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그 오빠들을 조심해 42화
지금껏 그들이 그녀에게 한 짓을 이제 와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포장할 생각은 없었다.
어렸던 그들은 저마다의 아집에 뒤덮여 차마 말로 하지 못할 짓들을 그녀에게 해왔다. 지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에리히는, 형제들이 모두 그 사실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이미 늦어버린 것도 그들 모두가 알았다.
"에리히, 뭐 해?"
하지만 간혹 그런 생각을 하곤 해.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오늘은 지금과는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안 타?"
너에게 상처 준 일도 없이, 지금처럼 널 볼 때마다 가시를 삼킨 것 같은 기분이 되어 죄책감을 느끼는 일도 없이, 어쩌면 우리 모두 진짜 가족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고.
"탈 거야."
그러나 모두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빨리 올라와."
에리히는 눈앞에 있는 하리의 얼굴을 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솔직하게 하지 못하는 그는 이런 생각을 할 자격조차 없었다.
그래도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아마도 그것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다른 형제들 모두가 똑같이 바라는 마음일 것이었다.
마침내 문이 닫히고 마차가 달리기 시작했다.
과거, 혹은 미래로 연결된 길을 향해서.
어둠 속에서 흔들리는 불빛이 유난히 선명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12. 당신이 없는 여섯 번째 가을
[안녕, 유진 오빠.]
나는 하얀 종이 위에 첫 문장을 써 놓고 손을 멈추었다.
그에게 이런 식으로 편지를 쓰는 게 처음도 아닌데 첫 시작은 언제나 고민이 된다.
끄응, 아니, 사실은 시작 부분도, 중간 부분도, 끝부분도 전부 다 고민이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온 날씨였다. 바깥에는 울긋불긋하게 물든 나뭇잎이 선선한 바람을 따라 흔들리고 있었다.
열어 놓은 창문 틈으로도 이파리가 하나 날아들었다. 종이 위에 노란색 점을 찍으며 사뿐히 내려앉는 나뭇잎을 보다가 나는 그 위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래······. 어느덧 시간이 또 이렇게 지났구나.
내가 이 집에서 가을을 맞는 것도 이걸로 벌써 몇 번째더라?
[안녕, 유진 오빠. 나는 잘 지내고 있어.]
나뭇잎을 만지작거리며 잠시 고민하다가 편지에 한 문장을 더 써넣었다.
이번에는 그에게 전해야 할 내용도 있었는데 어째서인지 손이 잘 움직이지 않았다.
[얼마 전에 소식 전해 들었어. 이번에······.]
"하리 언니!"
벌컥!
거기까지 썼을 때,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아, 깜짝이야. 노크도 없이 이렇게 갑자기 들이닥치다니. 지금 이 집에서 내 방에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어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다.
"루이제, 놀랐잖아."
나는 내 방으로 들어선 소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옅은 푸른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를 가진 소녀는 바로 요하네스의 여동생인 루이제였다.
"시간이 됐는데도 언니가 안 내려와서 내가 데리러 왔어."
그동안 폭풍 성장한 루이제에게서는 이제 6살의 꼬마였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루이제는 내 나이보다 한 살이 어린데도 벌써 나보다 키가 컸다.
크흑, 나도 평균 키인데. 아니, 사실은 평균보다 조금 작기는 했다. 하지만 지난 생을 떠올려 봤을 때, 내 성장기도 금방 올 예정이었다.
루이제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슬쩍 내 앞에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편지 쓰고 있었구나?"
"응.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는지 몰랐어. 다녀와서 마저 써야겠네."
오늘은 루이제와 함께 외출하기로 했는데 깜빡 잊고 있었다. 나는 루이제의 호기심 어린 눈빛을 피해 편지를 책 사이에 끼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리히 오빠가 밑에서 기다리고 있어."
"에리히도 같이 간대?"
"언니가 가니까 당연하지."
나는 재잘거리는 루이제와 함께 방에서 나와 이제는 익숙해진 바스티에 저택의 복도를 걸었다.
내가 에른스트를 떠난 지 6년.
그리고 유진과 마지막으로 만난 지는 이제 3년이 되어가고 있었다.
