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그 오빠들을 조심해 38화
"내가 지금까지 쥐새끼 같은 계집애 하나 어찌할 수 없어서 그냥 둔 줄 아느냐?"
아무도 나를 에른스트로 인정하지 않는데, 나는 홀로 나 자신을 에른스트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죽어 나간다 해도 유진이 뭘 어쩔 수 있을까? 카벨은? 에리히는? 그 애들이 널 도와줄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그 아이들이 설마 진짜 널 여동생으로 여긴다고 착각하고 있는 거니? 감히 네 주제도 모르고?"
그래서 뱃속에서부터 절절 끓는 이 분노를, 슬픔을, 고통을 도저히 없는 것처럼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애초에 아리나의 대용품이었던 년이 에른스트의 성을 그 천한 이름 뒤에 달게 되더니 끝 모르고 오만방자해졌구나."
그녀의 말이 맞았다. 뒷골목에서 살던 비천한 계집애가 에른스트에서 20년을 지내더니, 정말 스스로가 뭐라도 된 양 오만해졌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진짜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들의 진짜 여동생이라도 되는 것처럼 혼자서 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이래서 천한 것들은 안 되는 거다. 한번 단맛을 보여 주면 개미떼처럼 끝도 모르고 탐욕을 부리며 꼬여 들거든."
잠시 잊고 있던 현실을 깨우치게 되었다.
삶을 다시 한번 시작하게 되어도 이전과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네 주제를 알려무나."
레놀드 부인의 말과 같은 상황이 되었을 때, 그들이 나를 도와줄까?
내가 이곳에서 필사적으로 지키고 싶은 것들도 과연 그런 나를 지켜줄까?
"버러지 같은 년."
자신, 없어.
나는······.
정말 비참하게도······.
자신이 없었다.
***
"너 거기서 뭐 해?"
레놀드 부인이 돌아가고 난 후 나는 한밤중의 유진이 그랬던 것처럼 1층 현관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다만 그와는 보고 있는 방향이 달랐다.
내 눈앞에 크게 솟아 있는 문.
저 문을 열고 나갈까 말까,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수도 없이 생각했다.
옆에서 의아한 카벨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래도 한동안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뭐 하냐니까?"
그리고 잠시 후 문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 너······."
나는 평소처럼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인지 카벨은 입을 뻐끔거리며 두 눈을 약간 크게 떴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밥 먹자."
느닷없는 내 말에 카벨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리히도, 카벨 오빠도, 유진 오빠도 다 같이 밥 먹자."
"아니, 지금 밥이 대수가 아니라 너 왜······."
"나랑 밥 먹어."
나는 둘째 진상의 팔을 붙잡고 이번에는 에리히를 찾아갔다. 나한테 질질 끌려오는 카벨이 당황한 듯이 어버버거렸지만 그냥 모르는 척했다.
"에리히, 밥 먹자."
에리히에게 안겨 있던 페니가 우리를 반기며 컹컹 짖었다.
"안 먹어."
에리히는 이번에도 단칼에 거절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먹어. 식당에서······."
"입맛 없어. 너나 가서 먹어."
에리히가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다시 한번 말했다. 내 입도 서서히 다물어졌다.
카벨은 왠지 내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끼는지 옆에서 우왕좌왕하며 침묵하는 나를 힐끔거렸다.
"왜······."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조금 이상했다.
"왜 다들 식당에서 밥 안 먹어?"
그렇게 말하는 내가 방금 전과 다른 느낌이라 그런지 마침내 에리히도 고개를 들었다.
"밥 정도는 같이 먹을 수도 있잖아."
이번에는 에리히가 나를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식탁이 그렇게 큰데 왜 다들 따로 밥 먹어?"
두 쌍의 푸른 눈동자가 제각기 알 수 없는 빛을 품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그동안 계속 속에 묵혀왔던 말을 비로소 토해냈다.
"난 혼자 밥 먹기 싫단 말이야."
에리히의 입이 벌어졌다. 그는 지금의 상황에 무척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놀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는 모르겠다는 듯, 그저 입술을 달싹이기만 했다.
