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그 오빠들을 조심해 34화
"제가 닦아드릴게요!"
그리고 그녀의 엉망이 된 드레스를 닦아주는 척, 손에 초콜릿 잼을 묻히고 옷 위에 더욱 치덕치덕 펴 발랐다. 그녀의 우아한 베이지색 드레스는 금세 갈색 얼룩으로 물들었다.
"아앗! 제 손에 초콜릿이 묻은 줄 몰랐어요! 이건 물로 씻어야!"
"영애! 잠깐 기다······."
촤악!
어버버거리고 있던 멤마 부인이 소파 옆에 있던 협탁에서 화병을 집어 드는 나를 보고 급히 입을 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못 들은 양 그대로 화병 속의 물을 그녀에게 끼얹어버렸다.
"자, 이제 문지르면 닦일 것 같아요!"
"그만, 당장 그만두지 못해요?!"
멤마 부인의 새된 고함이 방 안에 울려 퍼졌다. 그때, 밖에서 소란을 들은 하녀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엉망이 된 방에 깜짝 놀라 서둘러 청소를 시작했다.
멤마 부인의 더럽혀진 드레스도 몇 명이나 달라붙어 닦기 시작했지만 얼룩만 번질 뿐, 조금도 깨끗해지지 않았다.
"이게 어떤 드레스인데!"
멤마 부인은 당연히 노발대발했다.
"죄송해요, 부인······."
나는 그녀의 옆에서 한껏 불쌍한 척하며 죄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멤마 부인은 그런 나를 노려보며 씩씩거리다가 이내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인사 한마디 없이 방을 나섰다.
"살펴 가세요, 멤마 부인."
나는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자리를 떠나는 그녀의 뒤에서 남몰래 썩은 미소를 지었다.
하, 좀 고소하다. 살아생전 저 여자가 저렇게 흥분해서 품위를 잃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줄이야. 귀족의 기품이니 뭐니 하면서 그렇게 고상한 척을 혼자 다 하더니.
하지만 방을 치우는 하녀 언니들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내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자애 시늉을 했다.
"언니, 미안해요."
나는 가까이에 있는 하녀에게 다가가 슬쩍 말을 걸었다.
"아니에요."
그러자 그녀는 단답식으로 대답하며 하아, 한숨을 내뱉었다. 말투나 표정으로 보았을 때, 내 실수로 괜한 수고를 하게 되어 짜증이 난 것 같았다.
"그런데 오늘 처음 보는 언니네요?"
사실은 며칠 전부터 눈여겨보고 있던 사람이었지만 티 내지 않고 물었다.
"예, 얼마 전부터 에른스트에서 일하게 되었답니다."
"식당에도 못 보던 언니들이 있던데."
"이번에 몇 명이 함께 차출되었어요."
하녀는 나한테 대충 대답하며 하던 일을 계속했다.
흐음. 일부러 '언니'라고 부르면서 말을 시켰는데 호칭을 정정해 주지도 않고, 그렇다고 제대로 인사를 한 것도 아니고. 지금도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네.
원래 있던 기존의 사용인들은 이렇지 않았는데 나를 무시하는 게 너무 한눈에 보였다.
"언니, 나도 도와줄게요."
"아가씨께 어떻게 이런 일을."
"저 일 잘해요. 많이 해봤거든요."
그러자 하녀의 얼굴에 '그렇겠지'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처음부터 예상했듯 내 출신을 알고 깔보는 것이 분명했다.
"제가 혼나요."
"고모님한테요?"
"네."
그 말을 듣고 나는 '머뭇머뭇', '어물어물' 2단 방어진을 펼치며 입을 우물거렸다.
"그러면 안 할래요······. 고모님 무서워······."
내가 발을 꼼지락거리며 풀이 죽은 티를 내자 하녀의 태도가 방금 전보다 약간 유해졌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녀에게 슬쩍 물었다.
"언니도 고모님한테 혼나는 거 무서워요?"
"마님은 예전부터 저희한테도 엄격하셨으니까요."
"아, 언니 원래 레놀드 후작가에 있던 하녀 언니구나."
내 말에 하녀가 멈칫했다. 나는 또다시 순진한 어린애 흉내를 내며 그녀에게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들어온 언니들끼리 다 친해 보였던 거구나. 난 친구 하나도 없는데······."
