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그 오빠들을 조심해 31화
"내일부터는 가정교사가 올 예정이니 열심히 공부하도록 하렴."
아, 올 것이 왔구나.
레놀드 부인이 이 집에 올 때부터 예감하고 있던 일이 드디어 나한테 닥칠 모양이었다.
사실 내가 진짜 싫어하는 사람은 레놀드 부인이 아니었다. 그녀가 내게 붙인 가정교사였지.
"에리히와 같이 배우나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는 배우는 게 다르단 것도 모르니?"
알고 있네요, 이 아줌마야! 그냥 혹시나 하는 한줄기의 희망을 가지고 물어본 거다. 물론 희망 따윈 개뿔이었지만. 으흑.
사실 귀족가의 자제들은 일정 나이가 되면 가정교사를 들여 기본 교양을 수련하는 게 보편적이었다.
아마 에른스트 부부가 살아 있었다면 슬슬 에리히와 나에게도 가정교사를 붙였을 터였다. 장남인 유진도 그랬던 것으로 알고 있고, 둘째인 카벨도 비록 허구한 날 땡땡이를 쳤을지언정 작년부터 전담 가정교사를 두고 있었다.
"오늘부터 교육을 담당할 에이프릴 멤마입니다."
"처음 뵙겠어요, 멤마 부인."
그러니 아무리 내가 이 여자가 싫다 한들 지금으로서는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다는 거다.
나는 눈앞에 있는 귀부인을 향해 우아하게 인사했다. 내가 정통 귀족식으로 인사하는 것이 의외인지 마주한 눈동자가 약간 크게 떠졌다.
그녀가 레놀드 부인이나 다른 귀족들에게 무슨 말을 들었을지는 사실 뻔했다. 보나 마나 본데없이 자란 천박한 여자애라 가르칠 게 한둘이 아닐 거라고 떠들었겠지.
그리고 과거의 나는 분명 그런 계집애가 맞았다.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바보같이 말이나 더듬으며 '아, 아, 안녕하세요, 마님'이라고 얼빠진 소리를 해댔으니까.
지금 생각해도 이불을 뻥뻥 차고도 남을 낯부끄러운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나는 에른스트에 거두어진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평민 여자애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가르침을 따라갈 수 있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하지만! 난 달라졌어!
촌뜨기 같던 그때와 달리 난 이렇게 우아하게 행동하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단 말이야! 그리고 그렇게 되기 위해 내가 이 여자에게 회초리를 얼마나 많이 맞아야 했는지.
아오, 생각하니까 역시 싫다. 아무리 내 교육을 위해서라고 해도 어린애를 그렇게 매일 인정사정없이 때릴 건 없잖아. 그래서 수년간의 고통 끝에 드디어 이 여자와 작별을 고하던 날에는 얼마나 신이 났는지 모른다.
"영애는 정식으로 예법을 배우는 것이 처음이라 하니 기초부터 가르치겠어요. 시범을 보일 테니 잘 따라 하세요. 제 교육을 제대로 따라오지 못한다면 다소의 체벌을 가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첫 단추부터 다시 끼워야지.
예전과 달리 좋은 첫인상을 주는 데도 성공한 것 같고, 이제는 20년간 갈고 닦은 내 완벽한 귀족식 예법을 보여 주는 일만 남았구나.
"먼저 다도 예절에 대해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하는 걸 잘 보도록 하세요."
음? 그런데 좀 이상하네.
원래 처음 교육받을 때는 앉는 방법이나, 걷는 방법 같은 진짜 기초적인 것부터 가르치는 것 아니던가?
티 파티에서의 예절은 초보가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원래도 내가 이런 순서로 배웠었나? 게다가 간단한 테스트조차 없이 바로 교육에 들어가다니.
오래전의 일이라 그런지 기억이 영 가물가물했다.
하지만 사실 걱정할 건 없었다. 내가 예절 교육을 한두 해 받은 것도 아니고, 실전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몸만 어려졌을 뿐이지, 나는 이미 현역 귀부인들 못지않게 제대로 된 예법을 선보일 수 있었다. 그러니 지금 앞에 있는 멤마 부인을 흉내 내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자, 이제 똑같이 따라 해보세요."
