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그 오빠들을 조심해 43화
내가 몰랐을 뿐, 에른스트 부부가 죽은 후 유진과 바스티에는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유지해 왔다고 한다.
"학술원은 그리 멀지도 않으니까 금방 다녀올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루이제가 학술원에 방문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되어가고 있었다.
학술원에는 요하네스와 카벨, 그리고 에리히까지 재학 중이었다.
본래 학술원의 입학을 강요받는 것은 가문의 후계자뿐이었으나 카벨과 에리히는 완고했다.
바스티에 부부는 이 시국에 그들이 바스티에의 보호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가는 것은 위험하다며 말렸다.
에른스트와 그 주변을 붉게 물들이고 있는 피바람에 대해서 그 누구도 자세히 설명해 주지 않았지만, 주변의 분위기를 통해 우리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결정을 번복하지 않았고, 나도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알 것 같아 말리지 않았다.
"마음에 안 들어."
그렇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 막 2층에 다다랐을 때, 갑자기 낮게 가라앉은 음성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앗, 깜짝이야. 나는 벽에 기대 서 있는 에리히를 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너 방에 들어간 거 아니었어?"
내가 오는 걸 알고 지금 나타난 느낌은 아닌데, 설마 계속 여기에 서 있었던 건가?
고등부인 카벨과 요하네스는 아무래도 전보다 바빠졌기 때문에, 에리히가 우리를 데리고 학술원에 가기 위해 바스티에에 돌아온 참이었다. 여독을 풀기도 전에 장시간 외출을 해 피곤한 텐데, 들어가서 쉬지 않고 뭐 하는 거래?
나는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을 향해 물었다.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널 바스티에 취급하는 느낌이잖아."
그 순간 나는 멈칫했다.
아, 나만 그런 느낌을 받은 게 아니었구나.
사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었다. 카벨이나 에리히와 마찬가지로 나도 이곳에 잠시 의탁하고 있는 군식구일 뿐인데, 어째서인지 다소 지나칠 정도로 살갑게 대해 주는 느낌이 들 때.
그렇다고 딸처럼 여긴다기에는 느낌이 조금 달라서 나도 고개를 갸웃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호, 혹시 며느리 취급이라거나······.
지난 생에서 원래 이 집의 며느리가 되었어야 할 운명이기 때문인지 자꾸만 그런 쪽으로 생각이 되어서 그렇지 않아도 혼자 민망함을 느끼던 중이었다.
그리고 곧 옆에서 에리히가 덧붙인 말에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넌 바스티에가 아니라 에른스트인데 기분 나쁘게."
고개를 들자 여전히 쌀쌀맞은 얼굴을 하고 있는 에리히가 눈에 들어왔다. 내 시선을 느낀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뭘 봐?"
"아니, 그냥."
"왜 웃어?"
"음, 그냥?"
에리히는 갑자기 웃는 내가 이해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다른 말없이 그의 팔을 붙잡고 자리에서 걸음을 뗐다.
"학술원에 가면 오랜만에 카벨 오빠도 볼 수 있겠다."
"형이 있는 곳은 어디든 시끄러워서 별로야."
에리히는 투덜거리면서도 나한테 잡힌 팔을 빼내지는 않았다.
***
'우리 잠시만 헤어져 있자.'
그날의 일을 떠올릴 때면 나는 여전히 밤잠을 설치고 만다.
가슴이 저미도록 애처로운 감정에 젖어, 그 아픈 기억을 몇 번이나 헤집으며 상기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유진은 동생인 우리를 에른스트에서 멀찍이 떨어뜨려 놓는 것을 선택했다. 그때 그의 얼굴을 마주한 우리 셋 중 누구도 차마 거부의 말을 내뱉지 못했다.
나도 목 끝까지 치미는 말을 어렵사리 삼켜 냈다.
우리를 떠나보내고 뭘 하려는 거야?
우리를 떠나보내면······ 당신은 혼자 남게 되잖아.
'반드시 데리러 갈게. 약속해.'
그러나 그 역시도 쉽게 결정한 것이 아닐 터였기에, 우리는 유진의 의견을 존중해 에른스트를 떠났다.
그 후 우리가 머물게 된 곳은 바스티에였다. 에른스트의 그 많은 일가친척 중 하나도 아닌, 죽은 에른스트 부부와의 인연을 제외하면 어떤 연고도 없이 완벽한 타인이라 할 수 있는 바스티에 백작가.