"방을 다 치웠으니 이제 가야겠어요."
하녀는 얼룩이 진 카펫을 후딱 걷은 뒤 먼저 방을 나선 다른 하녀들을 따라 종종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다음에 또 나랑 놀아요, 언니."
나는 웃는 얼굴로 하녀를 보내주었다.
그러고 난 후 나는 두 눈을 가늘게 좁히고 생각에 잠겼다.
레놀드 부인, 그 아줌마 도대체 뭐지? 자기 마음대로 에른스트의 사용인을 갈아치우다니. 설마 유진이 그런 실권까지 일임하지는 않았을 텐데?
누가 보면 하녀 몇 명 새로 들이는 것쯤,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이건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가문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선택하는 건 어디까지나 안주인의 역할이었으니까. 아무리 고모라고는 해도 지금 그녀가 하고 있는 일은 월권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고민했다.
레놀드 부인은 또 에리히랑 같이 있겠지? 카벨은 혼자 뭘 하려나? 카벨의 가정교사는 아직 부르지 않는 것 같던데.
그나저나 둘째 진상은 왜 또 저렇게까지 유진을 피하는지 모르겠다. 슈마하에 갔을 때에도 계속 만나기를 거절당해서 결국 유진도 두어 달 전부터는 더 이상 카벨을 만나러 가지 않게 되었었지.
그래도 시간을 내서 꼬박꼬박 편지는 보냈었다고 들었다. 그래서 웬일로 이번에 카벨이 돌아온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난 둘이 대화가 잘 되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나는 잠깐 엊그제 보았던 레놀드 부인의 수상한 모습을 떠올렸다. 카벨에게 그런 식으로 말한 게 고의인지 아닌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좀 더 주시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만약 내가 진짜 9살이었다면 그냥 넘어갔겠지만.
그날 밤 레놀드 후작이 유진을 찾아왔다. 유진은 카벨 때문인지 일찍 귀가한 상태였다. 물론 카벨은 여전히 유진을 피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불허합니다."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궁금했던 나는 살금살금 문으로 다가갔다.
물론 엿듣는 게 나쁘단 건 일반인의 상식이니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래도 궁금한 걸 어떡하나. 나는 문에 귀를 대고 주의를 집중했다.
"동생들은 에른스트에 있을 겁니다."
"고집부리지 마라."
"고집이라니요? 에른스트의 사람이 에른스트에 있는 그 지극히 당연한 일이 어떻게 고집이 될 수 있단 말입니까?"
"유진, 지금도 너 혼자는 벅차지 않니? 어린 네가 이 모든 걸 혼자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기지 않는다. 다 널 위해서 하는 말이니 너도······."
"고모부."
유진의 서릿발 같은 음성이 고막에 박혔다.
"제가 지금 설득을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것 같습니까?"
나는 지금 그가 조용히 분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모님께도 분명 같은 답변을 드렸는데 전달받지 못하신 겁니까?"
자세히는 몰라도 레놀드 후작이 지금 유진에게 한 말이란 동생들을 다른 곳에 맡기면 어떠냐는 것인 듯했다. 그리고 유진은 그 말에 지금 같은 한기를 내비치고 있었다.
"현재 에른스트의 모든 권한은 제게 있습니다. 저는 제 의사를 명백히 밝혔고, 지금 이 일에 타협의 여지란 없습니다."
"유진······."
"그리고 착각하지 마시지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은 가문의 모든 권리를 이어받은 현 에른스트의 수장이지, 고모부의 어린 조카가 아닙니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 문 안에 있는 사람은 정말 더 이상은 내가 알던 어린 유진이 아니었다. 그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어른이 되어가고 있었다.
"저를 동생들과 한데 묶어 생각하지 마십시오."
레놀드 후작은 할 말을 잃은 듯 더 이상 유진을 설득하려 하지 않았다. 아니, 유진을 구슬리는 것을 포기했다고 해야 하나. 방금 전 그의 말은 정말 순수하게 유진을 위해서 하는 소리 같지 않았으니까.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어린아이는 지금 이 자리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할 겁니다."
나는 그 서늘한 목소리를 끝으로 조용히 문 앞을 떠났다.
