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그 오빠들을 조심해 41화
11. 회귀 전, 그녀는 모르는 이야기
하리 에른스트의 웃는 모습은 꼭 봉오리 진 꽃망울이 활짝 피어나는 것 같았다.
평소에는 은방울꽃처럼 은은한 향기를 내뿜던 소녀가 얼굴에 달콤한 미소를 드리울 때면, 누구나 그 압도적인 아름다움에 한순간 숨이 막히고 말 정도였다.
그리고 에리히는 그런 그녀의 웃는 모습이 끔찍하게 싫었다.
"그러니까 참석하지 말라고 했잖아."
파티장과 거리가 있는 야외 테라스에 싸늘한 음성이 번져 들었다.
"이런 자리는 너한테 안 어울려."
차가운 푸른 눈동자가 앞에 있는 사람에게 못 박혀 있었다. 질책 어린 말에 에리히의 앞에 있던 소녀는 그저 난처한 듯이 미소 지었다.
"너무 화내지 마. 직접 초대받은 자리라 안 올 수 없었단 말이야."
에리히와 하리, 둘 다 오늘의 연회를 위해 준비한 예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마주한 이의 달래는 듯한 말에도 에리히의 얼굴은 도통 펴질 줄을 몰랐다.
방금 전 파티장에서 오늘 연회의 주최자인 라벤더 코르디스가 공개적으로 하리를 망신 주려 했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오늘 파티에 불참 소식을 알렸던 에리히와 카벨이 때맞춰 나타나지 않았다면 하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모욕적인 언사를 들어야 했을 것이었다.
"그 여자는 유진 형을 좋아해. 그래서 너한테 적대적인 거야."
에리히는 여전히 불쾌한 기분을 안은 채 냉소적으로 읊조렸다. 그러자 하리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하지만······."
곧 그녀에게서 흘러나온 말에 에리히의 입술이 작게 달싹여졌다.
"그런 거라면 벨론티아 양을 경계하는 게 맞지 않을까?"
하지만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유진 오빠의 약혼녀잖아."
그 말대로였다. 유진에 대한 연정 때문이라면 그의 약혼녀인 로자벨라 벨론티아에게 시기 질투하는 것이 당연했다.
하지만······.
"그건······."
에리히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는 언젠가 보았던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리고 있었다.
어느 봄날, 정원에 서 있는 하리를 멀리서 조용히 바라보던 형의 얼굴을. 그 장면을 훔쳐보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던 그날의 낯선 기억을.
분명 형에게는······.
"네가 동생이 아니니까."
곧 에리히에게서 혼잣말에 가까운 낮은 속삭임이 새어 나왔다.
하리는 그의 말에 잠시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여느 때처럼 태연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하긴, 피도 안 섞인 남인데 같이 사니까. 그것만으로도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걸지도 모르겠어."
그 작은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고 이런 말을 하는지 뻔히 상상이 되었다.
아마도 에리히가 자신을 부정한 것으로 오해했겠지. 방금 전 그가 무심코 내뱉은 말은 그렇게 생각할 거리가 충분했다.
에리히는 무의식중에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눈앞에 비치는 미소에 결국은 굳은 얼굴로 그저 침묵하고 말았다.
"오늘 도와줘서 고마워. 너랑 카벨 오빠 아니었으면 창피할 뻔했어."
오늘 에리히와 함께 온 카벨은 아직 파티장 안에 있었다.
에리히는 또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얼굴을 구기다가 이내 마주한 얼굴을 외면했다.
"멍청이."
웃지 마, 바보같이. 사실은 지금 웃고 싶은 기분도 아니잖아.
아마도 본인은 그들을 잘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같이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그녀의 진짜 웃음과 가짜 웃음 하나 구분하지 못하겠는가.
그래서 에리히는 하리 에른스트가 지금처럼 웃을 때가 제일 싫었다.
넌 왜 늘 그렇게 웃기만 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든 화를 내지도 않고, 단 한 번도 솔직한 감정을 밖으로 내보이지도 않아.
그 사실에 화가 나서 더 괴롭히고 상처를 줘도 변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럴수록 하리는 방어벽이라도 치듯 더욱 꽁꽁 자신을 속에 감추었다.
그래, 사실은 그녀가 이렇게 된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녀를 그렇게 만든 것은 바로 그들 형제였으니까.