어쩐지 입안이 썼다. 에른스트 부부의 장례식에 왔던 그 무수한 사람 중 누구에게도 쉽게 의지할 수도, 신뢰할 수도 없다는 사실에.
물론 그렇다 해서 그 이후 유진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것은 아니다. 비정기적이기는 하나 보통 1년에 한 번 정도 그는 우리를 만나기 위해 직접 바스티에에 걸음 했다.
만날 때마다 점점 날카롭게 벼려져 가는 그의 눈빛이, 점차 빈틈없이 단단해져 가는 그의 냉정한 분위기가 마음을 쓰리게 했다.
어느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아, 그래. 당신은 지난 생에도 이런 식으로 혼자 어른이 되었던 거겠구나.
바스티에의 보호를 받으면서도 우리가 자유롭게 외출하지 못하는 이유는 혹시 모를 위험을 대비해서였다.
하지만 그렇다면 유진은?
우리와 다르게 어떤 보호도 없이 혼자 에른스트에 남은 유진은?
그런 생각을 하면 어느 때든 쉽게 잠이 들 수가 없었다. 3년 전부터는 그를 만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에 더욱.
달칵.
결국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다시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조명을 켜자 방금 전보다 시야가 확연히 밝아졌다. 그 후 책상 한쪽에 치워 두었던 책을 펼쳤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그 사이에 꽂아 두었던 편지를 꺼냈다.
[안녕, 유진 오빠. 나는 잘 지내고 있어. 얼마 전에 소식 전해 들었어. 이번에······.]
거기에서 그친 편지의 뒷부분은 여전히 새하얀 공백이었다.
나는 밤의 침묵 속에서 그 후로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다시 펜에 잉크를 묻혔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움직여 아까 쓰던 문장을 끝맺었다.
[······이번에 벨론티아 양과 약혼을 한다고.]
유진이 로자벨라 벨론티아와 약혼을 한 것은 예전에도 있던 일이었다. 다만 그 시일이 원래보다 조금 앞당겨졌기 때문에 그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축하해.]
마땅히 해야 할 축사를 건네는데, 다시 한번 나도 모르게 손이 멈추어졌다.
그러나 한 차례 눈을 감았다 뜬 뒤 나는 다시금 종이 위로 손을 움직였다.
방금 전까지 언제 망설였냐는 듯이. 뜻 모를 이 동요를 가라앉히지 못해 늦은 시간에서야 편지를 이어 쓰게 된 것도 애초에 없던 일이라는 듯이.
[축하해, 유진 오빠.]
결국 그날의 편지는 길게 쓰지 못했다.
***
유진이 로자벨라 벨론티아와 결혼한 것은 그의 나이 28살일 때였다. 처음 혼담이 오고 간 것이 21살 때였던 것을 상기하자면 실로 긴 약혼 기간이었다.
연애결혼이었던 카벨과 달리 유진의 혼사는 철저히 정략적인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렇다면 왜 좀 더 일찍 결혼해 결속을 돈독히 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아마도 내가 모르고 있을 뿐, 거기에는 어떤 중요한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어쨌든, 그래서 우리 중 가장 먼저 결혼한 것은 카벨이었다.
그는 25살 때 몰락 직전이던 템페로트 자작가의 영애와 결혼식을 올렸다.
어디로 보나 에른스트와 격이 맞지 않는 가문과의 혼사였기에 카벨의 결혼 소식은 아를란타를 떠들썩하게 만든 대단한 가십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해 말에 유진은 약혼녀였던 로자벨라 벨론티아와 결혼했다. 어째서인지 약혼 후 줄곧 결혼을 미루었던 것과 대조되는 갑작스러운 행보였지만 실로 대단한 두 가문의 결합이었던 탓에 카벨의 일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어느 정도 묻힐 수 있었다.
예식장에서의 유진은 평소처럼 냉담하고 날카로워 보였다. 감히 그 누구도 에른스트의 젊은 공작을 무시할 엄두조차 내지 못할 정도로.
하지만 그 얼굴은 자신의 결혼식 날 더없이 행복하게 웃고 있던 카벨과 대조되어 보여 어쩐지 나는 마음이 무거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내가 그런 감상을 입 밖에 냈다면 그는 감히 누구를 동정하는 것이냐며 오히려 나를 비웃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하찮은 계집애의 헛소리라 치부하고 그대로 무시했을 수도 있다.
