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그 오빠들을 조심해 37화
"멜리사가 애들 교육을 어떻게 시킨 건지, 원."
유진이 다친 후에도 레놀드 부인은 계속해서 에른스트에 출입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저런 식으로 은근슬쩍 에른스트를 모욕하는 언사를 내뱉곤 했다.
나는 그럴 때마다 가슴 언저리가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나마 최소한의 선이라도 지키는 듯하던 그녀가 이번에는 그것을 넘어버렸다.
"한 명은 절름발이에, 한 명은 망나니, 한 명은 반벙어리에 나머지 하나는 어디서 굴러 왔는지도 모를 추잡한 계집이라니. 어쩌다 에른스트 꼴이 이 지경이 되었을까."
레놀드 부인이 혀를 차며 혼잣말처럼 읊조린 순간 나는 벼락처럼 등줄기에 꽂히는 모멸감에 이를 악물고 말았다.
차라리 그녀가 모욕한 것이 나 하나였다면 이렇게까지 구역질이 나는 기분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에리히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는지 내 옆에 조용히 서 있었다. 부모님이 죽은 후 툭 하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는 날이 늘어난 에리히이니, 지금도 다른 생각에 잠겨 있을지 모를 노릇이었다.
혹은 그렇지 않아도 방금 전 레놀드 부인의 목소리가 작았기 때문에 듣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나를 모욕하는 것은 차라리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세 명은 조카가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저런 식으로 말할 수 있지?
"어떻게 그런······."
"이제 가십니까, 고모님?"
만약 그때 유진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나는 레놀드 부인에게 이 감정을 가감 없이 표출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데도 이 순간만큼은 어찌할 수 없는 분노에 휩싸여서.
"어머, 유진. 너도 있었니?"
유진이 표정 없는 얼굴로 지팡이를 짚고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나는 애써 속에서 끓고 있는 감정을 삭였다
레놀드 부인은 유진이 1층으로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가 앞으로 다가오고 나서야 가증스러운 말을 내뱉었다.
"다리도 불편하니 굳이 나와 볼 건 없는데."
"고모님이 돌아가시는데 제가 어떻게 가만히 있겠습니까."
유진은 레놀드 부인의 앞에 서서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조심히 살펴 가십시오, 고모님."
나는 눈앞에 있는 붉은 입술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피어나는 것을 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
"그러니까 너 말이야, 그 아줌마랑 그렇게 붙어 있으면 안 되는 거라고."
그날 밤 나는 분통이 터져서 투덜거렸다.
"그 아줌마가 아무리 너한테 살갑게 잘해 줘도, 그건 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거란 말이야."
'졌다, 이겼다'를 논할 문제가 아니란 걸 아는데도 왜인지 레놀드 부인에게 진 느낌이어서 성질이 났다.
"난 그 아줌마 진짜 싫어. 전에도 싫었는데 지금은 더 싫어졌어."
예전에는 내가 어려서 뭘 몰랐었나 보다. 레놀드 부인이 멤마 부인보다 낫다고 생각했었다니. 화가 났지만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게 더욱 분했다.
오늘 낮에는 어떤 사용인이 유진의 허락 없이 집무실에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청소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내 생각에는 그냥 다 핑계 같다. 그 사용인이 레놀드 후작가에서 들어온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에 더욱 그런 의심이 들었다.
'그런데 못 보던 얼굴이군. 본래 청소 담당은 어디 있지?'
'지난주 그만두었습니다.'
'그래?'
그러나 유진은 잠시 동안 하녀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 일을 그냥 넘겼다.
설마 그가 정말 수상함을 감지하지 못해 그랬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진이 아무리 어른스럽다 한들 이제 겨우 14살이다.
나는 유진도, 이 에른스트도 풍전등화 같은 내 신세만큼이나 불안해 보여서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역시 27살이던 때가 나았어."
도대체 이 시기를 어떻게 거쳐서 어른이 되었던 건지 모르겠다. 첫 번째보다 지금의 상황이 더 나쁜 것 같다고 한다면, 그냥 내 착각인 걸까?
