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오빠들을 조심해!-40화 (40/138)

# 40

그 오빠들을 조심해 40화

어린 동생들은 모두 잠들어 있을 시간이었다. 유진은 고단한 시간을 보낸 그들이 모두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직후에야 지금 이곳에 발길을 향했다.

"그런데 감히 내 허락 없이 에른스트의 문을 연 게 누구냐고 물었다."

모두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었다. 개중에는 불안히 눈을 굴리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또는 지금의 상황에 의문을 느끼고 있는 사람도, 밤늦게 잠을 깨운 그에게 불만을 품은 사람도 있어 보였다.

"에른스트가 우스웠나?"

그러나 곧이어 고막을 파고든 싸늘한 음성에는 모두 흠칫해 어깨를 떨었다.

"아니면 지금 눈앞에 있는 내가 우스웠나?"

유진은 그제야 긴장감을 보이는 사람들을 향해 속으로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이제까지 그는 행운아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리고 부모님의 보호 아래에서 지금껏 그가 어린애일 수 있었다는 것도.

"나는 신의를 깨뜨린 자들에게 더 이상 자비를 베풀지 않을 생각이다."

하지만 이제 그는 누군가에게 보호받는 사람이 아니라 보호하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오직 자신만이 지킬 수 있는 것들을 온몸을 다 바쳐 지켜 내야만 했다.

"에른스트에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자는 필요 없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라면 이 나약한 마음을 뿌리째 뽑아 부숴 버려야 한다는 것도 이제는 알았다.

지금까지는 제 안에 망설임이 남아 있었다. 두려워 도망치고 싶었던 적도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것도 오늘로 끝이다.

평온했던 봄은 이미 끝나 버렸고, 이제 눈앞에는 혹독한 겨울만이 남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부터 그가 하게 될 끔찍한 일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길이라면, 차라리 스스로의 의지로 걸어갈 테다. 그것이 에른스트니까.

"두 번 다시는 너희가 나를, 이 에른스트를 녹록히 보지 못하게 해주마."

그래, 이제는 유약했던 유년시절에 진정으로 작별을 고해야 할 때였다.

***

"사냥에는 취미가 없다고 하지 않았었나?"

숲에는 건조한 흙냄새와 마른 풀 냄새가 가득했다. 우거진 나무들에서 떨어진 솔방울이 가죽신에 차여 저 멀리로 굴러갔다.

유진은 당숙인 슈마하 백작의 뒷모습을 보며 대답했다.

"사격 솜씨가 엉망이어서 말이지요."

"그래, 네 아버지도 사격을 썩 잘하는 편은 아니었지."

유진을 얼마나 손쉬운 상대라 여겼기에 이렇게 그의 앞에서 등을 훤히 보이고 있을까? 하기야 만약 유진이 상대방의 입장이었어도 열넷밖에 되지 않은 데다 기껏해야 펜이나 잡아 봤을 소년을 경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며칠 전 네 고모에게 했다던 몰상식적인 언사는 전해 들었다. 퍽 깜찍한 짓을 했더구나."

게다가 이미 한 번 노골적인 위협을 가하는 것으로 완전히 기를 꺾어놓았다, 그리 여기고 있을 터다. 이렇게 따로 유진을 부른 것 역시 발밑에서 꿈틀거리는 벌레를 다시 한번 밟아주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네 고모가 과했던 것도 맞지."

그보다 더한 짓도 서슴없이 저질렀던 것을 생각하면 퍽 웃긴 말이었다.

유진은 비 내리던 가을날의 일을 떠올렸다.

"다리의 상처는 이제 다 나은 게냐?"

슈마하 백작이 카벨에게 허튼소리를 했다는 사실을 알기 전부터, 사실 유진은 에른스트의 안팎으로 감도는 위화감을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그의 앞에서 친절한 낯을 하고 있던 사람들이 그 직후 시꺼먼 속내를 드러내고 뻔뻔하게 그를 농락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직입니다."

"그래, 걷는 게 썩 편해 보이지는 않는구나."

사실 그의 다리는 얼마 전 거의 완전히 회복되었다. 그러나 그 일로 발 병신이 된 척한 것이 오늘 일에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그 후 숫기가 꺾인 양 온순한 모습을 보인 것도 그들이 방심하는 데 영향을 미쳤으리라. 그것을 위해 그간 이를 악물며 수모를 견뎌 냈던 것이 아닌가.