문득 속이 쓰려 와서, 에리히는 눈매를 찡그렸다.
"어, 오늘 유진 오빠도 오는 거였어?"
그때, 하리가 무언가를 보고 놀란 듯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를 따라 에리히도 테라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지금 막 저택에 도착한 듯 저 아래에 서 있는 낯익은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그 역시도 테라스에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한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직후, 곧 유진이 고개를 내리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에리히는 건물 안으로 들어서는 그를 보며 말했다.
"내가 불렀어."
"그래도 되는 거야? 유진 오빠, 그렇지 않아도 요즘 바쁜 것 같던데."
"올 만하니까 왔겠지."
"이상하네, 다들. 어제까지만 해도 이번 파티에 올 생각 없다고 하더니."
원래는 그럴 예정이었다. 하리도 파티에 불참할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그녀가 오늘 혼자 이곳으로 출발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전해 듣고 난 후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마 다른 형제들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하던 일도 다 제쳐 두고 여기에 온 것일 터였다.
"그래도 간만에 다 같이 모이니까 좋다."
그들의 속도 모르고 하리는 해맑게 웃었다. 그래도 지금의 미소는 진짜 미소에 가까워서 에리히의 기분도 조금은 풀렸다.
"둘만 있어?"
"유진 오빠."
때마침 유진이 테라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카벨 형은 안에 있어. 내가 데려올게."
어차피 슬슬 파티장을 떠날 때도 되었다 싶었기 때문에 에리히는 카벨을 찾아 테라스를 나섰다.
"별거 아닌 게 까불고 있어."
에리히는 카벨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때마침 그가 아까 전 에리히와 하리가 들어섰던 테라스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
"응? 왜 너 혼자 나왔어? 쓰······ 아니, 하리는?"
카벨은 집에서 부르던 습관대로 고약한 별명을 부르려고 하다가 곧 장소를 의식하고 말을 바꾸었다.
카벨은 어릴 때도 그랬지만 기사단에 들어가고 난 후로 기가 센 사람들 틈에만 있어서 그런지 점점 사용하는 언행이 거칠어졌다. 전부 남자들뿐인 데다 매일 검만 휘둘러 대는 게 일인 사람들이니 오죽하겠느냐만은.
에리히도 몇 번 주의를 줘서 나아진 게 지금이었다. 그나마 밖에서도 하리를 쓰레기라고 불러 대지는 않으니 전보다는 나은 편이었다.
그리고 카벨이 밖에서 하리에게 쓰는 호칭을 바꾼 이유는, 그 몹쓸 호칭을 듣고 덩달아 하리를 무시하는 작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의 최후가 어떠했는지는 따로 말하지 않겠다.
"유진 형이 와서 맡기고 왔어. 형이야말로 아까 그 여자는?"
그의 말에 카벨이 콧방귀를 뀌었다.
"몇 마디 했더니 질질 짜더라. 그러게 별것도 아닌 게 겁대가리 없이 덤비긴 왜 덤벼? 죽으려고."
엄연히 따지면 몇 마디만 하고 만 게 아니겠지.
하지만 에리히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 그래도 카벨이 하리에게 모욕을 주려 한 여자한테 몇 배로 갚아주고 온 것이 내심 시원했다.
"아, 나 내일 근무지 이탈로 단장한테 깨지게 생겼어."
"난 내일 기말시험이야."
둘 다 갑작스럽게 하리를 쫓아 파티에 참석한 것이기 때문에 내일 일을 생각하자 다소 골치가 아파졌다.
"그런데 바스티에 말이야. 왠지 좀 재수 없지 않냐?"
그때, 불현듯 카벨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얼굴을 구기며 물었다. 낯설지 않은 그 이름에 에리히가 말했다.
"요하네스 바스티에 말하는 거야?"
"그래, 그 자식."
"형이랑 같은 학술원 출신이잖아."
사실 에리히는 바스티에가 유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가문이기 때문에 기억하고 있었다.
"왜, 작년 졸업식 날에 하리가 나 보러 우리 학교에 왔었잖아. 그때 그 자식 얼굴이 이상했어."
"뭐가?"
"완전히 한눈에 뿅 간 표정이었다고!"
카벨은 생각만 해도 기분이 더러운 듯이 이를 갈았다.