그때에는 에른스트 부부와 함께 카벨이 사고에 휘말리는 일도 없었고, 유진이 지금처럼 다리를 다치는 일도 없었는데.
게다가 에른스트의 저택 내부에 떠도는 이 기묘한 분위기.
마치 내가 알던 에른스트가 아닌 것 같아.
콰당!
"앗!"
그때, 앞서 걷던 에리히가 제발에 걸려 넘어졌다.
나는 다가가려다 말고 혹시 이러다가 에리히가 깨어나는 게 아닐까 싶어 잠시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멍하니 앞만 보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살금살금 걸어가 셋째 진상을 일으켜 세웠다.
"앞에 아무것도 없는데 왜 넘어지고 그래?"
"······."
"멍들면 안 되는데."
이러다가 혹여 에리히가 자기 몸에 일어난 상황을 눈치챌까 조금 걱정되었다. 물론 내가 앞장서 꽁꽁 숨길 생각까지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는지, 에리히의 몽유병은 나중에 저절로 나았기 때문에 그때까지 모를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셋째 진상이 수상함을 감지하기 전에 내일 아침에 발이라도 걸어서 넘어뜨려야 하려나.
나는 남몰래 그런 고민을 하며 에리히의 무릎을 탁탁 털어주었다.
"어."
그리고 내 손을 잡아 오는 온기에 나는 무심코 입을 벌리고 말았다.
방금 전 넘어지면서 인형을 떨어뜨린 탓일까. 에리히는 내 손을 토끼 인형의 귀로 생각한 것 같았다.
옆을 보니 여전히 초점 없는 눈으로 앞을 보고 있는 셋째 진상의 얼굴이 보였다. 새하얀 잠옷 탓인지, 그것도 아니면 어둠 속에서 비치는 시린 달빛 때문인지, 그런 에리히의 얼굴은 잠시 마음이 착잡해질 정도로 연약해 보였다.
"그만 가서 자자."
나는 잠시 동안 그의 얼굴을 말없이 바라보다가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잡고 늦은 밤의 복도를 걸었다. 유령처럼 소리 없이, 금색 털의 강아지 한 마리를 호위처럼 등 뒤에 둔 채. 눈앞에 유진의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너희들, 왜······."
지팡이 없이 움직이고 있기 때문인지 유진이 복도에 서 있는 줄도 몰랐다. 잠이 오지 않았던 건지, 그는 이 늦은 시간에 방 밖으로 나와 있었다.
에리히와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에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는 곧 위화감을 느낀 듯 에리히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에리히는 여전히 멍한 얼굴을 한 채 유진을 향해 느리게 걸어가고 있었다.
다음 순간, 벽을 짚고 있던 유진의 손이 밑으로 툭 떨어졌다.
나는 그런 유진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
어둠 속에서 숨이 막힌 것 같은 얼굴을 한 채 동생을 아연히 바라보고 있는 유진의 위로 차가운 달빛이 쏟아져 내렸다. 그는 에리히가 앞을 스쳐 지나갈 때까지 차마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했다.
"에리히······."
마침내 목이 멘 듯한 작은 속삭임이 귓가에 새어 들었다.
어차피 내가 에리히와 함께 방에 들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나는 다른 쪽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의 귀를 내 손목 대신 에리히의 손에 들려주었다.
에리히는 토끼 인형을 질질 끌며 페니와 함께 방으로 돌아갔다.
"언제부터······?"
그 모습을 마지막까지 지켜보다가 뒤돌아서자, 유진이 우두커니 서서 손에 얼굴을 묻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목이 졸린 듯 가라앉은 음성에서는 쉰 소리가 나고 있었다. 나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라서 머뭇거렸다.
그리고 문득 얼굴을 감싼 유진의 손이 작게 떨리는 것을 목격했다.
"괜찮아."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유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금방 다 괜찮아질 거야."
물론 유진은 이런 내 말뿐인 위로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빠는 잘하고 있어."