레놀드 후작 부인이 하리에게 위해를 끼치려 한 일로 예정이 조금 당겨지긴 했지만 차라리 지금이 적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진, 너는 사냥을 즐기지 않으니 잘 모르겠지만 본래 사냥을 하다 보면 총기 오발 사고가 드물지 않게 일어나곤 한단다."

두 사람은 점점 깊은 숲속으로 들어갔다.

"그렇습니까?"

"그래, 자칫 사냥감과 사람을 착각하는 경우도 있으니 조심하거라."

"두려운 말씀이군요."

"걱정 말아라. 설마 내가 지금 여기에서 너를 사냥감으로 착각하기라도 하겠느냐?"

"예, 착각을 한다면 사냥에 능숙한 당숙이 아니라 서툰 제가 하는 것이 마땅하지요."

문득 고요한 숲속에 철컥, 작은 소리가 울렸다. 고막을 파고든 익숙한 소리에 슈마하 백작이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았다.

타앙!

그 직후 귀청을 울리는 파열음에 나무 위에 앉아 있던 새들이 일제히 날개를 펼치고 푸드덕 날아갔다. 매캐한 탄약 냄새가 맑은 공기 속에 퍼져 나갔다.

저벅.

유진은 앞으로 겨누고 있던 총구를 천천히 내리고 바닥에 쓰러진 사람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당숙, 고통스러우십니까?"

"커억, 크흑······!"

"지난번의 빚을 갚았을 뿐인데 이 정도로 엄살을 피우시다니."

총알에 관통당한 다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냥복을 적신 붉은 액체가 바닥에 깔린 마른 이파리 위에도 아낌없이 넘쳐 흘렸다.

슈마하 백작은 설마 유진이 그에게 총구를 겨누리라 여기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하기야, 누구라도 그럴 터다. 고작 열넷 먹은 소년이 작은 짐승도 아닌 사람에게 이리도 가차 없이 총을 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럴 용기가 있으리라 여기지도 않았을 테고, 아마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유진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경악에 젖은 표정을 보며 유진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당숙, 저는 사냥을 즐기지는 않지만······."

얼다 못해 뜨겁게 타오르는 것처럼 보이는 검은 눈동자가 바닥에 쓰러진 이를 꿰뚫었다.

"한 번 노린 사냥감은 결코 놓치지 않습니다."

그 검은빛은 먹잇감을 노리는 맹수처럼 어수룩함 하나 없이 냉혹했다.

"본래 황실의 검인 에른스트에는 무수한 피의 역사가 있다고 하셨습니까?"

슈마하 백작은 처음으로 눈앞에 있는, 제 나이의 반의 반절도 되지 않는 소년의 기세에 짓눌리는 느낌을 받았다.

"단순히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았다 해서 제게 수장이 될 자격은 없다고, 그리 말씀하셨지요."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소년은 자신이 얼마 전까지 알던, 정도 이외의 길로는 실수로나마 발을 들여 본 일조차 없을 것 같던 곧고 바른 소년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한번 해보도록 하죠. 이 진창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는 사람이 누구일지."

제 안의 연약한 부분을 완전히 도려낸 유진은 이제 싸우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다.

'우리 잠시만 헤어져 있자.'

형제들과 함께 하리를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갔던 그다음 날, 유진은 이전부터 고민하던 일을 마침내 결론짓고 동생들을 불러 말했다.

레놀드 부인을 저택 안으로 들인 사람을 찾아 간밤에 처리하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에른스트의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었고, 믿을 수 없는 이들 사이에 동생들을 둔다는 것은 지금까지보다 더한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 될 터였다.

그에게는 힘이 없어서, 이대로는 동생들을 지켜 줄 수 없었다. 이미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유진의 손과 발을 묶을 표적이 되고도 남았고, 에른스트에 있는 그들은 그 존재만으로 유진의 약점이 되었다.

그래서 그는 현재로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이들에게 동생들을 부탁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완전한 타인을 혈족보다 더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 우습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마 저는 앞으로도 두고두고 당신들께 감사하며 살 것 같습니다."

