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그 오빠들을 조심해 46화
그나마 그를 말릴 수 있는 것은 형인 유진뿐이었지만 그는 역시 훌륭한 인재답게 어렵지 않게 학술원을 조기 졸업했다. 그 후 학술원은 순식간에 카벨의 무법천지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카벨의 앞에 제물로 바쳐졌던 학생들이 몇인지 이제는 셀 수조차 없었다.
다각다각.
그때, 교문 안으로 마차가 한 대 들어섰다. 학생들은 이채가 떠오르는 카벨의 눈을 보고 지금껏 그가 기다렸던 사람이 저기에 타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마침내 부드럽게 미끄러진 마차가 중앙에 멈추어 섰다.
학생들은 그 앞에 버티고 선 카벨을 보며 왜인지 모를 긴장감을 느꼈다. 너도나도 꿀꺽 침을 삼키며 이어지는 카벨의 행동을 주시했다.
덜컹.
하지만 마차의 문이 열리고 거기에서 내려선 것은 그들도 익히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카벨 형."
아, 뭐야. 에리히 에른스트였어?
그는 작년부터 학술원의 중등부에 재학 중인 카벨의 남동생이었다. 어쩐지 참을성 없는 카벨이 웬일로 누군가를 끈기 있게 기다린다 싶더니, 자기 동생이라 그랬나 보다.
하지만 카벨은 동생이 아니라 마차 안에 있는 다른 누군가를 향해 부루퉁하게 말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아, 역시! 이렇게 그냥 넘어가면 미친개의 이름이 울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제 사달이 날 예정인가 보다!
카벨이 마차 쪽으로 손까지 뻗자 그들은 앞으로의 유혈 사태를 예상했다. 이미 어느 학생은 그의 난동을 막을 사람을 부르기 위해 교무처 쪽으로 몸까지 돌리고 있었다.
어라? 그런데 마차 안에서 웬 섬섬옥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햇빛 아래로 나타난 뽀얀 손이 유독 하얗고 작았다. 꽤 오랫동안 검을 잡아 단련된 카벨의 큼지막한 손과 비교하니 더욱 그랬다. 카벨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는 그 손에 학생들의 시선이 날아가 꽂혔다.
"미안."
곧이어 마차 안에서 나온 사람은 웬 가냘파 보이는 소녀였다.
"길이 조금 막혔던 것 같······."
그 사실에 놀랐던 학생들은 그 후 카벨이 보인 행동에 그야말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우오오! 어서 와!"
"잠깐······!"
미친 멍멍이 카벨은 감히 자신을 기다리게 만든 사람을 쥐어 패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격한 환영 인사를 날렸다.
게다가 그는 소녀의 허리를 끌어안다시피 두 손으로 잡아 허공에 빙글빙글 돌리기까지 했다. 그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모두가 멍한 표정을 짓거나 손으로 눈을 비볐다.
헐, 우리가 지금 뭘 보는 거지?
저놈 누구야? 지금 저기에 있는 거 누구야?
저거 카벨 에른스트 아니지? 그치?
학생들은 카벨 에른스트가 저렇게 해맑은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카벨 에른스트에게 '해맑은'이라는 수식어라니!
맹세컨대 그에게 어울리는 단어는 '포악한', '사나운', '난폭한' 같은 것이었다. 이를테면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짐승 같은, 그런······.
"카벨 오빠, 그만 내려 줘."
"우오오!"
"내려 달라고."
"우오오오!"
······그런데 우리가 보고 있는 저 충격적인 장면은 대체 뭐야?
저 사람이 카벨 에른스트의 거죽을 뒤집어쓴 무언가가 아니고서야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광경이 도무지 설명되지 않았다.
그 후로도 한참을 더 빙글빙글 돌던 카벨이 마침내 소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척 봐도 연약해 보이는 소녀가 카벨의 만행에 어지러운지 잠깐 비틀거렸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 있던 에리히가 팔을 뻗어 소녀를 지탱했다.
학생들은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아니, 이럴 수가? 결벽증이라도 있는지 다른 사람한테 닿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에리히 에른스트가 먼저 손을 뻗어서 잡아주기까지 하다니?
"형, 작작 좀 해."
"난 살살 했는데! 얘가 너무 연약해서 그래!"
게다가 그는 자기 형을 힐난하기까지 했다.
그때, 어지러움이 가셨는지 소녀가 카벨을 향해 입을 열었다.
