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그 오빠들을 조심해 30화
"에리히, 밥 먹어."
"안 먹어."
오늘도 에리히는 방에 틀어박혀 밖으로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반복되는 일에 나는 두말하지 않고 뒤쪽에 서 있는 휴버트와 시선을 교환했다.
잠시 후 쟁반을 든 하녀와 휴버트가 방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입맛이 없으시더라도 끼니를 거르시면 안 됩니다. 일어나서 조금이라도 드시지요."
그들은 따끈한 수프가 든 쟁반을 에리히가 누워 있는 침대 옆에 내려놓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쟁반 위에 있던 식기와 접시가 허공을 날았다.
와장창!
"안 먹는다고 했잖아!"
잠깐 동안 이불에 푹 싸여 있던 셋째 진상의 얼굴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는 우리를 맹렬히 노려보더니 다시금 홱 뒤돌아 이불을 뒤집어썼다.
유진이 저택을 비우고 벌써 사흘째 계속되는 장면이었다.
결국 오늘도 우리는 에리히를 섣불리 건드리지 못한 채 방을 빠져나와야 했다.
나는 퉁퉁 부어 빨개져 있던 에리히의 눈을 떠올리며 그의 방문 앞에서 걸음을 뗐다.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예전과 달리 나는 어른이었는데도 이럴 때의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유진은 내가 깨어나기 전에 저택을 떠나 잠들고 나면 돌아오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와는 요 며칠간 딱히 마주치는 일이 없었지만 저렇게 밥도 안 먹고 방에만 틀어박혀 있는 에리히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번이 두 번째 겪는 일임에도 여전히 어려웠다.
처음 에른스트 부부의 죽음을 겪었을 때는 내가 너무 어렸다. 그래서 솔직히 뭐가 뭔지도 잘 모른 채 지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때에는 그나마 저택에 카벨이라도 있었지. 그런데 지금은 카벨 역시 슈마하 백작가에 머물며 치료받는 중이었으니.
"식사하십시오. 하리 아가씨라도 잘 드셔야 합니다."
결국 식당에 내려온 것은 나 혼자였다. 내가 자리에 앉자 휴버트가 말했다.
"공작님께서 오늘은 일찍 들어오신다고 했으니 아마 막내 도련님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하지만 에리히도 없는데 혼자 먹기 좀 그렇······ 기는 무슨.
자고로 사람은 밥심으로 사는 거다. 쫄쫄 굶으면 더 우울하고 땅 파게 되고, 그런 거라고.
달그락.
나는 혼자 식사를 시작했다. 에른스트 부부가 죽은 이후부터 유진이 억지로 먹이지 않으면 거의 굶다시피 하는 에리히와 달리 나는 한 끼도 식사를 거른 적이 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집사 휴버트를 비롯하여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사용인 중에 그런 나를 흉보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었다.
물론 장례식에 와서 마음대로 떠들어 대던 사람들처럼 그들 역시 뒤에서는 다른 말을 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 귀에 직접 들리는 게 아니라면 상관없었다.
나는 꾸역꾸역 밥을 먹고 방으로 돌아갔다.
오전 시간 내내 그랬듯 점심 식사 후에도 할 일이 없어서 침대에 앉아 그저 하염없이 창밖만 쳐다보고 있었다. 유진이 돌아오면 나도 그때에야 밖으로 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저녁 식사 시간 전에 돌아온다던 유진은 해가 다 저물도록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아무래도 에리히가 어쩌고 있는지 신경이 쓰였기 때문에 나는 조용히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가."
분명 문을 열리는 소리는 나지 않았던 것 같은데 곧장 작은 목소리가 귓가에 스몄다. 그 목소리가 점심때보다 더 잠겨 있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네가 무슨 상관이야?"
"······."
"보기 싫으니까 꺼져."
그 말에 나는 잠시 동안 아무 말 없이 이불에 싸인 에리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꺼지라고!"
다음 순간 내 앞으로 무언가가 날아왔다. 하지만 팔심이 약해서 그런지 그것은 나를 맞추지 못하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시선을 내려 보니 엊그제 오도카니 혼자 누워 있는 에리히의 모습이 눈에 밟혀 내가 가져다주었던 인형이었다.