***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와?"
1층에 내려온 나를 보자마자 에리히가 타박했다. 지난여름부터 키가 크기 시작한 그의 눈높이는 어느덧 나보다 반 뼘 정도 위로 올라가 있었다.
"미안,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된 줄 몰랐어."
나는 '기다려도 내가 안 내려오면 네가 부르러 왔어야지!'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앞에 있는 바스티에 부인을 의식해 내숭을 떨었다.
그러자 내가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만 착한 척하는 걸 아는 에리히가 대번에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조심해서 다녀오렴, 얘들아."
바스티에 부인이 저택을 나서는 우리를 배웅해 주었다.
"루이제, 또 신나서 혼자 여기저기 돌아다니지 말고 언니, 오빠들하고 잘 붙어 다녀."
"엄마는, 내가 애도 아닌데."
그녀는 말괄량이로 자란 루이제가 걱정되는 것 같았다.
쿨럭, 그런데 어머니의 말에 코웃음 치는 루이제의 모습에서 왜 언뜻 카벨이 보이는 것 같지? 아까 전에 문을 벌컥 열어젖힐 때도 그렇고. 으음, 아니야. 이, 이건 그냥 기분 탓일 거야.
나는 고개를 휘휘 저어 얼른 그녀에게서 카벨의 그림자를 떨쳐 버린 뒤 바스티에 부인을 향해 방긋 웃었다.
"걱정 마세요. 루이제는 저희가 잘 돌볼게요."
"어머, 항상 고맙구나."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오히려 바스티에 사람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건 우리인데요.
"난 애 보는 데 소질 없으니까 네가 돌봐."
"왜 이래? 너랑 나는 이미 한배를 탄 거 몰라?"
하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천방지축인 루이제를 감당하기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에리히와 나는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소리 죽여 티격태격하며 저택을 빠져나왔다.
"언니, 오빠! 빨리 와!"
나와 에리히, 그리고 루이제까지. 우리 세 사람은 바스티에 부인의 걱정을 뒤로한 채로 마차에 올랐다.
"제일 먼저 옷을 살 거야! 그리고 그다음에는 구두! 하리 언니도 구두 맞춰야 한다고 했지?"
루이제는 오랜만의 외출에 신이 난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보고 에리히와 나는 흐뭇······ 한 게 아니라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참, 맛있는 디저트 숍이 새로 생겼다고 하더라. 거기에도 들르자. 그리고 그다음에는 스위트 벨리에서 아몬드 봉봉을 한 상자, 아니, 세 상자 사서 수예점에······."
나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루이제의 말을 듣다가 슬슬 말려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중간에 끼어들었다.
"오늘 한꺼번에 다 가기에는 무리 아닐까?"
"하지만 자주 외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오늘 뽕을 뽑아야지!"
뽀, 뽕을 뽑다니! 그런 말은 어디에서 배운 거야?! 역시 마리안인가? 루이제의 소꿉친구인 마리안은 꽤 잔망스러운 구석이 있어서 평소에도 하녀에게 배웠다며 저렴한 길거리 언어를 루이제에게 알려 주곤 했다.
나는 귀족 아가씨치고는 참으로 친근한 화법을 사용하는 루이제를 보며 잠시 동공을 흔들었다.
"난 금방 피곤해져서 그렇게 여러 군데는 못 가."
그때, 내 옆에서 건방진 자세로 다리를 꼬고 있던 에리히가 말했다. 워낙 생긴 게 귀티 나게 예뻐서 그런지 그런 모습도 쓸데없이 우아해 보였다.
그런데 얘는 자기가 저질 체력이라는 걸 뭐 이렇게 당당하게 말하니?
"그럼 오빠는 중간에 먼저 가든가."
루이제는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난 하리 언니랑 둘이 가면 돼."
그녀의 말을 들은 에리히가 못마땅한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누구 마음대로? 얘는 나랑 같이 움직일 거야."
"하지만 하리 언니가 나만 혼자 두고 에리히 오빠랑 같이 집으로 돌아갈 리가 없잖아? 그러니까 오빠가 그냥 포기해."