예식이 끝난 후 나는 속마음을 숨긴 채 그에게 축언을 남겼고, 그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그런 나를 보다가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나는 이번에도 그가 로자벨라 벨론티아와 약혼한다는 소식에 못내 마음이 쓰였다.
혹시 지난번과 달리 진짜 그녀를 마음에 품게 되어 결정한 일이라면 좋겠지만······.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지금의 내 걱정은 괜한 기우가 될 것이었다.
유진에게 보내는 편지를 완전히 봉하기 전에, 나는 종이의 하단에 한 문장을 덧붙였다.
[ps. 어떤 선택이든 유진 오빠가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똑똑.
"시간 다 됐어."
"지금 나갈게!"
문밖에서 들리는 에리히의 목소리에 나는 모자와 편지를 챙겨 들고 방을 나섰다.
***
나와 에리히, 그리고 루이제는 제도에 있는 학술원으로 향했다.
전부터 학술원을 구경하고 싶어 했던 루이제는 엄청나게 들뜬 눈치였고, 에리히는 아직 좀 피곤한 얼굴이었다. 나도 간만에 멀리까지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여행에 기분이 상쾌했다.
"언니 오빠, 쿠키 먹을래? 아니면 레몬 사탕? 아, 마들렌이랑 마카롱도 있어."
"지금 소풍 가?"
"소풍이랑 다를 건 뭔데?"
에리히가 황당하다는 듯 타박했지만 루이제는 꿋꿋했다.
그나저나 저 두 사람도 처음에 비해 정말 많이 친해졌단 말이지. 이제는 가만히 내버려 둬도 저렇게 알아서 잘 놀고.
처음에는 둘 다 내외라도 하는지 서로 말 한마디 안 섞어서 잘 지낼 수 있을까 싶었는데, 의외로 성격이 잘 맞는 눈치였다.
"아, 도착했다!"
장장 두 시간 동안 마차를 타고서야 우리는 학술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여느 때처럼 에리히가 먼저 마차에서 내려섰다. 그런데 그 직후, 에리히는 뒤돌아서 우리에게 손을 내미는 대신 앞을 보고 말했다.
"카벨 형."
아, 카벨이 마중을 나왔나 보다. 여전히 카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루이제가 내 앞에서 '윽' 하고 소리 냈다.
"카벨 오빠?"
나는 살그머니 고개를 숙여 문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곧바로 근 3주 만에 보는 카벨의 모습이 눈앞에 드러났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
17살이 된 카벨은 이제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 선 외양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항상 몸을 단련해서 그런지 키도 훌쩍 큰 데다 날렵한 몸매를 가지게 됐고, 현역 기사처럼 근육도 탄탄했다.
그런데 우리가 예정보다 좀 늦었나? 아무래도 본의 아니게 기다리게 한 모양이다.
에리히 대신 카벨이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붙잡고 마차 밖으로 내려섰다.
혹시 늦었다고 삐진 건 아니겠지? 그럼 달래 주기 귀찮은데······.
"미안, 길이 조금 막혔던 것 같······ 으앗!"
하지만 나는 지면에 발을 딛기도 전에 허공에 붕 떠올랐다.
"우오오! 어서 와!"
"잠깐······!"
시야가 휙휙 돌았다. 카벨이 나를 안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기 때문이다. 꼭 신이 나서 꺄르륵 웃으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출하는 어린애 같았다.
내, 내가 그렇게 많이 반가웠니, 둘째 진상아? 삐지지 않은 건 다행이지만 이건 뭔가 좀 그렇지 않아?
그건 그렇고, 내가 아직 또래의 평균 키에 약간 못 미친다지만 이렇게 가뿐히 들어 올리다니! 크흑, 왠지 모르게 자존심이 상한다.
그리고 이제 슬슬 어지럽구나. 이제 그만해라.
"카벨 오빠, 그만 내려줘."
"우오오!"
"내려 달라고."
"우오오오!"
"아, 이제 그만 내려 달라니까!"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아서 결국 소리 지르고 말았다.
그래도 둘째 진상은 머리가 다 어질어질할 정도로 나를 허공에서 빙글빙글 돌려 댄 뒤에야 만족한 듯이 팔을 내렸다.
어억, 어지러워. 내가 비틀거리자 옆에서 에리히가 나를 붙잡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