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그 오빠들을 조심해 39화
얼어붙은 목소리가 밤공기를 가로질렀다.
"고모가 지금 얘 때린 거야?"
카벨은 바깥의 소란에 자다가 깨서 달려 나온 듯 실내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그가 형형한 푸른 눈을 치켜뜨자 레놀드 부인이 한순간 흠칫했다.
"어디서 버릇없게······."
"고모가 때린 거냐고 지금 내가 묻잖아!"
레놀드 부인은 카벨의 고함에 기가 막혀 말문이 막힌 눈치였다. 하지만 카벨은 목에 핏대까지 드리우고 더욱 거칠게 소리 질렀다.
"고모가 뭔데, 무슨 자격으로 얘를 때려? 누구 마음대로 때리냐고!"
의외의 상황에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원래부터 천방지축인 둘째 진상인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어른에게 앞뒤 없이 고함을 내지르며 당장에라도 덤벼들 것처럼 구는 건 처음 보았다.
"고모가 뭔데······!"
아니, 실제로 덤벼들었다. 불시의 기습에 그때까지도 내 손목을 붙들고 있던 레놀드 부인이 뒤로 주춤 물러났다. 그와 함께 억센 손아귀에 틀어 잡혀 저릿하던 팔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왜 때려! 고모가 왜! 왜······!"
카벨에게 들이받힌 레놀드 부인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아직 11살이지만 힘 하나는 장사인 카벨이기 때문에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은 것 같았다.
"이, 이게 무슨, 이 망나니 같은 놈이!"
"내가 망나니면 고모는 뭔데! 이 마귀할멈아!"
그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카벨은 레놀드 부인을 향해 마구 주먹질까지 했다.
"도련님!"
카벨의 낌새를 눈치챈 휴버트가 말리지 않았다면 아마 진짜로 레놀드 부인을 때렸을지도 몰랐다.
"이거, 놔······! 나도 때릴 거야!"
휴버트에게 붙들려서도 카벨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발버둥 쳐 댔다. 그 모습이 놀라워서 나는 방금 전 얻어맞은 뺨이 아픈 줄도 모르고 입을 벌렸다.
"에른스트에 외부인의 침입을 허용한 게 누구지?"
서릿발보다 차가운 음성이 고막을 파고든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갈색 머리카락을 얕은 바람에 흩날리며 나타난 것은 유진이었다. 단지 그가 모습을 드러낸 것뿐인데도, 주위의 공기가 순식간에 급변했다.
지팡이를 짚고서도 그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누구보다도 커다란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레놀드 부인은 유진이 저택에 있는 줄 몰랐던 것처럼 한순간 입술을 사리물었으나 곧 굽히지 않고 따져 물었다.
"뭐, 외부인? 지금 나를 외부인이라고 했니?"
"모르셨습니까? 고모님의 위치를 제가 직접 수고롭게 알려드려야 합니까?"
유진의 일침은 매서웠다. 그는 모욕감에 파들거리는 레놀드 부인을 뒤로한 채로 이번에는 싸늘한 눈빛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휴버트, 언제부터 에른스트가 이렇게 외부인 마음대로 설쳐도 되는 곳이 되었지?"
"죄송합니다, 공작님."
"평소 입버릇처럼 달고 있던 품위는 어디에 가져다 버리고 이리 경박한 짓거리를 하십니까, 고모님?"
"뭐, 뭐라고······."
"참아드렸을 때 적당히 하셨어야죠. 제가 이 꼴을 보고도 그냥 넘어갈 것이라 여기셨다면 저를 너무 우습게 보셨습니다."
시야에 번지는 미소가 잘 벼려진 칼날처럼 소스라칠 정도로 냉정하고 날카로웠다.
지금의 그는 얼마 전 침대에 누워 무력감에 몸서리치던 소년이 아니었다. 부모님을 잃은 직후 그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노력하던, 그러나 어딘가 무리하는 것처럼 위태롭게 느껴지던 소년도 아니었다.
이제껏 그를 고뇌하게 만들던 나약함의 잔해를 모조리 걷어낸 유진이 나를 향해 말했다.
"하리, 이리 와."
