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그 오빠들을 조심해 45화
하지만 그는 상냥하게 웃는 얼굴로 매우 태연하게 카벨의 말에 반문했다. 그, 그렇게 안 생겼는데 의외로 성격이 좀 나쁜 것 같기도······.
진담인지 농담인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후, 후자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마이페이스인 카벨은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눈치였다.
"이제키엘 알피어스라고, 오벨리아에서 유학 왔는데 친구 하나 없기에 내가 친구 먹어줬어!"
저기, 그거 아닌 것 같은데. 누가 봐도 친구를 먹어준 건 네가 아니라 저 사람 같은데?
하지만 카벨은 우리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이어서 그에게 나를 소개했다.
"이쪽은 내 동생!"
"아."
카벨의 말에 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우리는 동지! 척 봐도 그동안 카벨이 엉겨 붙어서 많이 피곤했던 것 같은데요!
이제키엘이라는 사람도 나와 같은 것을 느낀 눈치였다. 우리는 홀로 뿌듯해하는 카벨을 옆에 둔 채로 잠시 눈빛으로 생각을 교환했다.
'이것 참 우리 둘째 진상 때문에 고생이 많으십니다.'
'동생분이야말로 그동안 고생하셨겠습니다.'
그 후 우리는 방금 전보다 한결 친숙해진 느낌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제키엘 알피어스입니다.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리 에른스트예요. 만나서 반가워요."
"평소 카벨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신가요······?"
그 순간 나는 눈매를 꿈틀거리고 말았다.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니? 카벨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한 거지?
하지만 그는 내 의구심 어린 눈빛에 별다른 말없이 그냥 웃음 지을 뿐이었다.
"처음 아를란타에 왔을 때 카벨 덕분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그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도 간혹 들었는데, 저는 외동이라 남매들 간의 우애가 돈독해 보이는 것이 부럽더군요."
아, 맞아. 방금 카벨도 이 사람이 오벨리아에서 왔다고 소개했었지. 와, 그런데 아를란타어 되게 잘하네. 순간 외국인인 걸 잊었을 정도다.
그나저나 아를란타에서는 은발이 그리 희귀한 것이 아니지만 오벨리아에서는 극히 드물다고 들었는데. 에리히나 내가 은발이라 그런지 괜히 친숙한 느낌도 들고 그렇다.
"너도 어릴 때부터 같이 사는 친척 여동생 있다면서? 하긴, 그래도 이 멋진 카벨 님이 부럽긴 하겠지!"
카벨은 옆에서 '들었지? 들었지? 내가 이 정도야!'라는 듯이 콧대가 높아져서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었다. 내 앞에서 멋진 오빠의 모습을 보였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은가 보다.
하지만, 아니야. 둘째 진상아, 지금 그거 뭔가 아닌 것 같아.
그나저나 이런 모습을 보면 역시 친구 먹어준 건 카벨이 아니라 저 사람인 게 맞잖아. 으흑. 우리 둘째 진상, 혹시 진짜 친구 한 명 없는 건 아니겠지? 뭐, 내가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럼 오늘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그는 마지막까지 부드럽게 미소 짓는 얼굴로 정중히 인사한 뒤 우리를 지나쳐 갔다.
나는 알지 못할 짠한 감정에 젖어 뒤로 살짝 돌아 그를 보았다.
세상에, 저런 멀쩡한 사람이 어쩌다가 우리 둘째 진상에게 붙잡혀서······.
"저 사람도 검술학부야?"
"아니, 정치학부."
"아, 그럼 요한 오빠랑 같이 수업 듣겠네?"
"유학생은 교과 과정이 다르니까 몇 개만 같이 들을걸? 그리고 이제키엘은 요하네스 같은 애랑 안 친해! 내가 쟤 절친이야!"
그, 그래. 네 친구 아무도 안 뺏어가. 그러니까 진정해라.
하지만 카벨은 곧 시무룩해졌다.
"그런데 아마 이번 학기 지나면 이제키엘은 조기 졸업할 것 같아서."
아, 그럼 아마 나도 그를 다시 만나기는 힘들겠구나.
흑, 미남이여, 안녕. 잠시나마 자체 발광하는 미모를 봐서 행복했습니다.
그나저나 잘생긴 사람이 공부도 그렇게 잘한다니 불공평하잖아? 학술원을 조기 졸업하는 사람은 굉장히 드물어서 한 손에 꼽을 정도라고 하던데. 대단하네.
