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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32화 (32/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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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오빠들을 조심해 32화

손을 들어 마른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는 몹시 피곤해 보였다.

"카벨이 돌아오고 싶지 않대."

아마 나는 어리기 때문에 그가 경계하지 않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아니면, 내가 방금 전 그를 오해하지 않는다고 말해서인지도.

"당숙이 말하기를, 사냥대회 때의 사건으로 충격을 많이 받아서 후유증이 있다고 했어. 그래서······."

유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털어놓은 이야기는 약간 속이 쓰려지는 내용이었다.

"아직은 부모님과 함께 지내던 에른스트에 오고 싶지 않대."

요 며칠간 유진의 얼굴이 유독 어두웠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카벨은 그런 생각을 유진에게 전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래서 나는, 슈마하에 있는 편이 카벨에게 더 좋다면 그걸로 됐다고 했어."

또 유진은 거기에 답장을 보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직접 만나서 얘기하지 않아도 괜찮은 거야?"

"그렇지 않아도 이번 주에 한 번 보러 갈 생각이야. 하지만 밤늦게 이동할 예정이라 너희들까지 데려가지는 못 할 것 같아."

"우린 괜찮으니까 조심해서 다녀와."

그렇게 말하자 유진은 아까보다 조금 가벼워진 얼굴로 나를 향해 흐리게 미소 지어 보였다.

"고모님은 어때? 가정교사로 들어온 멤마 부인은? 너한테 잘해 줘?"

그가 묻는 말에 솔직히 고민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그에게 할 대답은 예전부터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응. 나는 걱정할 거 없어."

***

짝! 짜악!

하지만 유진에게 한 말과 다르게 오늘도 나는 회초리를 맞고 있었다.

으씨, 이 아줌마는 도대체 뭘 먹고 이렇게 회초리를 찰지게 때린대?

"아직도 나아진 게 없다니, 영애가 노력하긴 하는지 의심스럽네요."

나야말로 아줌마가 조금이라도 밥값을 하기 위해 노력하긴 하는지 의심스럽거든요? 공짜로 가르치는 것도 아니면서 이거 완전히 날로 먹잖아? 게다가 내가 아직 9살이라는 걸 알기는 아는지.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짓을 그만 때려치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유진의 피곤에 전 얼굴이 생각났다.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앞으로 이끌어야 할 에른스트. 아직은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두 동생. 그리고 부모님 대신 떠안게 된 계집아이까지. 그가 어깨에 짊어지고 있는 짐이란 그렇게나 녹록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생판 남이나 마찬가지였던 나를 이 집에서 내쫓지 않은 것만 해도 그는 할 수 있는 최대의 도리를 지킨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나를 딸 대신으로 여겼던 에른스트 부부에 대한 마지막 경애 때문이든, 아니면 때때로 내게서 엿보이던 죽은 여동생의 흔적 때문이든 간에.

혹은 함께 지낸 시간 동안 쌓인 나름대로의 정 때문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나는 그렇지 않아도 힘든 길을 걷고 있는 그를 더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에른스트 부부가 죽었을 때조차 마음대로 울지 못했던 그가 겉보기만큼 괜찮은 상태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회초리를 맞는 것 정도야 그렇게 큰일도 아니었고. 어차피 교육은 길어야 5년이었으니,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 아니, 그런데 5년이라니······. 으헉, 그건 좀 막막하긴 하네. 아무래도 방법을 찾아야겠어.

"쓰읍, 망할 아줌마."

나는 오늘도 쓰린 다리를 안고 실로 오랜만에 통신석을 꺼내 들었다.

요하네스가 내게 주었던 통신석은 벌써 다 써서 지난가을 내 쪽에서 새로 산 것이었다. 물론 실제로는 내가 아니라 에른스트 부부가 사준 것이었다.

죽은 그들을 생각하니 잠깐 마음 한구석이 알싸해져서 나는 괜히 통신석을 만지작거리다가 뒤쪽의 오목한 부분을 눌렀다.

[하리야!]

통신석의 불이 들어온 지 몇 초 지나지 않아 곧바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 요한 오빠."

오랜만에 보는 요하네스였다.

