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그 오빠들을 조심해 47화
"그러다 일이 잘 성사돼서 에른스트랑 연이 닿아도 좋겠고."
"아니어도 그냥 좀 가지고 놀다가······."
"야."
하지만 뒤이어 묵직하게 귀청을 울린 목소리는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굳은 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휴게실의 문을 열자마자 그 앞에 드리워진 거대한 그림자와 곧바로 그들을 직격하는 사나운 기운에 완전히 압도되어서.
"뒈질래?"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는 그리 크지도 않았으나 남학생들은 천둥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흠칫했다.
"카, 카벨······."
그리고 지옥의 신이라도 본 듯한 얼굴이 되어 주춤 뒷걸음질 쳤다.
다음 순간, 카벨의 입매가 비틀어졌다.
"이 새끼들이 지금 죽으려고."
퍼억!
그들에게 곧바로 거친 발길이 날아들었다.
카벨의 발에 차인 학생이 우당탕 테이블 위로 넘어졌다. 방금 전 하리 에른스트를 두고 얼굴이 반반해 마음에 들었다느니, 지금부터 가르쳐서 자기 취향대로 만들겠다느니 하는 소리를 지껄인 남학생이었다.
그다음엔 하리 에른스트의 출신이 비천하니 조금만 잘해 줘도 쉽게 넘어올 것이라고 입을 털었던 남학생의 얼굴에 주먹이 박혔다. 물론 그녀를 그냥 잠깐 가지고 놀 상대 취급한 놈을 후려갈겨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더 짖어 봐. 방금 한 것처럼 내 앞에서도 더 지껄여 보라고."
"커억!"
"내가 요즘 너무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살았지? 그래서 이렇게 겁대가리를 상실한 거지?"
카벨의 말에 그들은 얻어맞으면서도 황당함을 느꼈다.
쥐 죽은 듯이 조용하게 살기는 무슨! 바로 어제만 해도 경영학부의 학생 하나를 반죽음으로 만들어 놨으면서!
"죽고 싶으면 그렇다고 말해. 괜히 복잡하게 자살 방법 찾지 말고."
카벨은 이를 갈면서 방금 전까지 겁 없이 입을 털어 대던 남학생들을 잘근잘근 다져 주기 시작했다.
"너희 같은 새끼들이, 내 동생한테 껄떡거리는 거, 기분 개 더럽거든?"
퍽, 퍼억!
한 마디를 할 때마다 그들의 얼굴에는 시퍼런 멍이 들었고, 터진 입술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내가 날파리까지는 참아도 쓰레기가 꼬이는 것까지는 못 참아."
퍼억!
"예전에 내 동생이 말해줬는데,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야."
퍽, 퍼억!
"그런데 왜 나대서 날 이렇게 짜증 나게 해? 응?"
카벨은 진짜로 짜증이 난 듯, 손에 전혀 사정을 두지 않고 있었다. 방금 전 안에서 그들이 나눈 대화를 듣고 분노한 것이 분명했다.
"내가 이래 봬도 내 가족들만 안 건드리면 얌전한데, 왜 날 가만히 내버려 두지 못해서 안달이냐는 말이야. 응? 나한테 맞는 게 좋아? 그래서 방금도 일부러 내 귀에 들리게 떠든 거야? 응?"
그럴 리가 있겠냐!
그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사, 살려 줘!"
"그래, 잠깐 말이 헛 나온 거야!"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다 세드릭, 이 자식 혼자서!"
하지만 카벨은 이미 그들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또래 중에서도 신체 조건과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카벨이기에 주먹 역시 매서웠다.
게다가 그들은 검술학부도 아닌 데다 곱게만 자란 귀족 자제들이었기에 맷집이 약했다. 더군다나 사는 동안 지금처럼 가차 없이 얻어맞을 일도 없었다.
그때, 그들의 눈앞에 구세주가 나타났다.
"요, 요하네스!"
"뭐야, 설마 말리려고 왔냐?"
카벨의 형형한 눈길이 옆으로 움직여졌다.
아까 전 문밖에서 재수 없게 마주쳐 같이 더러운 소리를 들었던 요하네스였다. 그런데도 말리려고 한다면 아예 같이 밟아줄 생각이었다.
"그럴 리가. 속 시원하게 잘 패기에 가까이에서 보려고 왔는데."
하지만 요하네스는 평소처럼 단정한 얼굴을 한 채로 말했다.
그 말에 카벨에게 얻어맞던 학생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고, 카벨은 눈매를 구겼다.
그래, 평소에는 가증스럽게 토끼인 척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우였지. 뭘 모르는 사람들은 저놈을 착하고 반듯하다고 하지만 귀신은 속여도 난 못 속이지.