나는 어디에도 기대지 못하고 이번에도 역시 제 안의 괴로움과 홀로 싸우고 있는 그를 향해 몇 번이나 반복해 말해주었다.
"괜찮아, 유진 오빠."
망설이다가 결국 그에게 손을 뻗지는 못 했지만 이 속삭임만큼은 닿을 수 있기를.
"괜찮아······."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거듭 읊조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
"내가 너를 왜 불렀는지 아니?"
며칠 후, 어쩐 일로 레놀드 부인이 에리히를 떼어놓고 나를 불렀다.
나는 마주한 사람을 조용히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그렇겠지."
레놀드 부인과 이런 식으로 단둘이 얼굴을 맞댄 것은 지난 생에도 없던 일이었다.
"널 고아원에 보낼 생각이란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한 말은 어느 정도 예상하던 것이었다.
"세인트 마리에 내가 아는 연줄이 있으니 생활하기에 그리 나쁘지는 않을 거야. 솔직히 더러운 뒷골목을 전전하며 살던 네게는 분에 넘치는 일 아니니?"
누구보다 귀족다운 그녀에게는 내가 퍽 못마땅하기도 했을 터였다.
"멜리사와 오라버니한테 망령이라도 깃들었던 건지, 이런 버러지 같은 계집애의 어디가 아리나와 닮았다는 건지 나로서는 도무지 모르겠다니까."
그 후로도 그녀는 한참이나 더 죽은 에른스트 부부의 이해할 수 없는 안목과 내 출신의 비천함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나는 그것을 듣다가 레놀드 부인에게 물었다.
"유진 오빠는 뭐라고 하던가요?"
"뭐라고?"
그녀는 내가 유진의 이름을 들먹이자 눈동자를 싸늘하게 빛냈다.
"에른스트의 일을 고모님 혼자 결정하실 권리는 없어요. 그 정도는 알고 계시겠죠."
"이런 맹랑한 것. 유진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유진 오빠가 동의했다고요?"
"당연한 것 아니니?"
"고모님은 거짓말쟁이시네요."
레놀드 부인이 한순간 움찔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9살 어린애가 아니라 이 에른스트에서 20년간 뼈를 묻어온 27살의 하리 에른스트로서 그녀를 향해 흔들림 없이 말했다.
"유진 오빠는 이런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지 않아요."
설령 나를 이 집에서 내보내고 싶어 하는 게 그의 진심이라 해도, 이건 그의 방식이 아니었다.
"이런 저급하고 졸렬한 방식은 에른스트에 어울리는 것이 아니죠. 고모님은 더러운 뒷골목을 전전하던 근본 없는 계집인 저보다도 더 에른스트에 대해 모르시는군요."
나는 진짜 에른스트가 아니었지만 이런 게 에른스트다운 긍지가 아니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뭐? 이런 건 에른스트의 방식이 아니야?"
콰당!
다음 순간, 나는 머리채를 휘어 잡혀 레놀드 부인의 앞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건방진 년. 감히 누구 앞에서 잘난 척하며 입을 놀리는 것이냐?"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형형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상체가 앞으로 확 기울어지면서 반사적으로 테이블을 짚은 손에 찻잔이 걸려 카펫 위로 떨어져 내렸다. 뜨거운 찻물에 손이 젖었지만 화끈거리는 피부가 아픈 줄도 몰랐다.
"운 좋게 에른스트의 성을 달게 되었다고 천한 근본마저 가려지는 줄 아느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거만을 떠는 꼴이라니."
머리카락을 붙든 거친 손길에도 나는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레놀드 부인을 마주했다.
"그래, 유진을 믿고 이리 건방지게 입을 놀리는 건가 보구나."
그냥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었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내 의지대로 되는 일이었다면 애초에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녀가 유진의 대변인이라도 된 양 떠들어 대는 것을 조용히 듣고만 있었을 터였다.
"내 말이 거짓이라 해도, 그 애가 널 지켜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참지 못해 폭소할 만큼 우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