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
그 오빠들을 조심해 29화
"우린 먼저 들어갈 테니 너희도 방에 가서 쉬려무나."
"네, 그럴게요."
"모두 엄마한테 뽀뽀해 주지 않을래?"
아무래도 에른스트 부인은 술에 취하면 가슴속의 애정을 마구 표출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되는 모양이었다. 하긴 만취했을 때 성격이 나빠지는 사람도 있다던데, 어떤 의미로는 좋은 술버릇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차례대로 에른스트 부인의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옆에서 에른스트 공작이 '나도······'라고 서글프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우리 모두가 무시했다.
"다들 좋은 꿈 꾸렴."
나는 그녀의 웃음기 어린 인사말을 들으며 어쩔 수 없이 약간 쑥스러운 기분에 휩싸였다.
그렇게 다정한 날이 또 하루 지나갔다.
그리고 붉은 태양이 세상을 온통 불길하게 물들이고 있던 다음 날의 늦은 저녁, 에른스트에 급보가 전해졌다.
그 안에는 황실이 주관한 야외 행사의 사냥터에서 예기치 못한 피습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에른스트 공작 부부가 사망, 동행했던 카벨은 중태에 빠졌다는 소식이 담겨 있었다.
"거짓말······."
나는 그 소식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어 아연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나 못지않게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에리히가, 마치 숨이 멎은 것처럼 싸늘하게 굳어 있는 유진이, 지금 내가 헛것을 들은 게 아니란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었다.
투욱.
유진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이 다음 순간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부고가 찾아든 우리 모두의 마지막 봄이었다.
8. 조용한 집
'아가, 배고프지 않니?'
처음 봤을 때,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먹던데.'
거리에는 후줄근한 차림새로 꽃을 파는 아이에게 관심을 갖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가까이 다가가 꽃을 내밀어도 행여나 때가 탄 옷자락이라도 스칠 세라 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물론 개중에 동정심을 품고 나를 상대해 준 귀부인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사람처럼 젖은 눈을 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거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우아하게 틀어 올린 은발과 맑은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를 가진 귀부인은 척 봐도 굉장히 높은 신분의 사람인 것 같았다. 그 뒤에 서 있는 갈색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의 신사도 마찬가지였다.
고급 원단으로 만든 것이 분명해 보이는 깨끗한 옷과 귀티가 나는 얼굴, 손짓 하나에서부터 느껴지는 기품.
그런데 그녀는 꽃을 들고 있는 내 지저분한 손을 망설임 없이 붙잡았다.
'꽃이 참 예쁘다. 이 꽃을 갖고 싶은데 대신 얼마를 주면 될까?'
게다가 내가 내민 꽃은 싱싱하기는 하나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과 비교하면 초라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들꽃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만 보며 살아왔을 그들에게 이런 볼품없는 꽃이 예쁘게 느껴질 리 없었다. 사실은 나도 그들의 동정심을 구걸하는 입장이 아니라면 이런 것을 그녀에게 내밀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화로 하나요.'
'그 바구니의 꽃을 다 가지고 싶으면?'
'어······ 이걸 다요?'
나는 여전히 그녀에게 손을 잡힌 채로 당황했다. 귀부인은 직접 몸까지 숙여 나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 나는 차마 그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몇 송이나 있는지 잘 몰라서, 세어 봐야 하는데······.'
나는 어물거리며 바구니 속의 꽃을 세어 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내 손을 놔 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한 손으로 바구니에 든 꽃을 셈해야만 했다.
내가 하는 양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그녀가 불현듯 말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아가, 우리와 함께 가지 않겠니?'
나는 지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고개를 들었다.
'미안하구나. 이런 갑작스러운 말, 당황스러울 걸 아는데······.'
그리고 마주한 그녀는 아까보다 더욱 촉촉이 젖은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푸른 눈동자를 보고 입을 벌렸다.
