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그 오빠들을 조심해 44화
"형, 작작 좀 해."
"난 살살 했는데! 얘가 너무 연약해서 그래!"
아니야, 내가 연약한 게 아니라 네가 쓸데없이 힘이 넘치는 거야!
그래도 저렇게 오랜만에 우리를 본다고 신이 났는데 방금 전에는 의도치 않게 소리를 지르게 되어서 왠지 좀 미안했다.
나는 눈앞에 있는 둘째 진상을 향해 잠시 미뤘던 안부 인사를 건넸다.
"카벨 오빠, 잘 지냈어?"
"응!"
"밥도 잘 챙겨 먹고?"
"응!"
"친구들이랑 싸우지도 않고?"
"그럼!"
오구오구, 우리 둘째 진상 참 잘했어요.
나는 칭찬하듯 손을 들어 카벨의 머리를 쓰담쓰담 해줬다. 아, 그런데 그새 이놈 키가 더 컸나 보다. 왜 이렇게 머리 쓰다듬기가 힘드냐. 그래도 평소처럼 카벨이 은근슬쩍 나한테 고개를 숙여 줘서 수월히 쓰다듬을 수 있었다.
아닌 척해도 기분이 좋은지 카벨의 입꼬리가 들썩이는 게 보였다.
"헉!"
"흡!"
"히익!"
앗, 그런데 갑자기 웬 숨 들이켜는 소리가?
문득 고개를 돌린 나는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까지는 카벨 때문에 워낙 정신이 없어서 몰랐는데 주위에 사람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게다가 다들 못 볼 것이라도 본 듯이 입을 쩍 벌린 채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그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은 얼굴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한 내가 엉거주춤 손을 내리자 카벨도 그제야 주위의 시선을 인식한 듯했다.
곧 그가 주변을 향해 쩌렁쩌렁하게 외쳤다.
"야, 다들 눈깔아! 내 동생이 쑥스러워하잖아!"
으악, 이 둘째 진상아! 너 지금 다른 애들 앞에서 뭐 하는 거야?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뒤이어 일어났다. 카벨의 협박에 이 많은 군중이 일제히 딴청을 피우듯 정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그 광경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나 잘했지?"
잘하긴 뭘 잘해, 이놈아! 너 학교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도대체 뭘 하고 다니기에 이렇게 다들 네 협박에 겁을 먹는 거냐, 이 말이야!
아니다, 이건 겁을 먹은 게 아닌가? 똥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처럼······.
아무튼 면담이 좀 필요할 것 같은데요!
"카벨 오빠······. 나중에 나랑 얘기 좀 해."
"얘기? 그래! 이따가 내 방 구경 올래?"
뭘 또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있냐! 내가 지금 너랑 오순도순하게 친목 도모나 하려고 얘기하자는 건 줄 알아?
"카벨, 학생 기숙사에 이성은 출입 금지인 거 잊었어?"
"요한 오빠!"
앗, 그때 카벨의 등 뒤로 요하네스가 등장했다. 나는 카벨의 미간이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했다. 두 사람의 사이가 썩 좋지 않은 것은 몇 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루이제가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려 요하네스에게 달려갔다. 어억, 그러고 보니 카벨 때문에 정신이 팔려서 잠시 그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미안해, 루이제!
"오빠, 왜 이렇게 늦게 나왔어!"
"미안, 루이제. 나도 미리 나와서 기다리려고 했는데 갑자기 교수님이 부르셔서."
우리 쪽이 정신없는 오누이의 모습이었다면, 이쪽은 다정한 오누이의 정석 같은 모습이었다.
카벨도 그렇지만 요하네스도 6년 사이에 진짜 많이 자랐다. 미래에 우리가 맞선을 볼 때의 모습과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는 걸 보니.
"하리도 어서 와."
그래도 나를 향해 웃는 모습은 아직 어린 시절과 비슷했다. 물론 전보다 믿음직스러워지긴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정하고 자상하다고 해야 하나.
"먼 길 오느라 힘들지 않았어?"
"아니야, 오랜만에 바람도 쐬고 좋은걸."
요하네스는 루이제와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나도 환영해 주었다.
크으, 카벨도 요하네스처럼 이렇게 먼저 루이제한테도 인사해 주고 그랬어야 하는데 말이야. 둘째 진상을 잘 가르치지 못한 제 잘못이 큽니다, 크흑.
"카벨 오빠도 요한 오빠도 반가워."