나는 조용히 인형의 기다란 귀를 집어 들었다.
"에리히."
그때, 등 뒤에서 나직한 부름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덧 저택에 돌아온 유진이 문가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잠깐 에리히랑 얘기 좀 할게."
방을 나서기 전 마지막으로 본 에리히는 입술을 꾹 다문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달칵.
나는 방문을 닫고 나와 인형을 끌어안은 채 복도에 섰다. 옆에는 유진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온 듯한 휴버트도 있었다.
둘 중 누군가가 미리 지시해 놨던 건지, 잠시 후 사용인이 에리히의 방으로 죽이 든 접시를 가지고 들어갔다.
이번에는 안에서 깨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안으로 들어갔던 사용인이 빈손으로 나와 다시 모습을 감춘 후에도 나는 휴버트와 함께 정적이 흐르는 복도에 가만히 서 있었다.
별안간 안쪽에서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그 울음소리가 서서히 잦아들고 나서도 시간이 더 흘렀을 때, 유진이 빈 그릇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내일부터는 그래도 굶지 않을 테니 식사에 각별히 신경 써 주도록 해."
"그러겠습니다."
휴버트는 유진에게서 쟁반을 받아 먼저 자리를 떠났다.
그러고 난 후 나는 유진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괜히 머뭇거리다가,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엉겁결에 입을 열었다.
"밥 먹었어?"
아, 제길. 나도 참 할 말이 이런 것밖에 없나? 누가 보면 밥 얘기밖에 못 하는 줄 알겠네.
"먹었어. 넌?"
"나도 먹었지."
"그럼 들어가서 쉬어."
아무래도 서먹함을 느끼는 건 나뿐인 듯, 유진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지만 유진의 얼굴이 너무 피로해 보여서 다른 말을 더 하지 못했다. 그 말을 끝으로 그가 먼저 걸음을 옮겼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나는 지쳐 보이는 유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인형을 에리히의 방문 앞에 내려놓은 뒤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
유진은 조금씩 날카롭게 변해 갔다.
듣기로는 새로운 에른스트 공작의 나이가 어린 것을 이유로 귀족 회의 때마다 다른 이들과의 사이에 마찰이 일어날 때가 많다고 했다.
원래대로라면 에른스트의 원로원이라도 유진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했지만 늙은 뱀들은 에른스트를 자신들의 입맛대로 좌지우지할 기회를 놓치려 들지 않았다.
불온한 목적이 다분한 소모성 싸움이 이어졌다. 에른스트 공작이 된 어린 유진을 미리부터 기선 제압하려는 속셈이었다.
어렸을 때의 나는 당연하게도 그런 일을 몰랐지만 지금은 달랐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전에도 유진은 피곤에 전 낯을 하거나 무언가에 분노한 채 서늘한 기운을 풍기며 저택에 돌아올 때가 많았다.
그때에는 그저 그런 유진이 무서워서 그의 싸늘한 눈빛이 나를 스칠 세라 피해 다니곤 했지만 이제 보면 그것은 꼭 나를 향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다른 친척분들에게 도움을 청하면 어떠신지요?"
나는 집무실 안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에 몰래 귀를 기울였다.
유진은 오늘도 서릿발 같은 기운을 솔솔 풍기며 저택으로 돌아왔다. 나는 그의 분위기를 통해 오늘도 지금까지와 비슷한 하루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친척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거지?"
"가장 최근까지 교류가 있었던 것은 레놀드 후작가와 체르노아 백작가입니다. 공작님께서 출타 중이실 동안의 일이 염려되신다면 개인적인 소견으로······."
그때, 저쪽에서 사용인이 걸어오는 게 보였기 때문에 나는 뒷이야기를 마저 듣지 못하고 자리를 떠났다.
"오늘부터 고모님이 저택에 들러 너희들을 돌봐 주시기로 했어."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내 앞에 선 귀부인을 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예상대로 에른스트에 온 것은 레놀드 후작 부인이었다.
"유진, 아이들은 내가 잘 돌볼 테니 걱정 말렴."
붉은 머리카락을 우아하게 틀어 올린 귀부인은 앞에 선 에리히와 나를 향해 포근히 웃어 보였다.
"저런, 에리히. 그새 살이 왜 이렇게 쏙 빠진 거니? 설마 굶은 건 아니겠지? 그럼 못 써."