'그래도, 널 여기 두고는 도저히 그냥 가지 못할 것 같아서.'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녀는 이미 멜팅턴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 내가 혼자 살고 있던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며칠 전 먼발치에서 나를 처음 봤을 때부터 몇 번이나 말을 걸까 말까 고민하고 망설였다고.
그러다 내가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 꽃을 내민 순간, 더는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참을 수가 없었다고 훗날 말해주었다.
'네가 우리 가족이 되어주었으면 좋겠어.'
그 말에 나는 한참 동안이나 마주한 푸른 눈동자를 바라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조용히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던 그녀를 향해 마침내 입술을 열었다.
만약 내가 또다시 과거의 그 시점으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분명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
"어쩜 이런 일이······."
"황실의 사유지에서 그런 일이 생기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비라도 내리면 좋을 텐데.
주위에서 수군거리는 목소리를 흘려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오늘 에른스트 부부의 장례식에는 굉장히 많은 사람이 찾아왔다. 에른스트와 연결된 일가친척들의 수도 적지 않았던 데다, 그들에게 조의를 표하기 위해 방문한 다른 가문의 사람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 이 자리에는 아를란타의 황족들까지 자리해 있었다.
하긴, 그럴 만도 하겠지. 에른스트 부부는 그들이 금지옥엽으로 여기는 황손을 지키다가 죽은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차기 황제가 되실 분을 구했잖아요."
"에른스트 공작은 마지막까지 황실의 검이라는 위명에 걸맞은 일을 하고 갔네요."
황실에서 주관한 사냥 대회에서 어린 황손을 노린 피습이 있었다고 한다. 나중에 밝혀진 범인은 황제의 총희였다.
암살자들을 피해 대피할 때, 그들을 교란하기 위해 황실의 마차 대신 에른스트의 마차에 황손이 올랐다고 들었다.
마침 그곳에는 카벨도 있었고 또 에른스트에 세 명의 남자아이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공공연했기 때문에 만일의 경우 에리히인 척 위장하기도 좋았을 터다.
계획은 처음에 성공했으나 에른스트의 마차는 도중부터 추격을 당했다. 그리고 결국 뒤쫓는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한계 이상으로 속도를 높인 마차가 전복되어 사고가 일어났다.
"피에셀, 그 여자도 어지간히 벼랑 끝에 몰려 있었나 봐요. 설마 이런 일까지 벌일 줄이야."
"아들을 낳았으니 황손만 없어지면 천하가 제 것이 될 줄 알았나 보죠. 그래 봤자 창녀의 핏줄인걸."
"게다가 폐하께서 총희를 새로 들이셨잖아요? 나이가 몇이더라, 새파랗게 어리다고 들었는데. 열여덟이나 열아홉이었던가? 그러니 초조해질 만도 하죠."
그 직후 동원된 기사들에 의해 반역자 무리는 곧바로 검거되어 한 명도 빠짐없이 처단되었다. 부서진 마차의 문을 열었을 때, 에른스트 부부는 두 아이를 보호하듯 끌어안은 채 죽어 있었다고 했다.
"황실의 입장에서는 에른스트가 황손의 생명을 구한 은인이나 마찬가지이니, 앞으로 입지도 더 돈독해지겠네요."
황실은 에른스트를 영원한 우방으로 공표하고 그들의 죽음에 깊은 조의를 표했다. 황제가 친히 오늘의 장례식에 걸음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니 어떤 의미로 에른스트 부부의 죽음은 정말 영광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되면 에른스트도 조금 위험한 것 아닌가요. 부부가 한날한시에 그렇게 가버렸으니······."
"장남이 있잖아요. 역시 에른스트네요. 이런 상황에서도 저렇게 의젓하게 있다니."
하지만 남겨진 사람에게 그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옆쪽에 선 유진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내 귀에 저런 말이 들려올 정도이니, 아마 유진도 그들이 소곤거리는 말을 듣고 있을 것이다.
카벨은 사건 이후 곧바로 사냥터와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슈마하 백작가에 보내져 지금까지 치료를 받고 있었다.
