는 방금 전에 끝냈으니 마음 편히 계셔도 됩니다."
"고마워요, 알버트."
그 집사, 유능!
나는 알버트의 빠릿빠릿함에 새삼 감탄했다.
피아노 소리도 어제 루이제가 지나가듯 한번 말한 것뿐인데 이렇게 금방 해결되다니. 크으, 전부터 느꼈지만 알버트의 신속, 정확함은 너무나 대단한 것.
우리 집사인 휴버트도 물론 유능했지만 알버트는 그보다 좀 더 노련하다고 해야 하나, 경험치가 좀 더 많다고 해야 하나.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며 피아노 방의 문을 열었다.
바스티에에 온 뒤부터 나는 루이제와 함께 레이디의 기본 소양을 공부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악기도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는 가정교사에게 일주일에 두 번씩 피아노를 배웠다.
우리의 가정교사인 플로라 부인은 다정다감하고 상냥한 귀부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루이제와 나에게 좀 서툰 부분이 있어도 답답해하거나 채근하지 않고 하나씩 차근차근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참, 바스티에에 와서 알았는데 원래 가정교사에게 체벌을 받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더라!
아이들을 교육하는 입장에서 모자람이 있다는 이유로 체벌을 가하는 것은 귀부인에게 엄청난 불명예라고 했다. 게다가 더 나아가, 가정교사의 자격을 박탈할 만한 낯부끄러운 일이라고도 들었다.
그 사실을 알고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얼얼함을 느꼈다.
멤마 부인, 그 망할 아줌마······!
지난 생에도 그렇고, 이번에도 그렇고, 그럼 그동안 내가 다리에 불이 나도록 회초리질을 당한 건 뭐야!
크흑, 뭐긴 뭐겠는가? 완전히 호구 잡혔던 거지!
뒷골목에서 살다 와서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한 계집애가 얼마나 만만해 보였을까. 게다가 당시 우리의 보호자이던 레놀드 부인까지 그녀를 비호해 주었을 테니, 경멸스러운 천한 계집애 하나쯤은 마음대로 괴롭히기도 쉬웠을 터다.
그 사실을 처음 알게 된 날, 나는 분한 마음에 침대 속에서 밤새 몸부림쳐야만 했다. 적어도 몇 년 정도는 '이불 뻥뻥! 베개 팡팡!'을 할 만한 일이었다.
와, 나도 아직 멀었구나. 그 영악한 아줌마의 말에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순진하게 껌뻑 속아 넘어가다니.
뭐? 체벌을 받는 건 부끄러운 일이니까 다른 사람한테는 숨겨야 한다고? 다른 귀족 영애들도 다들 그렇게 수업을 받는다고? 으아아! 난 왜 바보같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은 거야!
나는 밀려드는 굴욕감과 수치심, 그리고 분노와 억울함에 밤마다 이불을 뻥뻥 걷어찼다.
사실 지난 생에는 개인적인 친분을 다진 또래 귀족 영애도, 귀부인들도 없어서 객관적으로 내 상황을 살펴볼 만한 비교군이 하나도 없었다.
새언니들과도 사이가 나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친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멤마 부인이 나를 속였다는 것도 지금껏 깨닫지 못했다.
어쨌든, 바스티에에서 옷 시중을 들어주던 하녀가 회초리질을 당한 흔적이 남은 내 다리를 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아마 그것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까지도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 테니까.
'뭐? 그 정신 나간 여자가 하리 너한테 체벌이랍시고 회초리질을 했다고?'
그 이야기를 전해 들은 바스티에 부인은 노발대발했다. 평소 온화하던 바스티에 부인이 그 정도로 격렬하게 반응하는 모습은 처음 봐서 솔직히 당황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레놀드 부인에게 맞은 흔적이 남은 내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던 바스티에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그렇기 때문인지 가정교사의 체벌 사실까지 알게 된 바스티에 부인은 분개하는 한편, 나를 더욱 동정하는 눈치였다.
