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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36화 (36/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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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 36화

그리고 나는 그날 밤 또다시 침대 밖으로 나온 에리히가 무사히 방으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고 오는 길에 1층 현관 앞에 서 있는 검은 그림자를 발견하고 소스라쳤다.

자세히 보니 그건 유진이었다.

"유······."

그를 부르려다 말고 나는 말을 멈추었다.

달빛이 사선으로 얼굴을 가로지르는 그곳에서, 유진은 마치 홀로 시간을 잊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여기에 있던 걸까? 그러고 보니 오늘은 어디로 외출을 했는지 들은 기억이 없었다. 카벨과 그런 일이 있던 후에 자리를 비웠으니 슈마하가 아닐까 싶기는 한데.

"······."

하얀 달빛 때문인지 유진의 낯빛은 약간 창백해 보였다. 언젠가부터 차가운 무표정을 고수하게 된 유진은 지금도 얼음 결정으로 빚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꼿꼿이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기실 그의 눈동자는 텅 비어 있는 것 같았다.

어느덧 긴 여름도 지나 가을에 접어든 지금, 주위에는 제법 서늘한 공기가 맴돌고 있었다.

나는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의 어둑한 눈동자와 이를 악물고 있는 듯한 입매, 그리고 멀리서 보기에도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만큼 꽉 쥐어져 있는 주먹을 시야에 담았다.

잠시 후 유진은 나를 발견하지 못한 듯 무거운 걸음을 옮겨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런 그의 모습을 숨을 죽인 채로 바라보았다.

유진이 한밤중에 홀로 우두커니 서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를 그렇게 만든 일이 무엇인지도 짐작하기 어려웠다.

다만 그 밤의 기억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내 안에 남아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안타까운 마음을 동반한 채로.

***

다음 날 오전, 유진은 자신의 외출을 알렸다.

듣기로는 오늘이 에른스트의 직계와 방계를 막론한 어른들 간의 모임이 있는 날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오늘 저택에는 레놀드 부인도 방문하지 않았다.

"오늘은 날씨도 궂어서 걱정이군요. 저녁쯤에는 폭우가 쏟아질 예정이라고 들었습니다만."

"친선 도모의 목적도 아니니 하고 싶은 말만 전하고 오면 그만이야. 그리 늦지는 않을 테니까······."

유진은 간만에 다 같이 그를 배웅하러 나온 우리 세 사람을 보며 잠시 뜻 모를 표정을 짓다가 다시금 휴버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내가 올 때까지 동생들을 부탁해."

"알겠습니다, 공작님."

그리고 뒤돌아서는 유진의 뒤에서 카벨이 잠시 어물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형, 조심해서 다녀와."

그 말에 문으로 향하던 걸음이 멈칫했다. 곧 유진이 우리를 돌아보며 여트막하게 미소 지었다.

"그래, 다녀올게."

그때 그의 뒷모습이 왜 그렇게 두 눈에 밟혔는지 모르겠다.

유진은 저택을 나섰고, 그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창밖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르릉!

"비 많이 온다."

우리는 오랜만에 셋이서 놀이방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물론 예전처럼 다 같이 활발하게 놀 기분들은 아니라, 각자 따로 떨어져 앉아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창가에 서서 창밖을 보던 카벨이 먼저 말하자 잠시 후, 페니를 끌어안고 있던 에리히가 지나가듯 툭 혼잣말 같은 음성을 내뱉었다.

"비 싫어."

투둑, 투둑.

나는 창문에 부딪히는 빗방울을 보며 그 말에 동의했다.

그리고 그날, 유진에게 사고가 일어났다.

그가 에른스트로 막 돌아오려 했을 때 갑자기 옆에 서 있던 말이 난동을 부려 주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유진은 거기에 휘말려 다리를 다쳤다.

"울지 마. 난 멀쩡하니까."

침대에 기대앉은 유진은 더없이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마터면 영영 한쪽 다리를 못 쓸 뻔했다고 들었는데, 그는 혼자만 태연했다. 식은땀에 젖은 얼굴이나, 거칠게 갈라진 입술을 보니 통증이 큰 것이 분명했는데도 그랬다.

그 말에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울고 있던 카벨이 버럭 소리 질렀다.