그 자리에 있는 누구도 감히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유진은 나를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렸다. 분위기에 눌려 어느덧 몸부림을 멈추고 있던 카벨이 잔디에서 일어나는 나를 붙잡아주었다.
우리가 다가가자 유진이 레놀드 부인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하리에게 정중히 사과하셔야 할 겁니다."
"못 하겠다면?"
레놀드 부인은 유진이 자신을 향해 고압적인 태도로 말하는 것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이를 악물며 반문했다.
그러자 그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제 전부를 걸고 오늘 일을 후회하게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 직후 레놀드 부인이 '하!' 헛웃음 쳤다. 네가 감히 내게 그럴 수 있겠냐는 듯한 비웃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미소는 이윽고 서서히 사그라졌다.
유진은 여전히 웃음 한 조각 담기지 않은 고요한 눈빛으로 마주한 사람을 조용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심해까지 얼어붙은 바다처럼 더없이 차디찼다.
레놀드 부인도 유진의 말이 뼛속까지 진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듯했다.
"지금 고작 이따위 계집애 하나 때문에 나를 이리 대하는 것이냐? 착각하지 마라. 피 한 방울 안 섞인 이런 여자애를 죽은 네 부모처럼 아리나라도 된 양······."
"물론 이 아이는 아리나가 아닙니다."
단호한 음성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나는 손끝을 움찔했다. 하지만 그의 싸늘함은 나를 스치는 일 없이 오직 눈앞에 있는 사람만을 겨냥하고 있었다.
"고모님이야말로 착각하고 계신 것 같군요."
"뭐······."
"하리는 이미 그 자체로 에른스트입니다."
그 순간 나는 다른 사람들과 약간 다른 의미로 숨을 멈추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고개 들어 유진을 쳐다보았지만 그는 흔들림 없는 표정과 어조로 레놀드 부인을 향해 재차 냉랭히 일갈했다.
"고모님이 이해를 못 하신 것 같으니 다시 말씀드리지요."
레놀드 부인은 유진이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하지 못한 듯 얼굴을 굳힌 채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다.
"하리는 우리의 가족이니 이 아이에 대한 모욕은 곧 에른스트에 대한 모욕이 됩니다. 그리고 저는 에른스트를 향한 모욕을 절대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습니다."
"그런······."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시겠습니까?"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말은 오늘부로 레놀드 후작 부인이 에른스트를 적으로 돌렸다는 의미였으니까.
"그러니 고모님이 지금 하리에게 가한 위협은 곧 저를 향한 위협이자 에른스트에 대한 위협인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얼음송곳 같은 파르스름한 음성이 짙은 어둠을 갈랐다.
"고모님은 섣불리 제 사람을 건드린 대가를 치르셔야 할 겁니다."
아까의 기세는 모조리 사라진 창백한 얼굴로 레놀드 부인이 입술을 깨물었다.
"에른스트에서 당장 나가십시오. 제 손으로 당신을 직접 끌어내기 전에."
유진이 끝까지 서릿발 같은 태도로 명령할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레놀드 부인은 백지장 같은 얼굴을 한 채 제자리에서 부들거리다가, 기사들이 그녀를 끌어내기 위해 다가온 뒤에야 발길을 뗐다.
"나를 이렇게 대한 걸 후회할 거다, 유진!"
눈앞에서 사라지기 직전 레놀드 부인이 외쳤지만 유진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나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그의 시선이 넘어지면서 쓸려 피가 나는 데다 풀과 흙이 묻은 내 몸을 스쳤다. 그리고 이내 빨갛게 부었을 것이 분명한 뺨에 닿았다.
"꼴이 이게 뭐야."
나는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하는 그의 얼굴을 아무런 말도 못 하고 바라보았다.
"왜 바보같이 그러고 끌려 나가? 도와달라는 말도 못 해? 벙어리야? 하다못해 소리라도 질렀어야 할 것 아니야!"
분노 어린 유진의 목소리가 귓가에 박혀 들었다.
이제 보니 유진은 급히 뛰어온 것처럼 헝클어진 머리를 한 채 신을 구겨 신고 있었다. 카벨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도 가벼운 실내복 차림이었다.
언제나 무서울 정도로 틈 하나 없이 단정하고 침착하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얘한테 뭐라고 하지 마! 고모가 미친 사람처럼 막 끌고 나갔단 말이야!"