"왜 매일, 매일 나 혼자 식당에서 밥 먹어야 돼?"
옆에 있던 카벨도 마찬가지였다.
"왜 아무도 나랑 같이 밥 안 먹어줘?"
횡설수설하며 '아, 아니, 난······' 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내 귀에는 잘 닿지 않았다.
"너희들 진짜 나빠."
사실 두 사람 입장에서는 황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도 오늘만큼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돌아설 수가 없었다.
"진짜 미워."
그래서 굳어 있는 두 사람에게 그렇게 말한 뒤 카벨의 팔을 놓고 뒤돌아 걸었다.
어찌 보면 분에 넘치는 배부른 투정이었다.
레놀드 부인의 말처럼 주제도 모르고 끝 모를 욕심을 부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원래 내가 있던 멜팅턴에서의 생활은 아주 궁핍했다. 작은 빵 조각 하나 살 돈이 없어서 집 밖에 있는 눈을 녹여 먹어야 했을 정도로. 그나마 엄마가 건강할 때는 생활이 조금 나았지만 이제 와서는 그마저도 까마득하게 먼 과거로만 느껴졌다.
엄마는 폐렴으로 죽기 한참 전부터 병을 달고 살았다. 끼니조차 제대로 때우지 못하는 형편에 약 같은 것을 살 수 있을 리 없었으니, 사실상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눈 뜨고 엄마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세상에는 온갖 진귀한 약을 구해와 바쳐도 소용이 없던 아리나 같은 경우도 있다.
그러니 엄마가 죽은 것도 그런 어쩔 수 없는 종류의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후에는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알량하게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사실 엄마가 죽은 후 내가 그 집에서 배고픔보다도 더욱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숨이 막힐 것만 같은 침묵이었다.
다 시들어 가는 꽃을 겨우 몇 송이 팔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 언제나 쥐 죽은 듯 조용한 공기가 무겁게 나를 짓눌렀다.
밖은 옆집의 아기가 우는 소리, 술에 취한 아저씨가 인사불성으로 내지르는 고성, 부부의 말싸움과 그 밖의 온갖 소음들로 넘쳐 났지만, 이상하게도 집 안에만 들어서면 마치 바깥의 세계와 분리된 것만 같은 소름 끼치는 적막감이 나를 뒤덮었다.
얇은 이불을 덮고 가만히 누워 있으면 꼭 차가운 겨울 바다에 퐁당 빠져 그 아래로 서서히 가라앉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침묵의 밤을 보내고 나면 또다시 혼자만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날이 밝아도 아무도 나를 깨우러 오지 않고, 또 내가 밥을 먹었는지, 오늘 하루는 무엇을 할 예정인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은 퍽 이상한 기분이다.
나는 가끔 차가운 공기가 맴도는 방에 혼자 누워 '사실 나는 지금 죽어 있는 상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실제로 나는 이미 전날 밤 잠든 상태로 죽어 영혼인 채로 이 방에 남은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만약 내가 그 집에서 정말 조용히 혼자 죽었다 해도, 그것을 알아차릴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아마 옆집에 사는 사람이 한참 후에야 집 안을 들여다보고서는 내 시신을 집 뒤쪽의 구덩이에 가져다 버렸겠지.
그동안 멜팅턴에서 살다 죽은 사람들을 처리했던 대로, 내 엄마에게 그랬듯이, 그래도 이번 달에는 그냥 지나갈 줄 알았더니 또 시체 한 구가 나왔다고 한껏 귀찮아하면서.
그러니까 사실 내가 그날 에른스트 부부의 손을 잡은 데에는 더 이상 배를 곪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로 자리하고 있지는 않았다.
에른스트에 온 이후, 나는 세 형제에게 핍박받고 많은 괴롭힘을 받았다. 하지만 우리가 조금 더 나이가 들었을 때부터는, 적어도 이 집에 있는 동안 진심으로 외롭다고 느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사는 동안 그들이 미워 죽겠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다.