"멀쩡하긴 뭐가 멀쩡해!"

"이 정도면 지나칠 정도로 멀쩡한 거지."

카벨은 아까부터 싸늘한 유진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옆에서 훌쩍이고 있던 에리히도 마찬가지였다.

"어른들은 뭘 하고 있었는데?"

나는 유진의 상태를 보러 온 의사와 다른 사용인들이 모두 방에서 나간 뒤 입을 열었다.

"그렇게 사람이 많았는데, 오빠가 위험할 때 그 사람들은 뭘 하고 있었는데?"

내 얼굴은 아마도 유진 못지않게 차갑게 식어 있을 터였다. 내 물음에 카벨과 에리히를 다독여 달래고 있던 유진이 낮게 속삭이듯 대답했다.

"글쎄, 뭘 하고 있었을까?"

나는 그의 검은 눈동자에 어둑하고도 날카로운 냉소가 스치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신속하게 굴복시킬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겠지."

유진을 공격한 말은 그 후 사살되었다고 들었다. 하면 날뛰는 짐승을 굴복시킬 방법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의미일까?

그런데 왜 내 귀에는 그 말이 다르게 들리는 걸까?

"나는 스스로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직도 새파란 애송이였다는 걸 알았어."

그때, 내가 유진에게서 발견한 것은 화인 같은 분노와 굴욕, 또 자괴감과 열패감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었다.

"그래, 이런 무력감은 정말이지 처음이야."

그리고 그 무엇보다 강렬한 절망과 증오에 먹힌 검은 눈동자가 내 앞에서 부서져 내렸다.

10. 넌 우리 동생이니까

다리를 다친 유진은 예전처럼 자유로운 보행이 어려워졌다.

그가 한쪽 다리를 영영 절며 살아야 한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유진은 소문이 퍼지도록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 후 그가 늘 지팡이를 짚고 다녔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소문을 곧이곧대로 믿었다.

"이래서 근본 없이 자란 천것들은."

가을이 깊어진 지금도 나는 이 악독한 여자한테서 예절 수업을 빙자한 악담을 듣고 있었다.

"아무리 노력을 기울여도 영애한테서 흐르는 이 천박함은 도무지 어찌할 도리가 없네요."

어느 순간부터 멤마 부인은 내게 회초리를 드는 거로도 모자라서 내 태생을 조롱하는 폭언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에른스트 부인이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면서까지 영애를 딸로 들인 보람이 없지 않겠어요? 아니, 오히려 지금쯤은 에른스트 부인도 깊이 통감해 후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어른이니까, 당연히 저런 말에 일일이 상처받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생각하게 된다.

그냥 확 다 엎어버릴까?

"그나저나 유진 도련님도 큰일이에요. 지난 사고 때문에 다시는 오른쪽 다리를 예전처럼 사용하지 못할 거라니."

아닌데. 시간이 좀 더 지나면 다시 전처럼 멀쩡히 걸어 다닐 수 있을 거라고 했는데.

"물론 지고한 에른스트의 품위가 그런 것으로 떨어지리라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염려스럽긴 하네요. 뭐, 대외적인 자리에서는 다른 친척 어른들이 유진 도련님을 대신하면 되니 문제 될 건 없으려나요. 좀 더 시간이 지나 카벨 도련님이나 에리히 도련님이 장성하시면 동생분들에게 맡겨도 되고."

하지만 그런 말을 이 여자한테 해주지는 않았다. 가증스럽게 말로만 유진을 안쓰러워하는 척할 뿐인 이 여자에게 뭐 하러 그런 말을 해주겠는가.

"멤마 부인은 항상 유진 오빠를 도련님이라고 부르시네요."

내 말에 멤마 부인이 한순간 멈칫했다.

"오빠가 승계받은 지 벌써 시일이 오래 지났는데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으셨나 봐요? 앗,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쇠퇴해서 벽에 똥칠도 하게 되는 질병이 있다고 들었는데 멤마 부인도 혹시······."

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그녀를 향해 측은함과 동정과 충격이 담긴 눈빛을 보냈다. 원래 귀족들은 저급한 단어를 직접 입 밖에 내지 않아서 그러지 멤마 부인은 방금 전 내가 말한 '똥칠'이라는 소리에 경악한 눈치였다.