아니······. 하지만 사실은 전부 다 핑계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단지 그는 이제부터 하게 될 일을 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것뿐인지도 몰랐다. 이런 추하고, 더럽고, 끔찍하기까지 한 짓을 서슴없이 행하는 자신의 모습을 동생들이 알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당숙을 비롯해 에른스트에 있는 훌륭한 어른들께 제가 본받을 게 이렇듯 많지 않습니까?"

아직 어린 동생들이니, 그의 선택을 이해해 주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돌아온 것은 위로 어린 속삭임이었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오빠는 잘하고 있어.

절망에 빠졌던 밤, 그를 위로하며 쉼 없이 속삭였던 그 말처럼.

그래, 헤어져 있어도 우리는 가족이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마세요, 당숙."

그러니 지킬 수 있는 힘을 가질 때까지만, 우리는 헤어지는 거야.

"설마 어른들의 보살핌이 필요한 열네 살의 어린 소년인 제가, 고의로 당숙에게 총을 겨누었을 리가 있겠습니까?"

유진의 예의 바른 음성은 지금의 상황과 너무도 괴리감이 커서 기괴한 느낌마저 풍겼다.

피가 흐르는 다리를 붙들고 신음하던 슈마하 백작이 옆에 떨어져 있던 총을 향해 손을 뻗었다. 노련한 사냥꾼인 탓인지, 기다란 총신을 들고 유진에게 그것을 겨누기까지는 찰나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타앙!

"크억!"

하지만 그는 방아쇠를 당기기도 전에 들고 있던 총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제가 사격에 서툴러 실수를 곧잘 합니다."

슈마하 백작은 피 흐르는 손등을 움켜잡고 고꾸라졌다.

"그러게 왜 어린 조카와 단둘이 이런 깊은 숲까지 들어오셨습니까? 하기야 설마 스스로가 사냥감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테지만."

비가 내렸던 그날. 목숨이 아깝다면 말 잘 듣는 꼭두각시로 살라고, 바닥에 신음하며 쓰러진 그를 향해 그렇게 말했던가. 네 부모처럼 너마저 그렇게 비명에 죽는다면 어린 동생들이 얼마나 슬퍼하겠느냐고.

지금도 그를 밤잠 설치게 하는 그날의 굴욕적인 기억 속에서, 유진은 덫에 빠져 버둥거리는 짐승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사냥꾼과 먹잇감의 관계가 뒤바뀌었다.

"살아생전 아버지를 그토록 두려워하셨으면서, 그 모든 것을 고스란히 이어받은 저를 쉬이 보는 우를 범하시다니."

유진은 아버지인 전 에른스트 공작에게 직접 사격을 배웠다. 그의 천성으로는 사냥을 즐길 수 없었지만 그렇다 해서 한 번 노린 사냥감을 놓쳐 본 적은 결코 없었다.

"맹수에게서 난 새끼가 설마 고양이일 거라고 생각하기라도 하셨는지."

그러니 더군다나 먼저 그를 향해 이를 드러낸 사냥감에게 베풀 관용이란 없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으로 어른다운 방식이라고 눈앞에 있는 사람이 친히 알려 주지 않았던가.

"에른스트의 법대로 하자고 하셨으니 저는 당신을 존중해 드릴 생각입니다."

이제는 세상의 풍파로부터 그를 지켜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두 다리로 온 힘을 다해 버티고 서서 스스로를 지켜 내야 했다.

"다만 제 인내심은 아버지보다 길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눈앞을 가로막는 자들을 물어뜯는 것도 망설이지 않겠다. 두 번 다시는 그를 만만하게 여겨 감히 위협하지 못하도록. 그가 지켜야 할 이들에게도 다시는 그 더러운 손을 뻗지 못하도록.

"그래도 괜찮겠죠."

그것을 위해서라면 진흙탕에 몸을 담그는 것도, 이 손에 피를 묻히는 일도 주저하지 않을 테다.

"어차피 이건 단순 총기 오발 사고니까요."

뺨을 스치는 차가운 바람을 느끼며 유진은 웃었다.

소중한 사람들을 보듬을 봄을 맞이하기 위해, 그는 이 혹독한 겨울을 어떻게든 홀로 이겨 낼 것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