[하리 언니야? 나도, 나도!]

루이제도 같이 있는지 잠깐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에른스트 부부가 죽은 이후 처음으로 작게나마 웃을 수 있었다.

[어떻게 지내? 괜찮은 거야?]

요하네스는 그동안 내 걱정을 많이 했던 듯 그리 밝지 않은 목소리로 내 안부를 물었다.

"난 괜찮아."

그는 영상 통신을 원하는 듯했지만 나는 푸른빛이 도는 구체를 건드려 수락하지 않았다.

나는 에른스트의 상황을 간략하게 설명한 뒤 지금은 고모인 레놀드 후작 부인이 에리히와 나를 돌봐 주고 있다는 것, 또 얼마 전부터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고 있다는 점 등을 알려 주었다.

[가정교사라고? 아직 이른 것 같은데······.]

내 말을 들은 요하네스는 말끝을 흐렸다.

그가 말하는 것은 시기상의 문제였고, 그건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보통의 정상적인 보호자라면 부모를 잃은 지 얼마 지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앞세워 훈육에 들어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따로 가정교사를 둔 건 나뿐, 에리히는 레놀드 후작 부인에게 직접 기본적인 소양을 배우고 있었다. 게다가 실질적으로 그는 나처럼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게 아니라 고모에게 금이야 옥이야 어화둥둥 예쁨받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나는 편애 한번 치사하다고 생각했지만······ 크흡. 원래 세상은 불공평한 거니까. 그리고 솔직히 에른스트 부부의 죽음으로 타격을 받은 건 에리히였으니 나보다 각별히 보살핌을 받아야 마땅했다.

"그래도 이왕 배우는 거니까 열심히 하고 있어."

물론 그래 봤자 회초리는 피해갈 수 없지만.

[열심히 안 해도 돼.]

그런데 요하네스는 내 이야기를 조용히 듣다가 지금 같은 말을 내게 해주었다.

[힘들면 열심히 안 해도 돼, 하리야.]

그 순간 요하네스의 얼굴이 보고 싶어졌다. 하지만 이미 구체에 있는 푸른빛은 아까 전에 사라진 뒤였다. 물론 내가 먼저 요청한다면 요하네스는 군말 없이 수락하겠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다만 귓가에 맴도는 나직한 목소리를 마음속으로 되새기다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고마워."

***

결국 유진은 카벨을 만나지 못했다.

밤늦게 시간을 내 슈마하에 찾아갔지만 카벨이 유진을 만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유진은 담담히 그 사실을 전해 주었으나 나는 그 일로 그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단 사실을 눈치챘다.

그래도 그날 다른 이야기는 잘 되었는지, 그 후 열린 귀족 회의에서 슈마하 백작이 새로운 에른스트의 공작의 든든한 뒷받침이 되어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 참, 내가 왜 잠도 못 자고 이래야 하지?"

나는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하품을 참으며 작게 투덜거렸다.

레놀드 부인은 에른스트에 내내 머무는 게 아니라 정해진 시간에 출퇴근하듯이 저택에 들르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밤마다 에리히의 방에서 훌쩍이며 우는 소리가 새어 나오는 걸 알고 있었다.

달칵.

그리고 울음이 잦아들어 밤의 침묵이 주위에 짙게 깔리고 나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일도 알고 있었다.

스륵.

방을 열고 복도로 나온 에리히는 실내용 신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었다. 그가 밖으로 한 발짝 더 걸음을 내딛자 손에 들린 큰 토끼 인형이 바닥에 질질 끌리는 소리를 냈다.

저거 내가 준 인형인데. 처음에는 싫다고 막 내던지더니 어떻게 잘 끌어안고 자는 모양이다. 밤마다 토끼 인형과 일심동체가 되어 침대 밖으로 나오는 걸 보니.

"멍!"

"쉬이. 페니, 짖으면 안 돼."

나는 에리히의 방에서 따라 나온 페니를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에리히는 초점 없는 눈으로 인형을 끌며 어디론가로 걸어갔다. 나도 문 옆에 쭈그려 앉아 있던 몸을 일으키고 조용히 그의 뒤를 쫓았다.