"어머, 그런 천박한 표현이라니 역시 영애는······."

"어맛, 죄송해요,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다 보니······. 혹여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제 스승님인 멤마 부인이 벽에 똥칠이나 할 법한 노망 든 아줌마로 조롱거리가 될까 봐 상상만으로도 너무너무 가슴이 아프지 뭐예요."

하지만 난 아줌마가 말했다시피 어차피 태생이 천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몇 번이고 말해줄 수 있다!

나는 멤마 부인이 파들거리며 분노하는 모습을 즐겁게 감상했다.

"회초리질을 당해야 그 말본새를 고치겠군요! 당장 치마를 걷으세요!"

그녀는 이번에도 나를 체벌해 혼내려고 했다.

나는 맞기 싫은 척 미적거리다가 멤마 부인의 앞에서 다리를 걷었다.

짜악! 짝!

내 말에 기분이 어지간히 상했는지 회초리질 하는 소리가 참으로 우렁차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제 처음 맞을 때만큼의 고통을 느끼지 않고 있었다.

내가 이 아줌마한테 회초리로 맞고 산 세월이 몇 년인데, 통증을 덜 방법 하나 강구하지 못했겠는가? 아마도 이 아줌마는 뼛속까지 귀족이라 모를 터였지만 내 다리에는 실라멘더의 꿀이 발라져 있었다.

그게 뭐냐 하면 꽃의 일종인 실라멘더가 만들어낸 분비물로, 이른 아침 숲에 가면 쉽게 채집할 수 있는 것이었다.

고매하신 귀족 나리들이야 굳이 저런 걸 필요로 할 일이 없지만, 없이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실라멘더의 꿀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바느질거리가 너무 많아서 손끝이 부르트다 못해 아릴 때, 또 한겨울 꽁꽁 언 강물에서 맨손으로 빨래를 해야 할 때, 이 실라멘더의 꿀을 손에 바르면 아주 좋았다.

처음에는 연고처럼 반 액체 상태이지만 바싹 마르면 투명하게 굳어져 피부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실라멘더의 꿀은 물에도 쉽게 씻기지 않고 손으로 잡아 뜯어야 했기 때문에 한 번 바르고 나면 오랫동안 유지가 되어 편리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귀족들이 사용하는 물건에 빗대자면 접착제나 가구에 윤이 나도록 덧바르는 코팅액에 가까웠다.

하지만 실라멘더의 꿀은 그런 광택이 나지 않았기 때문에 멤마 부인도 내 다리에 저런 게 발라져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물론 아예 타격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냥 생살에 회초리질을 당할 때보다는 훨씬 나았다.

"쓰읍, 저 아줌마는 대체 어디서 저런 기운이 나는 거지? 내일부터는 좀 더 두껍게 발라야겠네."

예전부터 어느 정도 친분을 쌓은 하녀들에게 실라멘더의 꿀을 얻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녀들도 청소나 빨래, 바느질 같은 일을 하기 때문인지 대부분 가지고 있더라. 크으, 역시 없이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없어선 안 될 생활필수품!

멤마 부인이 돌아간 후 나는 빨간 잉크를 꺼내 다리 뒤쪽에 심혈을 기울여 가로줄을 그었다. 꼬, 꼴이 좀 웃기긴 하지만 뭐 어때. 갑자기 다리가 멀쩡해지면 이상하게 여길 테니 나름의 눈속임이었다.

이 짓도 한 지 꽤 오래되었는데 저 아줌마는 모르는 걸 보니 내 위장술이 쓸 만한 모양이었다. 아니면 고매하신 귀부인의 상식으로, 차마 내가 이런 짓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거나.

뭐, 모로 가도 제도로만 가면 된다고, 나야 들키지만 않으면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었다.

"안녕히 가세요, 고모님."

그날 저녁, 나는 평소처럼 에리히와 함께 레놀드 후작 부인을 배웅했다.

"카벨은 어디에 있니? 어른이 가는데 인사는커녕 나와 보지도 않다니."

그런데 오늘따라 그녀는 카벨을 걸고넘어지며 눈썹을 슬그머니 추켜올렸다. 평소에는 카벨이 뭘 하든 신경도 안 쓰는 눈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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