"그래 봤자 그 후로는 하리나 형이나 요하네스 바스티에랑 딱히 만나는 일도 없었잖아."
"네가 몰라서 그래. 그 후로 그 자식이 은근슬쩍 자꾸만 우리 주변을 얼쩡거리고 있단 말이야. 오늘 파티장에도 있던데, 이거 완전히 스토커 아니야?"
글쎄, 그건 그냥 그쪽도 초대를 받아서 온 것뿐인 것 같은데. 그냥 형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카벨은 이미 에리히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그냥 말하지 않았다. 괜히 입씨름하기 피곤하기도 했고.
"하여간 걔는, 밖에서 아무한테나 웃어주지 말라니까. 자기가 다른 놈들을 홀리고 다니는 것도 몰라."
에리히는 옆에서 계속해서 구시렁거리는 소리를 한 귀로 흘려들었다.
"둘 다 어서 와."
테라스로 들어서자마자 해사한 미소와 목소리가 다가들었다. 카벨과 에리히의 얼굴이 알게 모르게 온화한 빛을 띠며 풀어졌다.
"카벨, 다음부터는 적당히 하고 와."
유진도 동생이 방금 전까지 뭘 하고 왔는지 아는 것 같았다. 그래도 유진 역시 카벨에게 다음부터 그런 짓을 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물론 이 자리에 하리가 있어서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은 이유도 있겠지만.
"그만 가자. 오늘 파티는 시시해서 더 볼 것도 없겠어."
에리히가 먼저 말하자 카벨도 너스레를 떨며 맞장구쳤다.
"맞아. 이딴 구린 파티에 바쁜 사람을 초대하다니, 완전 양심 없네."
그들이 저마다 불만을 드러내자 하리의 얼굴에 다시금 아까의 곤혹감이 떠올랐다.
"미안. 나 때문에 다들 재미없었나 봐."
"무슨 소리야? 너 같은 게 내 기분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것 같아?"
너 때문이 아니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 라는 소리를 솔직하게 하지도 못하고.
하지만 에리히도 딱히 남 말 할 처지가 아니었기 때문에 바보 같은 카벨의 모습에 그냥 속으로 혀를 차고 말았다.
"나가자."
유진까지 그렇게 말하고 나자 하리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손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유진의 팔에 닿았다. 그 순간 유진이 멈칫했으나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에리히뿐이었다.
"오늘 오빠들이 와 줘서 정말 좋아. 이렇게 다 같이 있는 건 오랜만이잖아."
하리가 웃으며 말하자 다른 세 명의 분위기도 방금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들은 다 함께 테라스를 나섰다. 처음 파티장에 등장할 때 혼자였던 하리의 주위에는 에른스트의 세 형제가 있었다.
마치 그녀를 보호하듯 가운데에 두고 파티장을 가로지르는 모습에 몇몇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소곤거렸다.
건물 밖으로 나온 네 사람은 준비된 마차를 향해 걸어갔다.
에리히는 앞서 걷고 있는 유진과 하리의 모습을 보았다. 하리가 웃는 얼굴로 무어라 말하자 유진이 작게 호응했다. 그런 그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무표정하고 차가웠다.
하지만······.
"눈치가 빠른 것도 마냥 좋지는 않은 것 같아."
에리히가 작게 읊조린 소리에 옆에 있던 카벨이 의문을 표했다.
"응? 왜?"
"좋겠다. 형은 아마 평생 모를 테니까."
"내가 뭘 몰라?"
"있어, 그런 거."
알면 괜히 신경 쓰이고 피곤해지는 거.
카벨은 무시받는 기분이 드는지 인상을 찌푸렸지만 에리히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오늘 파티의 주최자였던 라벤더 코르디스는 눈치가 빠른 여자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유진의 약혼녀를 두고 하리에게 그런 질투 섞인 눈빛을 보일 리 없었으니까.
에리히는 불빛에 물들어 있는 하리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래, 여동생이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아마 이 집에서 널 진짜 동생으로 여기는 건 카벨 형뿐일 거야.
그러나 에리히는 그녀에게 지금껏 전하지 못한 그 말을 속으로 삼켜 냈다. 아마 앞으로도 영영 그런 마음을 밝힐 일은 없으리라.
그러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