***
달빛이 새어 들고 있는 방에는 밤의 정적이 고여 있었다.
방으로 들어선 나는 문을 닫고 서서 방금 전의 일을 곱씹었다.
혹시 레놀드 후작이 말한 동생들에는 나도 껴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가 유진에게 권한 것은 나를 다른 동생들과 함께 친척들에게 맡기라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이 집에서 내보내라는 것이었을까?
아마도 후자일 터였다.
'고아원에 보내는 게 어떻겠니?'
지난 생에서 에른스트 부부가 죽고 일 년쯤이 지났을 때, 레놀드 부인이 유진에게 했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저 애는 에른스트에 어울리지 않아. 유진, 이제 와서 굳이 네가 저 애까지 돌봐야 할 이유는 없잖니.'
'제가 알아서 결정할 테니 고모님은 그저 지금처럼 지내 주시면 됩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유진은 나를 에른스트에서 내보내지 않았다. 가끔 그날 일이 떠오를 때마다, 어쩌면 일이 바빠 나를 잊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따금씩 마주친 그는 쭈뼛거리는 나를 보며 서늘한 시선을 보낼지언정 이 집에서 나가라는 소리는 단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그게 조금쯤은 고마웠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레놀드 부인이 했던 그 말은 그 후부터 틈날 때마다 내 기억을 파고들어 나를 위축되게 만들었다. 내가 말을 안 들으면 내쫓을지도 몰라. 내가 심기를 거스르면 이 집에서 내보낼지도 몰라.
세 진상의 등쌀에 눌려 차라리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버릇처럼 생각했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이 집을 떠나는 걸 내심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래서 꿋꿋이 20년을 버티고 살았다.
하지만 만약 앞으로도 에른스트에 있게 된다면 나는 계속 은연중에 저런 생각을 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바람 앞의 등불 같은 내 신세가 이제 와서 나아지지는 않았으니까.
나는 역시 그건 좀 싫다······ 고 생각했다.
***
"카벨, 나랑 얘기 좀 해."
하루는 더 이상 참다못했는지, 유진이 카벨을 직접 찾아갔다.
"할 얘기 없어."
"아니, 있어."
"듣고 싶지 않아."
하지만 카벨은 고집스럽게 그를 외면했다.
"형이 하는 말은 다 듣고 싶지 않아."
잇따른 그 말에 카벨의 팔을 붙잡은 유진의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아, 저 표정은 왠지 이제 곧 폭발할 것 같은 표정인데?
하지만 유진은 동생에게 소리치는 대신 잠시 동안 이를 악물며 감정을 삭이려 노력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반만 성공해서, 잠시 후 유진의 입에서는 격양된 목소리가 토해져 나왔다.
"카벨, 제발 너까지 이러지 좀 마."
그것은 분노라기보다 차라리 부탁, 혹은 애원에 가깝게 들렸다.
나는 유진이 처음으로 동생 앞에서 드러내 보인 약한 모습에 놀랐지만 둘째 진상에게는 다르게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그는 에른스트에 돌아온 직후 내 앞에서 그랬던 것처럼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리더니 유진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달려갔다.
"카벨!"
나는 유진이 카벨의 뒤를 쫓는 모습을 보고 얼른 벽 뒤로 모습을 감추었다.
"형들 싸워?"
아, 깜짝이야.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에리히도 방에서 나온 모양이었다.
요즘도 밤마다 밖을 돌아다녀서 그런지 셋째 진상은 기력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네가 여기에 있다는 건······.
"유진하고 카벨이 다투었다고?"
역시 고모님도 같이 나왔구나. 에른스트에 있는 동안은 항상 에리히를 옆에 끼고 있는 레놀드 부인이었으니, 지금도 방에 같이 있다가 소란을 듣고 나온 게 분명했다.
"원래 형제끼리는 싸우고 크는 법이지."
그런데 기분 탓입니까? 왠지 두 사람이 싸운 걸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그녀는 언제나처럼 나를 본체만체하고 에리히를 어르기 시작했다.
"에리히, 형들은 신경 쓰지 말고 고모랑 같이 들어가서······."
"형들한테 갈래요."
하지만 처음으로 에리히가 자신을 붙잡은 고모의 손을 떼어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