으음, 아마도 그들은 에른스트 부부가 죽은 후 레놀드 부인과 가정교사 등에게 내가 엄청나게 핍박받고 지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뭐,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쿨럭, 물론 그런 말을 해도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라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은 유진이 우리를 이곳에 맡긴 이유를 그제야 더욱 확실히 이해한 눈치였다.
우리가 에른스트를 떠나기 전날 밤. 사실 그때 레놀드 부인을 막아서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면 나는 곧바로 고아원에 끌려갔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그런 상상은 별로 하고 싶지 않지만, 고아원보다 끔찍한 곳에 가게 되었을 수도 있고.
서서히 되감긴 기억이 다시금 그날 밤에 머물렀다. 그러자 건반 위에서 움직이던 내 손도 조금 느려지기 시작했다.
"꽤 어려운 곡인데 능숙하게 잘 치네."
"요한 오빠."
내 상념을 깨뜨린 것은 문가에서 들려온 요하네스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리자 문 옆에 기대 서 있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언제 들어왔어? 왔으면 말하지."
"놀랐으면 미안. 연주가 듣기 좋아서 방해하기 망설여졌어."
요하네스가 설마 노크도 없이 들어왔을 리는 없으니, 내가 다른 생각에 잠겨 있어서 못 들은 게 분명했다.
"나도 전에 배웠던 건데 이렇게 듣는 건 오랜만이네."
"오빠도 이 곡 연주할 줄 알아?"
"응, 조금."
요하네스가 옅게 미소 지으며 피아노 쪽으로 다가왔다.
따단.
길고 단정한 손가락이 건반 위에 내려앉았다. 방금 전 내가 연주했던 음악이 귓가에 울렸다. 나도 요하네스를 따라 왼손을 피아노 위에 올렸다.
곧 그와 내가 같이 만드는 화음이 실내에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피아노 음에서는 연주자의 성격이 드러난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같이 피아노를 배우는 동안 느낀 것이지만 루이제는 씩씩하게 혼자서 질주하는 느낌이었는데. 그래서 같이 연주할 때는 맞추기 어려운 편이기도 했다.
반면 요하네스는 섬세하고 배려 넘치는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 참 그다웠다. 요하네스가 나를 보며 웃어서 나도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때 문밖에서 우당탕탕!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피아노 방이 특히 방음 처리를 꼼꼼히 잘해 둔 것을 생각하자면 참으로 엄청난 소음 공해가 아닐 수 없었다.
우다다다 달려오는 소리가 확연히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하네스와 나는 연주하던 것을 멈추었다.
"너희 뭐 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역시 둘째 진상이었다. 그래도 내가 몇 년간 잘 가르쳐서 이제는 저런 짓도 많이 줄었다 싶었는데 말이지.
카벨은 요하네스가 관련된 일에는 유독 막 나가곤 했다. 도대체 왜 이 두 사람은 조금도 사이가 좋아지지 않는 거냐, 크흑.
"카벨 오빠, 놀랐잖아. 노크는 하고 들어와야지."
내가 둘째 진상을 힐난한 뒤 요하네스도 입을 열었다.
"뭘 하냐니, 눈과 귀 둘 중 하나만 있어도 알 수 있을 텐데."
"애를 불러오라고 시켰으면 얌전히 불러오기만 할 것이지, 왜 또 옆에서 껄떡거리고 있어?!"
음? 날 불러오라고 했다고? 바스티에 부부가 시킨 건가? 그게 아니면 애초에 나를 데리러 요하네스가 오는 것을 카벨이 그냥 놔뒀을 리가 없으니까. 아마도 바스티에 부부가 그새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아무리 내가 노크 소리에 반응하지 않았다고 해도, 아무 목적도 없이 요하네스가 그냥 방문을 열고 들어왔을 리 없었다. 만약 그런 상황에서 내가 아는 그라면 나를 방해하지 않고 그냥 조용히 뒤돌아섰을 터다.