슈마하 백작은 세 형제의 당숙으로, 카벨은 상태가 위중해 한동안 더 그곳에 신세를 져야 할 것이었다. 그리고 에리히는 부모님의 부고를 들은 이후부터 너무 많이 울어 탈수 증세까지 올 정도였다.
"안쓰러워라. 막내가 아직 저렇게 어린데······."
나는 고모인 레놀드 후작 부인에게 안겨 울고 있는 에리히를 보았다. 시종일관 굳은 얼굴을 유지하고 있는 유진과 달리 에리히는 지금도 엉엉 울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 아이인가요? 재작년 에른스트에 들였다는 여자아이가."
"에른스트 부인은 자선사업에 취미가 있었나 봐요."
"어머, 그런데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것 좀 보세요."
"은혜도 모르고. 이게 다 저런 재수 없는 애를 에른스트에 들여서······."
수군거리는 목소리에는 나에 관련된 이야기도 포함되어 있었다. 나는 묵묵히 서서 그들이 하는 말을 들었다.
그러게. 그들은 나를 구해 줬는데, 나는 왜 그들을 구할 수 없었던 걸까?
살리고 싶었는데. 이번에는 죽게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는데. 모두가 함께하는 이 시간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본래 마차 전복 사고로 죽을 운명이었던 그들은 이번에도 역시 비슷한 이유로 죽었다. 하지만 상황은 좀 더 나쁘다고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카벨까지 휘말려 크게 다쳐 버렸으니까. 원래 이 시기에 사냥터에서의 피습이 있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에른스트 부부는 죽고, 카벨은 거동조차 못 할 정도로 큰 부상을 입게 되었다.
어쩌면 나는 내가 미래를 알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일을 좀 더 쉽게 해나갈 수 있다고 자만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하리도 우리 아가잖니.'
에른스트 부인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머릿속에 울려서 나는 손끝을 움찔 떨고 말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의 죽음이 슬프지 않은 것도 아닌데, 왜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걸까.
"한동안은 많이 힘들겠지만 굳세져야 한다. 뭐든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어려워 말고 말하려무나."
바스티에 백작 부부는 침중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다독여 주었다.
"우리 아이들도 많이 걱정하고 있단다. 나중에라도 괜찮으니 한번 연락 주렴."
첫 만남 이후 편지와 통신석을 이용해 연락하고 지냈던 요하네스와 루이제를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유진, 이제부터는 우리를 의지해 주면 좋겠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날 무렵, 에리히를 안고 있던 레놀드 후작 부인을 비롯한 친척 어른들이 다가와 말했다.
"힘든 때일수록 서로 기대야지. 우리는 가족이잖니."
그들의 말처럼 아무리 어른스러워도 유진은 아직 14살의 아이였고, 갑자기 벌어진 이 모든 일을 그 혼자 감당하기에는 힘들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유진은 여전히 메마른 눈동자를 한 채 다만 짤막하게 읊조렸다.
나는 약간 떨어진 자리에서 덩그러니 선 채 그런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에른스트 부부가 죽은 지금, 내가 저택에 있어도 되는 걸까?
오래전 가졌던 물음이 또 한 번 내 가슴 어귀를 서늘히 스쳐 지나갔다.
물론, 대답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
그 후 유진은 바빠졌다.
하루아침에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아 가문의 수장이 된 셈이니 당연했다. 원래도 유진은 에른스트 공작 부부의 타계 이후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생활을 했었다.
가문을 이을 후계자라면 누구나 적을 둬야 하는 학술원에도 아직 재학 중이었고, 그 와중에 에른스트 부부의 장례에서부터 정당한 승계의 절차까지 밟아야 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미리부터 준비된 승계가 아니라 에른스트 부부의 돌연사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본래 학기 중에는 기숙사 생활을 해야 했으나 에른스트의 상황을 배려받아 그는 한동안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그래서 유진은 새벽 일찍부터 황궁과 원로원을 오가며 에른스트의 저택에는 거의 잠만 자러 오곤 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택에는 나와 에리히만 남아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