그리고 유진도 그 대단한 사람 중 하나였지.
"카벨 오빠가 수업 듣는 데는 어디야? 빨리 보고 싶어."
결국 카벨을 우쭈쭈 해주는 건 내 역할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쯤 해서 그를 달래 주기로 했다. 그러자 카벨이 물 먹은 화초처럼 금세 생생해졌다.
"하, 네가 보고 싶어 할 줄 알았어. 빨리 가자!"
속마음이야 어떻건 우리는 겉모습만큼은 하하 호호 화기애애하게 교정을 걷기 시작했다.
***
그 후로도 나는 카벨에게 손을 붙잡혀 여기저기를 끌려다녀야만 했다.
우리가 바스티에 남매와 에리히를 만났을 때에는 이미 학술원을 떠나야 할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카벨, 넌 정말이지······."
나는 드물게도 얼굴을 찌푸리고 있는 요하네스를 보며 뜨끔했다.
사실 처음에야 카벨 혼자 신이 나서 나를 데리고 온갖 곳을 쏘아 다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나도 같이 흥에 겨워서 '저기는 어디야? 저건 뭐야?' 하며 그를 잡아끌었기 때문이다.
으윽, 내가 어린애도 아닌데 좀 자중하지 못하긴 했다.
"뭐, 왜, 뭐! 내가 내 동생한테 학교 구경 좀 시켜 주겠다는데!"
카벨은 물론 끝까지 뻔뻔했다. 그래도 나는 진심으로 그들에게 미안해 사과했다.
"미안해,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어."
"아니야. 왠지 카벨이 이럴 것 같아서 우리끼리 돌아다니긴 했어."
크흡, 사실은 나도 완전히 공범인데.
하지만 지금껏 쌓아 온 이미지가 있어서인지 다들 나 때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카벨은 원래 누가 뭐라던 신경 쓰지 않는 녀석이어서 지금도 변명할 생각은 안 하고 콧방귀만 뀌고 있었고.
"너무 늦으면 어머니, 아버지가 걱정하실 테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는 게 낫겠어."
그래도 우리가 없는 동안 요하네스와 에리히가 루이제를 잘 챙겨줬는지, 그녀는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으악, 그래도 양심에 찔린다! 바스티에 부부한테도 루이제를 잘 돌보겠다고 해놓고 학교 구경에 오히려 내가 정신을 빼놓다니!
"루이제, 내가 너무 늦게 와서 미안해."
"무슨 소리야? 언니가 카벨 오빠를 데리고 가 줘서 얼마나 쾌적하고 좋았는데!"
쿠, 쿨럭. 그러니?
루이제는 진심인지 꼭 내가 살신성인하는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마움이 담긴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아, 알고는 있었지만 진짜 카벨을 싫어하는구나, 으앙.
"오늘 좀 더 같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는데, 아쉽다."
우리를 마차까지 데려다주는 길에 요하네스가 나한테 말했다.
그는 카벨과 달리 아까부터 내 보폭에 맞추어 느리게 걸어주고 있었다. 그 점이 참 요하네스다워서 문득 웃음이 났다.
"나도. 집에는 언제 올 거야?"
"아마 2주쯤 뒤에."
카벨과 에리히는 옆에서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에리히가 방금 전의 일로 카벨한테 뭐라고 구박하는 것 같았다.
루이제는 '혼자서도 어디서나 당당하게 걷기!'를 시전하며 제일 앞장서서 움직이고 있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그녀는 참 씩씩하고 기운이 넘치는 것 같다.
그 모습을 보던 요하네스가 웃음 반 걱정 반의 얼굴로 내게 물었다.
"루이제가 힘들게 하지는 않아?"
"전혀 안 그래. 오히려······."
나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어렴풋이 웃다가 대답했다.
"루이제 때문에 나도 덩달아 씩씩해지는 느낌이야."
사실 카벨과 에리히가 나를 바스티에에 두고 학술원의 입학을 결정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가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내가 바스티에의 가족들과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다면, 또 만약 그들이 조금이라도 나를 홀대하는 느낌이 들었다면, 아마 두 사람도 마음 놓고 그 집을 떠나지 못했을 터였다.
하지만 바스티에 부부도, 바스티에의 남매도, 언제나 우리를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대해 주었다. 아마 그런 믿음이 있기에 유진도 우리를 그들에게 부탁했겠지.