그런데 그런 요하네스에게 껄떡이라니! 이게 무슨 망발이야!
"카벨 오빠, 그냥 같이 피아노 좀 친 거 가지고 껄떡이 뭐야?"
"나랑 쳐, 나랑!"
"오빠는 피아노 안 배웠잖······."
"나도 오늘부터 피아노 배울 거야!"
저 곰 같은 손으로 피아노라니. 그리고 네가 이런 거 재미없다고 때려치운 게 벌써 몇 년 전인데!
하지만 약이 오른 듯한 저 얼굴을 보아하니 이대로 두면 계속 우길 게 분명했다. 그냥 말을 돌리자.
"그런데 왜 날 불러오라고 한 건데?"
"아! 형이 선물 보냈어!"
카벨은 그제야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가 기억난 듯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런 나를 향해 요하네스가 사과했다.
"미안, 좋아하는 피아노곡이라 할 말이 있어서 온 걸 잠시 잊고 있었어."
"아니야, 오빠랑 같이 연주하는 거 재미있었어."
나는 요하네스와 화기애애하게 피아노 방을 나섰다. 옆에는 카벨도 함께였다.
둘째 진상은 지치지도 않고 옆에서 요하네스를 향해 '사기꾼'이라느니, '속이 시꺼먼 놈'이라느니 하며 구시렁거렸다.
그런데도 화 한 번 안 내는 걸 보면 정말이지, 요하네스의 속이 얼마나 넓은 건지 모르겠다. 혹시 바스티에의 대인배 기질은 타고나는 건가?
"하리야, 유진이 선물을 보냈는데 한번 열어보렴."
아래로 내려가자 바스티에 부부가 웃으며 우리를 반겨 주었다.
유진이 이런 식으로 우리에게 선물을 보내는 것은 전부터 종종 있던 일이었다. 나는 내 앞으로 온 큰 상자의 보라색 리본을 풀고 뚜껑을 열었다.
이번 선물은 옷이었다.
척 봐도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연푸른 드레스가 내 손에서 황홀한 물결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것을 들어 몸에 대본 나는 어쩔 수 없이 작게 웃고 말았다.
"어머, 조금 작은 것 같구나."
늦가을부터 내게는 성장기가 찾아왔다. 무릎이 슬슬 쑤시는 느낌이 든다 싶더니 겨울이 온 지금은 전보다 키도 많이 커졌다.
나는 계속 성장이 더디다가 급격히 자라는 경우였다. 그래서 아마 봄까지는 지금보다 키가 최소한 반 뼘 정도는 더 클 것이었다.
"사람을 불러 수선을 해봐야겠다."
그래서 지난겨울에 입던 옷도 전부 지금은 맞지 않아 재단사를 불러 새로 맞춰야 했다. 바스티에 부인은 난처한 듯이 수선을 해 입으면 된다고 했지만 척 보아하니 이건 수선으로 해결될 정도가 아니었다.
"그냥 수선 없이 이대로 제가 가지고 있을래요."
나는 유진의 선물을 지금 상태 그대로 손대지 않고 갖고 싶어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아직 유진은 내가 전보다 많이 자란 걸 모르나 보다. 아마도 다음 봄까지는 계속 클 텐데. 물론 나올 데 나오고 들어갈 데 들어간 늘씬한 미녀가 되려면 좀 더 있어야 하지만.
흐흑, 그날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으니, 아마 그날도 금방 오겠지. 그렇겠지······?
나뿐만 아니라 카벨과 에리히도 유진에게 각각 선물을 받았다.
사실 우리에게 보낼 선물을 직접 고른 건 유진이 아닐지도 몰랐다. 보통 귀족들은 이런 일을 할 때 아랫사람에게 지시를 내리는 편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 해도 좋았다. 우리를 위하는 마음은 이 안에 온전히 담겨 있다는 걸 아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