물론 카벨은 원래도 요하네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절대 사감이 들어간 생각은 아니었다. 진짜다!
"야, 그런데 저놈을 왜 이렇게 반갑게 불러? 기껏 봐줄 마음을 먹으려고 해도, 이걸 그냥 확!"
"사, 살려 줘!"
애초에 봐줄 마음도 없었던 주제에 그 핑계로 더욱 골고루 패 줬다.
"다른 새끼들한테도 소문내라. 내 동생 건드리면 진짜 죽여 버릴 거라고. 개소리하는 놈들도 마찬가지야!"
카벨의 허락이 떨어진 뒤에야 그들은 저마다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앞다투어 달아났다.
그 후 카벨은 자리에 남은 또 한 명의 날파리에게 경고했다.
"이씨, 야, 너! 하리한테 집적거리지 마!"
하지만 요하네스는 얄미울 정도로 태연한 얼굴로 부정했다.
"집적거린 적 없어."
"웃기지 마! 네가 하는 짓이 집적거리는 게 아니면 뭐야!"
그는 아득 이를 갈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마음에 안 들었지만 갈수록 더했다. 더군다나 이놈이 시꺼먼 속을 숨기고 하리에게 친한 척을 할 때면 얼마나 속이 뒤집히는지 몰랐다.
요하네스가 살기등등한 카벨을 향해 담담히 입을 열었다.
"친절, 배려, 관심, 호의, 애정. 여러 가지 단어가 있는데 하필이면 집적이라니, 네 어휘력이 안타까운데."
"뭐야?!"
카벨은 요하네스의 노골적인 무시에 발끈했다. 그리고 그 직후 묘하게 마음에 걸렸던 어떤 부분에 멈칫했다.
"아니, 그런데 잠깐. 방금 거기에 굉장히 야리꾸리하고 요상한 단어가 껴 있었던 것 같은데?"
방금 전 자신이 들은 말을 곱씹어 생각하던 카벨이 곧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애정? 애에에저엉?"
이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란 말인가?
애정? 애정이라고? 감히 네깟 놈이 하리한테 애에정?
그런데 요하네스는 한술 더 떴다.
"너한테 익숙할 단어로 바꿔 말하면 흑심이라고 해야 할지."
"흐으으윽시이임?!"
"뭐, 네 수준에 맞춰서 설명해 준 것뿐이야."
카벨은 어느 부분에서 어떻게 화를 내야 할지 잠시 헷갈려 하다가 그냥 눈앞에 있는 놈을 작신작신 밟아주기로 했다. 그동안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를 생각하고 고민해 참아 왔지만 오늘은 아니야!
아마 잇따른 요하네스의 말에 멈칫하지만 않았다면 진짜로 그에게 주먹을 날렸을지도 몰랐다.
"예전에는 동생이 아니라고 하더니, 지금은 잘도 내 동생 소리를 하네."
"이······! 그게 언제 적 일인데!"
물론 질풍노도의 시절, 부모님이 어느 날 갑자기 동생이라고 데려온 하리에게 반감을 품은 적도 있었지만······. 그건 다 어릴 때의 일이었다.
솔직히 단순한 성격의 카벨이 누군가를 진심으로 오랫동안 진득하게 미워하기란 어려웠다(물론 지금 눈앞에 있는 요하네스는 논외였다). 게다가 함께 힘든 어린 시절을 거쳐 온 하리를 어떻게 동생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6년 전 부모님의 사후, 홀로 형제들과 떨어져 슈마하 백작가에서 치료를 받다가 마침내 에른스트에 돌아왔을 때. 혹시 형제들이 그를 원망하지 않을까 남모를 두려움을 품고 있던 그를 가장 먼저 맞아준 것은 하리였다.
'어서 와, 카벨 오빠.'
왈칵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곧바로 자리를 박차고 떠났지만 아직도 그날의 일은 카벨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었다.
그 후에도 그들은 울고 웃고 싸우며 수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그러니 이제 와 남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씨, 그런데 이 샌님이 지금 감히 내 흑역사를 들춰?
"어쨌든 다행이네. 지금 너한테 하리는 진짜 그냥 동생인 것 같아서."
"뭐? 이게 지금 뭐라는 거야? 그 말 뭔가 이상한데?"
"네 행동이 모호해서, 혹시 하리를 동생 이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지 갑자기 의심이 들었거든."
"뭐, 뭐······?! 내가 너처럼 속이 시커먼 놈인 줄 알아?! 동생이 동생이지!"
"그래, 그 마음 평생 변하지 말도록 해."