"그래도 너무 무리하지 마."
다정한 음성과 함께 부드러운 손길이 내 머리 위에 내려앉았다. 요하네스는 언제나처럼 내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얼굴을 한 채 내게 속삭였다.
나도 그를 보며 마주 미소 지었다.
"응, 고마워."
학술원에는 수가 적긴 해도 여학생도 있다고 하니까, 요하네스도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
역시 내 남자가 될 뻔했던 남자!
"뭐야, 너희 왜 붙어 있어?!"
이럴 때만 재빠른 카벨이 얼른 끼어들어 요하네스와 내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래서 마차에 오른 후에야 나는 겨우 요하네스에게 작별 인사를 건넬 수 있었다.
"에리히, 너도 잘 지내. 밥 잘 챙겨 먹고, 잘 자고!"
"네가 내 누나야?"
엄연히 따지면 내가 누나 맞단다. 그리고 넌 입도 짧고 잠도 없어서 더 걱정된단 말이지!
"나는? 나는?"
옆에 있던 둘째 진상이 자기한테도 말해달라는 듯 독촉했다. 끄응.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그에게 말했다.
"카벨 오빠는······ 그냥 지금처럼만 지내."
부디 더 심해지지 말고, 하다못해 현상 유지라도 해라!
하지만 그는 내 깊은 뜻도 모르고 또다시 거들먹거리기 시작했다.
"하긴, 난 지금도 너무 완벽하지?"
"······."
나는 싸늘해져서 탁, 마차 문을 닫았다.
"그럼 조심해서 돌아가. 다시 볼 때까지 잘 지내."
"요한 오빠도."
그리고 루이제와 나는 학술원을 떠났다. 세 사람을 이곳에 남겨 둔 채로.
"오늘 재미있었어, 그렇지?"
"그러게. 다음에 또 오고 싶다."
단 하루의 짧은 일정이었으나 그래도 제법 알찼던 학술원 견학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습관처럼 책상 앞에 앉아 펜을 들었다.
[유진 오빠, 잘 지내?]
오늘 아침에 편지를 보냈는데 또 쓰기는 좀 그렇지만, 어차피 이걸 내일 바로 보낼 것도 아니었으니까.
[난 카벨 오빠랑 에리히가 있는 학술원에 다녀왔어.]
뭔가 정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재미있는 하루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닌 척해도 어제와 오늘 이틀에 걸친 외출에 피곤했는지, 루이제는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 뒤였다.
[카벨 오빠에게 친구를 소개받았는데 오벨리아에서 온 유학생이래. 유진 오빠도 알고 있어? 내 생각에는 카벨 오빠가 그 친구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물론 카벨 오빠는 그 친구가 자기를 좋아하는 거라고 하지만 말이야.]
오늘은 거의 카벨하고 붙어 있어서 에리히랑 얘기를 많이 못 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어제는 같이 있었으니까. 요하네스도 잘 지내는 것 같았고.
[그러다 문득 유진 오빠의 학술원 생활은 어땠을지 궁금해졌어. 혹시 나중에 기회가 되면······.]
편지지의 반 정도를 채운 뒤 나는 테이블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에 몸을 눕히자 푹신하고 따뜻한 안온함이 나를 반겼다.
오늘은 나도 피곤해서 그런지 꿈조차 꾸지 않고 푹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12.5. 그 오빠, 카벨
일요일 오후, 학생들은 이상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것은 바로 카벨 에른스트가 초조하게 교문 쪽을 서성거리는 모습이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뭘 잘못 먹었나?"
"혹시 넌 카벨 에른스트가 왜 저러는지 알아?"
"난들 어떻게 알아."
"지금 쟤가 제정신이 아닌 것 같다는 건 알겠어."
교정을 걷던 모든 학생이 그를 힐끔거리며 수군거렸다.
도대체 왜 저렇게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구는 거지?
물론 평소에도 카벨 에른스트는 개였다.
미친개. 사나운 개. 다들 혹시나 불똥이라도 튀어서 물릴까 봐 알아서 슬슬 피하는 성깔 더러운 개.
카벨 에른스트는 학술원에 입학한 첫날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더러운 성격과 가차 없는 폭력성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 형인 유진 에른스트가 귀족으로서도 학생으로서도 만인의 귀감이 되어 존경받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행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