그래도 이렇게 오랜만에 두 사람을 만나니 기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향해 활짝 웃어주었다.
"헉!"
그 순간, 또 주위에서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야, 내가 눈 깔라고 했지?!"
카벨이 눈을 번뜩이며 다시금 주변을 향해 소리 질렀다.
"형 진짜 시끄러워."
옆에서 그런 그를 차게 식은 눈으로 보던 에리히가 중얼거렸다.
"그만 다른 데로 가자."
"그래, 오빠. 사실은 아까부터 나도 빨리 이 자리를 뜨고 싶었어."
바스티에 남매의 대화까지 듣자 나는 약간 민망해졌다.
그, 그래. 우리 때문에 너희가 좀 낯부끄러울 만도 해.
"하리야, 같이 가자. 학교 구경시켜 줄게."
"고마워."
그래도 요하네스는 여전히 다정하게 웃으며 내게 말했다.
우리는 아직까지도 주변을 향해 눈을 시퍼렇게 번뜩이고 있는 카벨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
제도에 있는 학술원은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카벨과 요한은 고등부에 재학 중이었고, 에리히는 중등부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와아, 건물 크다!"
루이제가 눈앞의 웅장한 건물을 보고 감탄했다. 과연 아를란타에서 가장 큰 학술원인 데다 전교생이 귀족 자제들이라 그런지 그 외관부터가 보통 화려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이전 생에서 카벨의 졸업식 때 와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
듣기로 요하네스는 정치학부에서, 카벨은 검술학부에서 각각 수업을 받고 있다고 했다. 중등부인 에리히는 공통 과목을 위주로 공부하고 있었고.
"나 요한 오빠가 수업 듣는 교실 보고 싶어!"
"우리가 들어가도 괜찮아?"
"어차피 주말이니까 괜찮아. 학술원의 승인도 받았고."
"그럼 가자!"
주말인데도 학술원 안에는 교내를 돌아다니는 학생이 많았다.
그들은 뭐가 그리 신기한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우리를 훔쳐보다가 카벨이 눈을 부라리면 흠칫해서 고개를 돌렸다.
루이제의 말에 요하네스가 있는 정치학부의 강의실을 구경하는 것으로 방향이 정해졌다. 하지만 카벨이 기다렸다는 듯이 딴죽을 걸었다.
"흥, 네가 수업하는 교실에 볼 게 뭐가 있다고. 거기 말고 내가 수업받는 데 가자! 내가 구경시켜 줄게!"
아이고, 아직도 이러는구나.
첫 만남 이후로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나도 도통 친하게 지내는 법이 없었다. 주로 카벨이 시비를 걸고 요하네스는 그를 무시하는 형국이었지만 가끔은 요하네스가 그것을 받아쳐 말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있었다.
그래도 예전에 에른스트에서 그랬듯이 그것이 몸싸움으로 번지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카벨, 넌 주로 연무장에 있잖아. 지금 가 봤자 기껏해야 흙먼지만 날릴 텐데."
요하네스가 지나가듯 내뱉은 말에 카벨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넌 네 동생 데리고 가. 난 내 동생 데리고 갈 테니까!"
이게 웬 편 가르기래요? 유치하다, 둘째 진상아······.
"가을이지만 오늘은 기온도 높고, 하리도 안으로 들어가서 쉬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해?"
"야, 너 지금 내 앞에서 아는 척하는 거야?! 하리는 내가 더 잘 알거든?! 하리는 너 같은 거보다 나랑 같이 가고 싶어 하거든?!"
카벨이 또 이상한 승부욕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그나마 나이를 먹으면서 예전처럼 떼를 쓰지는 않는다지만 여기에서 내가 요하네스를 선택하면 삐져서 귀찮게 굴 게 뻔했다.
게다가 학술원에 가면서 전처럼 자주 못 보게 된 카벨이니만큼 웬만하면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기도 했고.
크흑. 그래, 어쩌겠는가, 이것이 나의 업보인 것을.
나는 어쩔 수 없이 요하네스 쪽을 보며 말했다.
"그럼 우린 카벨 오빠랑 같이 연무장 쪽에 잠깐 들렀다가 갈게."
그러자 카벨은 나를 보며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고, 요하네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쩔 수 없지. 그럼 난 루이제랑 같이 건물 안에 먼저 들어가 있을게."
그래서 카벨과 나, 그리고 에리히는 함께 이동하기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에리히가 나를 배신했다.