너희들 같은 거, 결혼해서 이 집을 나가고 나면 두 번 다시 안 볼 거라고. 나는 그냥 이 집에서 편하게 살려고 너희들의 비위를 맞춰 주면서 좋아하는 척한 것뿐이라고.
세월이 흘러 함께 보내는 시간이 익숙해졌을 때.
어쩌면 이제는 그들이 나를 받아들인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삐걱거렸었지만, 여전히 말은 밉게 하는 세 형제였지만, 그래도 언젠가부터 내가 다가가면 거부하지 않게 되었으니까.
내가 웃으면 쌀쌀맞게 식어 있던 얼굴을 슬쩍 부드럽게 풀고, 내가 손을 잡으면 치우라고 말하면서도 결국은 못 이긴 척 뿌리치지 않았으니까.
나를 그들의 여동생이라고 인정하듯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에른스트에 있는 나를 부정하지도 않았으니까.
누구도 직접 말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예전처럼 나를 배척하지도 싫어하지도 않는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늘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서 가끔은 묻고 싶었다. 아직도 나를 미워하냐고.
하지만 물을 용기가 없어서 결국은 이 집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도 입을 다문 채 그들을 보며 그저 바보처럼 웃기만 했다.
"진짜 미워······."
그러니까 이렇게 바보같이 우는 모습 같은 건 안 보일 거다.
그들 때문에 이렇게 눈물이 날 만큼 슬프다는 것도 절대 들키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그들의 진짜 동생이 되고 싶었다는 것도······.
죽어도 말하지 않아.
"미워······."
그래도 자꾸만 속절없이 눈물이 나서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을 더 울었다.
***
콰앙!
그날 밤, 느닷없이 내 방에 불청객이 들이닥쳤다.
"맹랑한 년!"
나는 침대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팔을 붙잡혀 끌려 나갔다.
"재수 없는 년이 오라버니를 잡아먹더니 이제는 유진까지 구워삶아서 에른스트를 좌지우지하려고 해?"
어쩐 일인지 대노한 레놀드 부인이 거칠게 나를 잡아끌었다. 나는 영문을 모른 채로 방을 나서게 되었다. 주위에 있던 사용인들이 깜짝 놀란 듯 우리를 쳐다보았지만 누구 한 사람 나서서 도와주지 않았다.
"너도 유진도 두 번 다시는 내 앞에서 기어오르지 못하게 해주마."
나를 어찌할 생각인지는 몰랐지만 지금이 위험한 상황이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이거 놔요!"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팔을 붙든 손아귀의 힘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다. 게다가 나는 아직 9살 어린 여자애의 몸이었다. 끌려가지 않으려 힘을 줬으나 소용이 없었다.
"이거 놔······ 아악!"
철썩!
다음 순간 눈앞에 불똥이 튀었다. 한쪽 얼굴에 격통이 인 직후 나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위이잉.
귀에 웅성이는 이명이 울렸다. 골이 뒤흔들리는 느낌에 어지러워 나는 바닥에 손을 짚고서도 휘청거렸다.
"얌전히 따라오지 못해?"
다시금 내 팔을 붙드는 거친 손길이 느껴졌다. 내가 균형을 잡지 못해 비틀거리는데도 그 손은 나를 질질 끌다시피 잡아당겼다.
"하리 아가씨!"
뺨에 찬바람이 닿아 저택 밖으로 나온 것을 알았다. 경악한 휴버트의 목소리와 레놀드 부인의 목소리가 번갈아 들렸지만 뭐라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귀에는 자꾸만 이명이 들리고 머리가 어지러워서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바로 그때, 이번에는 카벨의 목소리가 귀에 울렸다.
"헉, 쟤 왜 저러고 있어? 어디 아파?"
놀란 카벨이 달려오는 소리가 초겨울 공기에 휩쓸려 밀려들었다. 그제야 나는 내가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잔디 위에 볼품없이 엎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뭐야······?"
어느덧 다가온 카벨이 앞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눈이 마주친 직후 그의 얼굴이 급속도로 굳어졌다.
"설마 때렸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