카벨이 나를 향해 화를 내는 유진을 향해 마주 소리 질렀다.
"뭐야? 다들 거기서 뭐 해?"
그때, 자다가 깬 듯한 행색의 에리히가 저택 안에서 살그머니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눈을 비비며 다가오다가 나를 보고 멈추어 섰다.
"어······."
당혹감으로 굳어진 에리히의 얼굴을 보고 유진과 카벨도 다시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직후 그들 역시 그에 못지않은 표정이 되어 자리에 굳어졌다.
투둑. 툭.
나는 뺨을 타고 흘러 밑으로 뚝뚝 떨어져 내리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에른스트 부부가 죽었을 때도 미처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 이번에는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내렸다.
"너, 너 아파서 우는 거야? 아, 하긴 당연히 아프겠지."
나를 '가족'이라고 했다.
"뭐야, 무슨 일이 있었는데? 얼굴이랑 다리는 또 왜 이래? 설마 카벨 형이 때렸어?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도와 달라고 아무리 소리쳐도 모른 척할까 봐, 너 같은 거 어떻게 되든 알 바 아니라고 할까 봐 무서웠다.
"나 아니야! 내가 얘를 왜 때려?"
그런데 나를 가족이라고······.
"야, 야아, 내가 고모 때려 주고 올까? 그럼 되겠어? 그래, 내가 때려 주고 올게!"
가족이라고······.
"울지 마."
유진이 울고 있는 나를 향해 무릎을 굽혔다. 그 역시 다른 형제들처럼 당황한 눈치였다.
"너한테 화낸 거 아니야. 난 그냥······."
하지만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이윽고 나를 달래는 데 실패한 유진이 잠시 동안 입을 다물고 물끄러미 나를 보다가 손을 뻗었다.
"미안해."
복잡한 심경을 담은 억누른 속삭임이 귓가를 스친 직후, 다소 투박한 손길이 내 얼굴에 닿았다. 또 왈칵 눈물이 쏟아져서 나는 겨우겨우 작게나마 소리 낼 수 있었다.
"나, 도······."
발음은 뭉개지고 목은 꽉 잠겨서 아주 작은 목소리였지만 가까이에 있던 유진은 분명 들었을 터였다.
"가족이야?"
눈이 마주친 순간, 유진이 허를 찔린 사람처럼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단지 내 질문이 뜻밖이었을 뿐이라는 듯 망설임 없이 대답해 주었다.
"당연하지."
나는 아마 죽을 때까지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넌 우리 동생이잖아."
아니,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지금 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할 수 있게 오늘 이 자리에서 죽고 싶었다.
"업혀."
아직 다리가 완전히 낫지 않았는데도 그는 내 앞에 선뜻 등을 보이고 앉았다. 나는 여전히 울면서 유진에게 업혔다.
나와 에른스트의 세 형제는 다 같이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 아래를 걸었다.
나는 바보였다.
사실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는데 그걸 내 발로 직접 뻥뻥 걷어차고 결국은 오늘까지도 에른스트에 남았다.
난 아마 죽어서도 이 집의 귀신이 될 거야.
저주라면 저주였다.
하지만 그래도 좋아.
내 눈물에 젖은 등이 축축할 텐데도 유진은 방에 돌아올 때까지 나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에리히가 내 토끼 인형을 다시 나한테 빌려주었다.
나는 그걸 끌어안고 실로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다.
눈을 뜨면 모든 것이 꿈일 것만 같던 행복한 밤.
그리고 그날이 내가 에른스트에서 보낸 유년 시절의 마지막 밤이었다.
10.5 그 오빠, 유진
"내 허락 없이 레놀드 후작 부인을 안으로 들인 게 누구지?"
깊은 밤, 에른스트의 사용인들이 한자리에 소집되었다. 그들을 불러 모은 것은 올봄에 새로 에른스트의 공작이 된 어린 도련님이었다.
"오늘 저녁 저택 내의 사용인들이 다수 해고된 것을 알고 있겠지."
하지만 눈앞에 모인 이들을 훑는 눈동자는 어리다고 얕잡아볼 수 없을 만큼 냉혹했다.
"너희들이 그에 속하지 않은 이유는 에른스트를 배신한 자들이 아니라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