그 후 요하네스는 혼자만 여유로운 태도로 문을 나섰다.
혼자 남은 카벨은 왜인지 모르게 진 것 같은 기분이 되어서 씩씩거렸다.
"형도 참 요하네스한테 지치지도 않고 시비를 건다니까."
요하네스가 떠난 자리에 나타난 것은 카벨의 동생인 에리히였다. 얼굴을 보아하니 그들의 대화를 전부 들은 눈치였다.
"야, 너도 저 자식 말 들었어? 뭔 소리를 저따위로 이상하게 하고 가?"
카벨은 입에서 침을 튀기며 분노를 호소했다.
"내가 자기처럼 하리한테 흑심이라도 품을까 봐? 그게 말이 되냐?"
하지만 에리히는 잠깐 움찔한 뒤 이상하게도 유난히 차가운 어조로 말할 뿐이었다.
"어차피 친동생도 아니잖아."
"그래도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잖아!"
그 후로도 카벨은 한참 동안이나 요하네스의 말이 얼마나 파렴치한지에 대해 토로했다.
비록 피는 안 섞였지만 어릴 때부터 거의 10년이나 같이 살았으니 진짜 동생이나 마찬가지이며, 그런 하리에게 요하네스가 말한 대로의 허튼 마음을 먹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씩씩거리던 카벨은 마주한 에리히의 얼굴을 보고 더욱 신이 나서 외쳤다.
"너도 짜증 나지? 역시 넌 이해할 줄 알았어. 요하네스 저놈이 이상한 거지!"
싸늘하게 굳어져서 짜증을 담고 있는 에리히의 얼굴을 보니, 자신의 말에 공감해 요하네스에게 함께 분노하는 것 같아서 그나마 조금 화가 풀렸다.
하지만 이어진 동생의 말은 예상과 달랐다.
"그러게. 왜 이렇게 형이 짜증 나지?"
"그래, 요하네스 저 자식 진짜······."
카벨은 무심코 맞장구치다가 멈칫했다.
"어, 어, 나?"
그는 어벙하게 되물었다. 하지만 에리히는 다른 말 없이 그냥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
자리에 혼자 남은 카벨은 왜 애꿎은 자신이 동생의 미움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아 그저 어안이 벙벙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13. 당신을 그리워하는 여섯 번째 겨울
학술원의 방학을 맞아 카벨과 에리히, 그리고 요하네스가 바스티에로 돌아왔다. 한동안 조용했던 저택은 전보다 시끌벅적해졌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실내에서 활동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그런 생활을 누구보다 못 참는 건 당연히 둘째 진상이었다.
카벨은 대부분의 시간을 연무장에서 보냈는데, 그렇지 않을 때에는 바스티에의 저택에 버티고 앉아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요하네스를 노려보고는 했다. 물론 요하네스는 여느 때처럼 그런 카벨을 가뿐히 없는 사람 취급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바스티에 부부를 보기가 민망해서 둘째 진상을 살살 구슬려 밖으로 내보내거나 방으로 올려 보냈다.
"페니, 간식 먹자."
"왈왈!"
한편, 에리히가 저택으로 돌아와 가장 신이 난 건 바로 페니였다.
페니는 우리가 에른스트를 떠날 때 같이 바스티에에 오게 되었다. 하지만 학술원까지 데려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학기 중에는 어쩔 수 없이 에리히와 떨어져 지내야 했다.
물론 그러는 동안 바스티에의 사람들과 내가 페니를 정성껏 돌봐주었지만 역시 에리히에게 댈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하긴, 서로의 참사랑이니 당연한가. 큽, 앞으로도 쭈욱 예쁜 사랑 하시길.
나는 훈훈한 두 사람······ 아니, 훈훈한 한 사람과 강아지 한 마리를 보며 흐뭇하게 코 밑을 훑었다.
"루이제, 지금 피아노 방 안 쓸 거야?"
"응, 언니 마음대로 써!"
에리히와 페니를 향해 슬금슬금 다가가는 루이제를 보며 묻자 그녀가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러는 바람에 에리히가 루이제를 돌아보았다. 그 직후 그는 어느덧 가까워진 루이제를 보며 흠칫했다.
"나 페니 배 만질래!"
"네가 페니 배를 왜 만져?"
"내가 좀 만지면 어때서? 오빠가 없을 때 내가 밥도 주고 간식도 주고 산책도 시켜 줬는데! 그리고 오빠가 있을 때만 페니가 나도 배 만지게 해준단 말이야!"
나는 사이좋게 아웅다웅하는 두 사람을 보다가 방금 전보다 두 배는 흐뭇해져서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