"카벨 오빠, 잘 지냈어?"
"응!"
"밥도 잘 챙겨 먹고?"
"응!"
"친구들이랑 싸우지도 않고?"
"그럼!"
오소소!
그 순간, 그들을 지켜보던 학생들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카벨이 또다시 해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평소의 살기등등한 모습과 달라도 너무 달라서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놀랄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소녀가 겁도 없이 카벨의 머리에 손을 올렸기 때문에.
안 돼!
물릴지도 몰라, 위험해!
개 조심하라고 알려 줬어야 하는데!
그러나 그들이 걱정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카벨은 소녀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즐기듯이 은근슬쩍 고개를 앞으로 밀어주기까지 했다. 게다가 가만히 보니 그의 광대는 이미 승천하다 못해 하늘을 찌를 정도였다.
"헉!"
"흡!"
"히익!"
저건 흑마법이 분명해!
카벨 에른스트의 몸을 빼앗은 악마야! 아니, 오히려 평소 모습이 악마 같으니까 천사라고 해야 하나?
그때, 그들의 시선을 눈치챈 카벨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 그들에게 눈을 부라렸다.
"야, 다들 눈깔아! 내 동생이 쑥스러워하잖아!"
학생들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평소 카벨의 더러운 성격에 하도 많이 데여서 이제는 거의 저절로 몸이 움직여졌다.
"나 잘했지?"
하지만 눈앞에 있는 소녀에게 칭찬해 달라는 듯이 말하는 목소리에 또 한 번 팔뚝에 소름이 돋고 말았다.
"카벨, 학생 기숙사에 이성은 출입 금지인 거 잊었어?"
"요한 오빠!"
이번에는 요하네스 바스티에가 등장했다.
평소에 카벨과 요하네스가 마주치는 것은 학생들 사이에서 비상사태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부딪힌 시선에서 번개가 치고 불길이 이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기류가 보통이 아니었던 것이다.
평소 침착하고 모범적인 요하네스 바스티에였지만, 카벨 에른스트와는 이상하게도 유독 사이가 좋지 않았다.
아니, 그러나 생각해 보면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카벨 에른스트가 화를 부르는 성격인 건 누구나 인정하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요하네스에게 도대체 무슨 억하심정이 있는지, 항상 먼저 시비를 거는 것도 카벨이었고.
문득 마차에서 누군가가 뛰어내려서 보니 요하네스와 매우 닮은 푸른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소녀였다.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얼굴도 좀 닮아 있었다.
그 후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뒤에 내린 소녀 역시 바스티에 가문의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오빠,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미안, 루이제. 나도 미리 나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교수님이 부르셔서."
그럼 앞에서 카벨과 충격적인 장면을 연출한 소녀는 도대체 누구지?
방금 전 카벨이 '내 동생'이라고 외쳤지만 워낙에 정신이 없어서 그런지 그의 말은 학생들의 귀를 그냥 스쳐 지나갔다.
"하리도 어서 와."
요하네스도 그녀를 아는 눈치였다.
그런데 기분 탓일까? 요하네스도 소녀의 앞에서는 평소보다 태도가 부드럽고 다정한 것 같았다.
"먼 길 오느라 힘들지 않았어?"
"아니야,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좋은걸."
그리고 이어서 소녀가 눈꼬리를 휘며 활짝 미소 짓는 순간.
"카벨 오빠도 요한 오빠도 반가워."
여기저기서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는 소리가 울렸다.
"헉!"
방금 전까지는 카벨 에른스트의 기행 때문에 미처 인식하지 못했는데, 하리라는 이름을 가진 소녀는 엄청난 미소녀였다.
그녀가 영롱한 자색의 눈동자에 온기를 품으며 웃는 순간, 불시에 격침당한 가슴이 거세게 울렁거릴 정도였다.
"야, 내가 눈 깔라고 했지?!"
주위의 반응을 눈치 빠르게 포착한 카벨이 눈을 번뜩이며 다시금 매섭게 소리 질렀다.
어디를 봐도 경계심 가득한 그 눈초리에 모두가 방금 전과는 약간 다른 의미로 두 눈을 부릅뜨고 충격에 젖었다.
서, 설마 카벨 에른스트의 여자 친구?
아니겠지? 설마 아니겠지?!
저런 예쁜 여자애가 뭐가 아쉬워서!