"난 실내에 들어가 있을래. 오늘 햇볕을 너무 많이 쬐었어."
네가 무슨 동화책 속의 공주냐?! 게다가 햇볕을 많이 쬐기는? 이동할 때도 계속 마차에 타고 있었으니까 고작해야 여기까지 걸어온 시간 동안만 밖에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인데!
"자, 그럼 우리끼리 가자!"
결국 나는 눈 만난 강아지처럼 신이 나서 내 손을 끄는 카벨에게 붙잡혀 가야만 했다.
그런데 조금 걷다 보니 구두를 신은 발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오빠, 좀 천천히 걷자."
"발 아파?"
"그건 아닌데 쫓아가기 힘들어서. 오빠 보폭이 크잖아."
"업어줄까?"
그건 오바지!
이상하게 카벨은 점점 날 필요 이상으로 연약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 물론 이번에는 내가 둘째 진상한테 끌려다니기 싫어서 어릴 때부터 밑밥을 좀 열심히 깐 것도 있지만 말이야. 그래도 '업어줄까?'라니. 그건 좀 아니지 않니?
투둑. 툭!
그런데 우리 옆을 지나가던 학생들이 갑자기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으응? 그런데 왜 주울 생각은 안 하고 저렇게 입을 쩌억 벌리고 있는 거야?
"이거 떨어뜨리셨어요."
나는 그냥 지나갈까 하다가 그들이 떨어뜨린 책을 주워서 건네주었다.
그래도 카벨의 학교인데, 동생인 내가 선행을 쌓아서 나쁠 건 없겠지. 게다가 방금 전에도 보니 평소에 이놈이 성격을 숨기고 다니지도 않는 모양인데······ 크흑.
"고, 고, 고마······."
그런데 남학생 둘은 책을 주워서 건네는 나를 보며 심하게 말을 더듬었다.
"별말씀을요."
아까 전에 카벨이 한 짓도 있으니 나라도 이미지 쇄신을 하자.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그들에게 상냥한 얼굴로 웃어주었다. 그 순간 그들의 입이 좀 더 크게 쩌어억! 벌어졌다.
고오오!
"헉!"
"딸꾹!"
바로 그때 옆에서 매우, 몹시, 엄청나게 어둡고 위험한 기운이 폴폴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그, 그럼 저희는 이만!"
그 기운을 정면에서 받은 학생들이 사색이 되어 꽁지에 불이라도 붙은 듯이 달아났다.
나는 수상쩍은 얼굴로 옆에 있던 둘째 진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내 오감을 건드리던 위험한 기운이 거두어졌다.
"빨리 가자! 여기 날파리가 너무 많아!"
어디를 봐도 짜증이 난 얼굴을 하고 있는 카벨이 내 손을 잡아끌었다. 그래도 아까 전에 내가 한 말이 있어서 그런지 투덜거리면서도 걸음을 늦춘 상태였다.
예전 같으면 내가 뭐라고 할 새도 없이 무작정 잡아끌고 돌진했을 텐데 이제는 제법 배려라는 것도 할 줄 알고. 기특하구나, 우리 진상! 방금 전의 수상쩍음은 그냥 모르는 척해 주마.
"어어!"
그런데 얼마나 걸었을까. 이번에는 카벨이 먼저 누군가를 향해 아는 척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맞은편에서 다가오던 소년도 카벨을 발견하고 입을 열었다.
"카벨."
앗, 혹시 둘째 진상의 친구인가?!
가까이 다가온 그를 보고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뭐야, 집에 간다더니 일찍 왔네?"
"그렇게 됐어."
그는 은발에 금색 눈동자를 가진, 개안할 만큼의 미남이었다.
단정한 분위기는 요하네스와 느낌이 비슷했지만, 그쪽이 단아한 미남이라면 이쪽은 좀 더 화사한 미남이라고 해야 하나. 그야말로 동화책 속 왕자님의 정석 같다고 해야 할지.
"그런데, 손님?"
햇빛 조각을 담아 놓은 듯한 금색 눈동자가 나를 향해 미끄러졌다. 그러자 카벨이 기다렸다는 듯이 우리 두 사람을 서로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 뿌듯한 얼굴이 꼭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을 누군가에게 처음 선보일 때의 얼굴 같았다.
우리 둘째 진상, 저 친구를 굉장히 좋아하는 모양이구나.
먼저 카벨이 나한테 그를 소개해 주었다.
"인사해, 내 친구야!"
"친구였던가?"
쿠, 쿨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