나는 멤마 부인이 시범을 보이는 동안 얌전히 앉아 지켜보다가 그녀의 허락이 떨어진 뒤 움직였다.
거참, 하품 나게 쉽네요.
티 파티에서는 가면처럼 웃는 낯을 하고 입으로는 쉴 새 없이 온갖 얘기를 다 나누면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우아하고 정제된 손놀림을 보여야 한다.
그런데 고작 이런 것쯤이야.
나는 멤마 부인이 한 것을 똑같이 따라 했다. 그러자 그녀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예법에 능숙해 보이는 내 모습에 깜짝 놀란 듯이 나를 쳐다보았다. 내가 이 정도까지 그녀를 흉내 내 따라 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눈치였다.
흥, 그렇겠지! 내 손끝에서 철철 흘러나오는 이 기품을 보라고!
아무래도 내 다리의 안위를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이번에는 매일 회초리를 안 맞아도 되겠네.
"일어나서 치마를 걷으세요."
그래, 내가 봐도 지금의 내 예법은 완벽······.
응?
나는 방금 전 내 귀를 스친 말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고 멈칫했다.
"듣지 못했나요? 일어나서 치마를 걷으세요."
하지만 멤마 부인은 지난 생에서 내가 지겹도록 들은 말을 또다시 내 앞에서 반복했다.
나는 납득하지 못한 채 마주한 이를 바라보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엉망이군요. 이렇게 근본 없는 예법이라니, 믿을 수가 없을 정도예요."
당신한테 배운 그대로 따라 한 건데 뭔 헛소리십니까?
진심으로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일단 참았다.
"제 예법에 잘못된 부분이 있었나요?"
"아니면 제가 지금 이유 없이 트집을 잡는단 말입니까?"
도대체 뭘까.
내가 봤을 때, 방금 전 내 다과 예절은 교본으로 삼아도 될 만큼 완벽했던 것 같은데. 혹시 내가 미처 인식하지 못했을 뿐, 예법에 변화가 있었나? 그래서 어른이 된 내가 쓰던 예법과 어릴 때 배우던 예법 사이에 차이가 있는 걸까?
하지만 멤마 부인이 내게 선보인 것도 기억 속의 것과 다르지 않았는데? 게다가 나는 그걸 훌륭하게 따라 해냈고.
"나는 여러 번 말하게 하는 걸 싫어해요. 영애가 배울 것이 하나 더 있군요."
일단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은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으니 뜻대로 해줄 요량이었다.
"치마를 올리세요."
멤마 부인은 이미 옆에 있던 회초리를 손에 들고 있었다.
"조금 더. 더 위로."
내가 치맛자락을 허벅지 위까지 들어 올리자 그제야 다리 뒤쪽에 불똥이 떨어졌다.
짜악!
멤마 부인이 나를 체벌할 때 때리는 곳은 종아리가 아니었다. 종아리는 뛰거나 해서 치맛자락이 들렸을 때 곧바로 보이는 위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배움이 모자라 체벌을 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니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야 하며, 다른 영애들도 모두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짝!
그래서 전부터 그녀가 나를 회초리질 하는 부위는 무릎이 접히는 곳에서 손가락 한 마디쯤이 더 올라간 위쪽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짝!
아, 사는 동안 지겹도록 맞아서 이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프다. 이 몸으로 회초리질을 당하는 건 지금이 처음이라 그런가? 어려진 만큼 피부도 더 약해져서 그런 걸지도.
나는 다섯 대를 맞고서야 다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다시 해보겠습니다. 이번에도 그리 엉망인 모습을 보인다면 같은 벌을 받을 테니 정신을 똑바로 차리도록 하세요."
가느다란 막대기가 스치고 간 자리가 따끔거렸다. 그래도 이 위치라면 의자에 앉을 때 닿지 않아 다행이었다.
나는 방금 전 맞은 이유를 알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멤마 부인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똑같이 따라 했다.
"치마를 걷으세요."
하지만 돌아온 것은 방금 전과 같은 말이었다.
"왜 가만히 있죠? 설마 지금 본인의 예법을 훌륭하다 여기는 건가요?"
이 정도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냥 트집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나는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고 침착하게 말했다.