그러나 충격과 공포, 그리고 혼돈에 빠진 학생들을 뒤로한 채로 그들은 자리를 떠났다. 그때까지도 카벨은 경고하듯이 남겨진 학생들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
카벨 에른스트와 에리히 에른스트의 여동생이 학술원에 왔다!
소문은 날개 돋친 것처럼 금세 학술원 곳곳에 퍼져 나갔다. 여기저기서 목격자들의 진술이 판을 쳤다.
"오빠, 좀 천천히 걷자."
"발 아파?"
"그건 아닌데 쫓아가기 힘들어서. 오빠 보폭이 크잖아."
"업어줄까?"
투둑. 툭!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소리에 두 사람의 옆을 지나가던 학생들은 손에 들고 있던 책까지 바닥에 떨어뜨렸다.
도저히 방금 전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업어준다고? 누가? 카벨 에른스트가? 누구를? 자기 여동생을? 아니, 물론 아까 전 교문 앞에서 보인 행동을 떠올려 보면 진짜 동생을 업고 다니고도 남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카벨 에른스트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은 변하지 않았다.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그때, 카벨의 옆에 있던 소녀가 그들이 떨어뜨린 책을 손수 주워 주었다.
그 사실에 학생들은 그만 어안이 벙벙해졌다.
카벨 에른스트의 여동생이 나한테 책을 주워 줬어! 만약 카벨 에른스트였다면 책을 사뿐히 지르밟고 갔을 것이요, 에리히 에른스트였다면 깔보는 듯한 시선을 보낸 뒤 콧방귀를 뀌고 그냥 지나갔을 텐데!
"고, 고, 고마······."
하도 당황스러워서 말까지 더듬고 말았다. 그런데도 소녀는 방긋 웃으며 더없이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별말씀을요."
댕, 댕, 대앵!
그 순간 머릿속에서 종이 울린 것 같았다.
카벨 에른스트의 여동생, 하리 에른스트는 아름다운 외모와 마음씨 모두를 가진 천사였다! 어쩜 이렇게 자기 오빠들을 하나도 안 닮았을 수가!
고오오!
"헉!"
"딸꾹!"
바로 그때 앞에서 위압적인 살기가 전해져 왔다. 시선을 돌릴 것도 없이 카벨 에른스트가 그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 그럼 저희는 이만!"
순식간에 눈앞에 보이던 천국의 환영이 지옥으로 뒤바뀌었다.
그들은 부리나케 달아났다. 그리고 방금 전 깨달은 충격적인 사실을 학술원 내에 사방팔방 퍼뜨렸다.
카벨 에른스트, 학술원의 개차반은 엄청난 여동생 바보라고!
***
"그럼 원래는 귀족이 아닌 거야?"
"그렇겠지. 전 에른스트 공작 부부가 죽은 딸이랑 닮아서 데려왔다잖아."
"믿기지가 않아. 아까 보니까 그냥 완전히 귀족 영애 같던데."
"그런데 그 당시 소문이 자자했었다는 걸 보면 진짜인 것 같아."
한바탕 소란스러웠던 하루가 지나고 학생들은 저마다 모여 낮 동안의 일을 속닥거렸다. 기숙사 안에 마련된 휴식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한 무리의 남학생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음에 들더라. 생긴 것도 반반하고."
"뭐야, 너 꽂혔냐?"
"예쁘긴 한데, 아직 좀 어리지 않아?"
그들은 아까 보았던 하리 에른스트를 떠올렸다.
달빛으로 자아낸 듯한 매끄럽고 긴 은발과 오묘한 색채를 발하던 자색 눈동자.
온실 속의 꽃처럼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전체적으로 가냘픈 느낌을 가진 소녀였지.
그런데 은연중에 풍기는 처연한 분위기나, 아직은 앳된 얼굴에 드물게 내비치는 어른스러운 눈빛 같은 것이 묘하게 구미를 당기게 만들었다.
특히 눈꼬리를 접고 웃는 모습은 한순간 저도 모르게 아찔해질 정도로······.
"지금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가르쳐서 내 취향대로 만들면 굉장한 게 나올 것 같아서."
"뭐, 아무리 에른스트라지만 어차피 출신이 그러니까 조금만 잘해 주면 쉽게 넘어오지 않을까?"
그들은 휴식 공간을 나서면서도 계속해서 하리 에른스트의 이야기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