레놀드 부인은 에리히를 향해 걱정 어린 얼굴을 하며 말했다. 그 후 그녀의 눈길이 곧바로 나를 스쳤다.
"그래, 네가 하리구나. 지난번에는 언뜻 봤었는데. 오빠와 새언니가 너를 그렇게 예뻐했다지?"
그녀는 미소 띤 얼굴을 한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눈동자 속에 드리워진 싸늘한 빛을 놓치지 않았다.
"그럼 오늘부터 잘 부탁한다, 얘들아."
레놀드 후작 부인, 그녀는 내가 에른스트에 있는 20년 동안 내내 나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사람이었다.
물론 진상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대놓고 내게 그런 심정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저 눈동자에 날카롭게 박혀 있는 감정을 내가 모를 리는 없었다. 나는 에른스트에 있는 내내 귀족들의 저런 눈빛을 마주하며 살아야 했으니까.
지난 생에도 에른스트 부부의 사후, 어린 우리를 돌보러 온 것은 레놀드 부인이었기 때문에 아마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녀가 있어 카벨이나 에리히가 빨리 회복할 수 있었던 것은 맞았다. 게다가 유진이 저택에 남은 우리를 걱정하는 것도 이해했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고모님."
나는 그리 밝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는 유진에게 레놀드 부인이 싫다는 말을 굳이 하지 않았다.
***
"에리히, 많이 먹으렴."
나 참, 꼴 보기 싫어라.
"고모가 에리히 주려고 선물을 사 왔단다. 다 먹고 가서 열어보자."
나는 내 앞에 있는 두 사람을 약간 짜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며 생각했다.
아주 그냥 나는 안중에도 없는 눈치구먼? 하지만 뭐, 그럴 줄 알았지. 전에도 이 집에 있는 동안 나를 가정교사에게 일임하고 없는 사람 취급했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사실 나도 그쪽이 더 편하기는 하다.
에이, 그냥 밥이나 먹자. 잘 먹는 게 이기는 거다.
그래도 확실히 에리히에게는 자신을 돌봐 주는 어른이 있는 게 나아 보였다. 듣기로는 카벨도 빠른 속도로 회복하고 있다고 한다.
갈비뼈가 부러지고 팔에도 금이 간 데다 뇌진탕에 여기저기 타박상까지 심해서 치료하는 데 오래 걸릴 거라고 하더니.
나는 둘째 진상이 빨리 나아서 다시 집에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지금의 에른스트는······ 너무 조용해서.
그리고 아무리 미운 진상인 카벨이라고 해도 지금 혼자만 따로 떨어져 괜찮은 건지 걱정이 되었다. 물론 친척인 슈마하 백작가에서 어련히 잘 돌봐 줄까 싶기도 했지만, 그래도······.
콱!
앗, 생각에 잠긴 탓이었을까. 포크의 조준을 잘못했다. 접시에서 튕겨 나간 방울토마토가 통통 경쾌한 움직임을 보이며 드넓은 식탁 위를 내달렸다.
앞에 있던 두 사람의 눈길도 나와 함께 방울토마토에 못 박혔다.
"아무래도 예절 교육이 필요하겠구나."
쿠궁!
예절 교육이라굽쇼?
레놀드 부인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말에 나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
"기본적인 예절은 이미 배웠어요."
설마 내가 먼저 자신에게 말을 걸 줄은 몰랐는지, 레놀드 부인이 눈살을 움찔 찌푸렸다.
"그래? 누구에게?"
"엄······ 어머니께요."
"어쩐지, 멜리사가 아이들에게 무른 구석이 있긴 했지."
그녀는 알 만하다는 듯 싸늘히 눈동자를 내리깔며 읊조렸다. 나는 그 말에 발끈했지만 내가 다시 입을 열기 전에 레놀드 부인이 말을 돌렸다.
"어머, 에리히. 다 먹었구나. 잘했다, 잘했어. 그럼 이번에는 고모가 준비한 선물을 보러 갈까?"
얼마 전부터 급격히 말수가 줄어든 에리히는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레놀드 부인은 호들갑을 떨며 그를 데리고 식당을 나갔다.
나는 그녀가 떠난 자리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