오늘도 그가 찾아간 곳은 에른스트 부부의 방이었다. 에리히는 방문 앞에서 그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아마 앞으로 한동안은 저 상태로 움직이지 않을 터다.

나는 벽에 기대앉아 팔로 무릎을 감싼 채 에리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지난 생에서 내가 에리히의 몽유병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밤늦게 목이 말라 물을 마시러 나왔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 나는 에른스트 부부의 문 앞에 서 있는 하얀 형체를 발견하고 귀신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그건 에리히였고, 그는 내가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이 멍한 얼굴을 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때 나는 몽유병이 뭔지 몰랐기 때문에 그냥 나한테 신경질을 내지 않는 에리히가 이상하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어른들에게 에리히의 상태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나는 가끔 밤늦게 맨발로 복도에 나온 에리히를 보았다. 나는 그가 부모님을 그리워해 그들의 방문 앞을 떠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난 후, 집사 휴버트가 에리히를 발견했다. 곧장 유진에게 소식이 알려졌고, 바로 다음 날 저택에 불려온 의사들은 몽유병에는 치료법이 없으니 자연히 사라지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 후로 에리히는 밤마다 침대 기둥에 손목을 묶고 잤다.

"네가 방에 가야지 나도 들어가서 자는데."

나는 그것을 다소 가혹한 처사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에리히가 직접 요구한 일이라고 들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는 자신의 병을 부끄럽게 여겼다.

게다가 자신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밤 동안의 일을 목격한 사람에 내가 있다는 사실을 더욱 수치스러워했다.

"내가 요즘 너 때문에 얼마나 수면 부족인 줄 알아?"

그러니 나도 에리히에게 지금의 일을 알릴 생각이 없었다.

나는 듣는 이 없는 말을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전부터 생각한 거지만 내가 왜 진상들을 이렇게까지 신경 쓰고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이 세상에 진짜 신이 있다면 왜 나를 과거로 돌려보낸 걸까?

이런 즐겁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일을 다시 한번 겪게 하려고?

사실 나는 내일이라도 당장 이곳을 떠날 수 있었다. 물론 가진 것 하나 없는 여자애 혼자 혈혈단신으로 살기란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나는 비록 몸은 어릴지라도 정신연령만큼은 성인이었고, 세상에 에른스트 부부만큼은 아니더라도 적당히 인정 있는 사람이 없으리라 여기지도 않았다.

어쩌면 나를 가엾게 여겨 거두어줄 사람이 있을 수도 있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나갈 방법은 있을 터였고.

그런데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에른스트에 남아 밤중에 홀로 헤매는 에리히의 옆을 지키고 있다.

떠나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솔직히 지금까지 몇 번이나 했었다.

그 생각이 가장 강렬했던 것은 유진이 나를 추운 겨울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거리에 버리고 갔을 때. 그리고 에른스트 부부가 죽은 후 그들의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또 지금.

"이런 건 별로란 말이야."

내 혼잣말은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다시 내게로 되돌아와 부스러졌다.

'하지만 하리도 우리 아가잖니.'

귓가에 봄볕처럼 따스한 음성이 울렸다. 하지만 나는 조용한 복도가 추워서 무릎을 좀 더 끌어당겨 안았다.

나를 아이로 만들어줬던 당신들은 이미 죽고 없잖아요.

나는 이 집이 조용한 게 싫어요. 사실 멜팅턴에서 내가 당신들을 따라왔던 것도, 숨 막히게 조용했던 그 집이 너무 싫어서였어.

지금의 에른스트는 내게 있어 멜팅턴의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아. 그러니 나는 이곳도 언제든 떠날 수 있어.

스륵.

마침내 에리히가 에른스트 부부의 방문을 떠나 내 앞을 지나쳐 가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맨발로 복도를 걷는 에리히에게서는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다만 그가 들고 있는 인형만이 바닥에 끌리는 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었다.

페니가 내 옆으로 다가와 잠시 손을 핥다가 곧 에리히의 뒤를 쫓아갔다.

"잘 자, 에리히."

나는 여전히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읊조렸다.

물론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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