"문제점이 있다면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말했지 않나요.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다 문제라고."
이게 말이냐, 똥이냐? 나는 기분이 몹시 구려졌다.
"내가 어려운 걸 요구했나요? 본 대로 흉내만 내면 되는데 설마 그 정도도 못해 이리 흉한 꼴을 보일 줄이야. 당신을 내게 맡긴 레놀드 후작 부인을 얼마나 부끄럽게 만들 생각인가요?"
그냥 다 때려치우고 나갈까? 솔직히 지금 내가 여기에서 이 여자에게 가만히 맞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유진 도련님도 하나뿐인 누이가 이래서야 체면이 설 리가 없지요. 내가 영애에게 모욕을 주려고 이러는 것 같나요? 가뜩이나 에른스트의 안팎으로 상황이 복잡한 지금, 영애의 존재까지 가문에 누를 끼치면 어떻게 하려고 이러지요? 물론 영애는 어려서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알아듣지 못하겠지만요."
하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호시탐탐 문 쪽을 보며 기회를 노리던 것을 멈추었다.
"일어나 치마를 걷으세요. 벌을 준 후 방금 전 영애가 잘못한 부분을 짚어주겠습니다."
결국 나는 멤마 부인의 앞에서 다시 한번 치마를 걷어 올렸다.
연약한 살갗에 다시금 화끈한 감각이 파고들었다. 이 상황이 몹시 마뜩잖았지만 지금은 앞장서 분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참았다.
이번에도 다섯 대를 때리고 난 뒤, 멤마 부인은 내 예법에서 잘못된 부분을 말해주었다.
"차를 따를 때 손목의 각도가 틀렸습니다. 영애에게는 연습이 많이 필요하겠군요."
물론 그건 비웃음이 나올 만큼 허접한 핑계였기 때문에 나는 그저 서늘히 웃고 말았다.
***
"왜?"
나는 유진에게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다 나았는데도 안 와?"
어느덧 시간이 더 흘러 카벨이 에른스트에 돌아올 시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슈마하 백작가에 이대로 더 머물기로 했다니?
"카벨이 슈마하에 좀 더 있고 싶다고 했어."
이미 일주일 전에 결정 난 일이라고 말하며 유진은 덧붙였다.
"나도 지금은 바빠서 카벨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고, 고모님도 너희 둘로 벅차다고 하시니까 차라리 잘된 일이야."
지금 막 집으로 돌아온 그는 아직도 밖에서의 날 선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아마 내가 먼저 물어보지 않았다면 유진은 카벨이 돌아오기로 예정되어 있던 날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을 것이었다.
꼭 우리에게 숨길 의도여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런 이야기를 우리와 함께 나눌 시간도 여유도 그에게는 없었기 때문에.
"휴버트, 잠시 방으로."
"예, 공작님."
그는 또 집사에게 지시할 일이 있는지 나를 등진 채 곧장 집무실로 향했다. 한 시도 허투루 쓸 수 없을 만큼 유진이 바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니 그런 그를 이해했다.
그래서 다른 때에는 나도 유진의 시간을 빼앗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던 것이고.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그렇게 말하면 꼭 오빠가 카벨 오빠를 귀찮아해서 슈마하에 떠맡긴 것 같잖아."
등 뒤에서 들리는 내 조용한 음성에 유진의 걸음이 멈추어졌다. 나는 곧 그의 얼굴을 다시금 마주했다. 유진은 방금 전까지의 견고한 냉정함에 금이 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게 아니야."
"알아."
나는 내 말을 부정하는 그에게 담담히 대꾸했다.
"하지만 에리히나 다른 사람에게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오빠가 오해받을 수도 있다는 걸 말하는 거야."
유진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나는 내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그를 덩달아 조용히 응시했다. 잠시 후 유진이 입을 열었다.
"휴버트,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해."
"알겠습니다."
휴버트가 뒤돌아설 때까지도 유진은 큰 나무처럼 곧게 서서 한 점의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내 완전히 나와 단둘이 되고 난 뒤에야 그의 몸에서 서서히 긴장이 풀리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는 완연한 에른스트 공작으로 존재하려 하는 유진의 무의식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