아무래도 루이제는 지난 6년간 에리히를 완전히 파악한 것 같다. 나는 지금의 상황이 웃겨서 불만스러운 얼굴의 에리히를 보며 내심 웃다가 입을 열었다.
"뭐, 바쁘게 움직이면 오늘 안에 다 해결할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역시 그렇지?"
게다가 그동안 외출을 조심해야 했던 건 우리 때문이니까.
사실 우리가 지금처럼 자유롭게 외출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이제 1년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지난 6년간 바스티에 부부와 사용인들에게 전해 들었던 에른스트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러자 어찌할 수 없이 속이 약간 쓰려 왔다.
"조심해서 내려와."
그래도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기 때문에 쓸데없는 생각을 길게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먼저 마차에서 내려선 에리히가 나한테 손을 내밀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그 손을 붙잡다 말고 갑자기 새삼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왜?"
내 시선을 느낀 에리히가 의아한 듯이 물었다. 반면 나는 깊은 감회를 느끼고 있었다.
"아니, 그동안 너 참 많이 컸다 싶어서."
우리 셋째 진상이 사람 됐어요!
내가 마차에서 내린다고 이렇게 손도 내밀어서 잡아주고 말이야! 심지어 에스코트가 엄청 자연스러워! 예전 같았으면 내가 내리든 말든 본체만체했을 텐데!
"뭐라는 거야?"
하지만 내 말에 에리히는 금세 또 쌀쌀맞게 나를 째려보았다.
"동갑인 주제에 혼자 어른스러운 척 말하지 마."
짜식, 앙탈은. 난 칭찬해 준 건데 말이야. 그래도 이 정도면 진짜 많이 발전하긴 했다.
"빨리 가자!"
루이제는 우리가 또 티격태격하는 동안 마차에서 혼자 폴짝 뛰어내렸다.
"잠깐만, 루이제! 같이 가!"
곧바로 그녀가 상점가를 향해 뛰어갔기 때문에 에리히와 나도 걸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
"하하, 너희들이 오늘도 고생 많았겠구나."
저녁때 저택에 돌아온 바스티에 백작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호탕하게 웃었다. 외출했던 우리도 방금 전에 막 귀가한 참이었다.
생기가 넘치는 루이제와 달리 에리히와 나는 반나절 전에 비해 확연히 핼쑥해져 있었다. 바스티에 부인이 안색을 흐리며 말했다.
"얘가 호기심이 너무 많아서 걱정이에요."
"뭐, 건강하고 씩씩하게만 자라면 되는 것 아니겠소."
루이제는 오늘 산 물건들을 풀어 본다며 자기 방으로 나는 듯이 올라간 뒤였다. 에리히도 힘들다면서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그래서 지금 바스티에 부부와 함께 있는 것은 나뿐이었다.
뒤이어 그들은 웃으며 나를 향해 말했다.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루이제가 갑자기 학술원에 가보고 싶다 그래서 조금 걱정이 되었는데. 그래도 하리가 같이 가 준다니 마음이 편하구나."
"학술원에는 카벨 오빠랑 요한 오빠도 있으니까요. 에리히도 재작년부터 재학 중이라 저도 궁금했구요."
"정말이지, 하리 너마저 여기에 없었으면 루이제 혼자 얼마나 말썽을 일으키고 다녔을지. 네가 바스티에에 와 줘서 고마울 정도란다."
전부터 느꼈지만 바스티에 부부는 진짜 대인배인 것 같다.
지금은 학술원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고 있지만 두 진상이 여기에 머무는 동안에도 우리한테 한 번도 눈칫밥 주는 일이 없었고, 게다가 루이제를 돌보는 일로 오히려 나한테 고마움을 표하기까지 한다.
사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루이제와 같이 가정교사에게 수업을 듣거나 그녀와 함께 놀아주는 정도인데도 말이다.
애초에 우리는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녀를 돌본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애당초 유진의 부탁으로 우리 세 사람을 바스티에에 받아들여 준 것을 생각하자면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해도 모자란 건 이쪽이었다.
물론 그것이 정치적 이해관계가 일절 없는 순수한 호의라 여길 정도로 어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오늘날까지 이렇게 우리를 살뜰히 보살펴 주고 있는 것은 큰 은혜라 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