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그 오빠들을 조심해 26화
물론 그가 시도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어째서인지 카벨은 충동적으로 나한테 손을 뻗기 무섭게 곧바로 흠칫하며 허공에 붕 뜬 제 팔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 그리고 결국은 내 몸에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다시 손을 내렸다.
흐음, 나는 그걸 보고 아무리 앞뒤 분간 못 하는 카벨이라고 해도 또다시 방에 갇혀 있는 벌을 받기는 싫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난 요한 오빠도 좋고, 요한 오빠랑 노는 것도 좋아하니까."
"뭐?!"
오늘도 요하네스와 함께 오순도순 종이접기를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 나는 방으로 돌아와 배신감에 점철된 카벨의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그딴 자식이 뭐가 좋다고!"
"왜? 싫어할 구석이 하나도 없잖아. 착하고 다정하고 나한테도 엄청 잘해 주는데."
"그럼 난? 난?!"
아니, 이 비양심적인 놈이? 지금 네가 저기에 해당 사항이 있다고 생각하니?
"나, 나도 너랑 잘 놀아주고 지난번에는 내가 먹을 과자도 너한테 줬잖아!"
내가! 이렇게! 너한테 잘해 주는데! 그런데 넌 날 배신해?!
둘째 진상은 온몸으로 나를 향한 배신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물론 나로서는 기가 찰 뿐이었다.
"오빠는 매일 놀자고 찾아와서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무작정 밖으로 끌고 나가잖아."
"너, 너도 좋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좋다고 했는데? 오빠는 항상 대답을 듣기도 전에 내 팔부터 잡아당겼어."
"내가 언제!"
"오빠랑 한 번 놀고 나면 내 몸에 멍이 얼마나 많이 생기는지 알아? 지난번에 오빠가 잡아당겼던 팔에도 빨간 자국이 남았고, 넘어지면서 찧었던 무릎에도 멍이 생겼단 말이야. 지난번에 내가 말했지? 난 오빠랑 달라서 공만 몇 번 던져도 팔이 아프고 힘들다고. 오빠는 나한테 한 번이라도 그런 걸 물어본 적 있어? 같이 공놀이하기 전에 나도 그러고 싶은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나 있어?"
내 말에 카벨이 또다시 어버버거렸다.
당연하게도 내가 지금 말한 것을 이제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표정이었다. 사실 이미 그럴 줄 알았기 때문에 나는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사실 난 온 집안을 뛰어다니면서 술래잡기하는 것보다 방에서 종이접기 하는 게 더 좋아. 그리고 공놀이하는 것보다 인형 놀이 하는 게 더 좋아. 하지만 오빠는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았지?"
크흡, 솔직히 종이접기나 인형 놀이가 더 좋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런 게 재미있겠니. 하지만 지금은 둘째 진상을 상대해야 하니 그냥 넘어가자.
"그런데도 난 오빠가 같이 놀자고 할 때마다 싫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오빠가 몰랐던 것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야."
"내, 내 말이 그거야! 넌 싫다고 안 했잖아!"
"그래, 그건 내가 그런 걸 다 참고 놀 만큼 카벨 오빠를 아주 많이 좋아했기 때문이야."
"뭐?"
나는 지금 내가 한 말에 놀라 반문하는 둘째 진상을 힐끔 쳐다보았다. 그러자 아주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카벨은 내 말이 퍽 뜻밖이었는지 아주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조, 좋아해? 나를? 진짜? 그 재수 없는 놈보다 더?"
"당연히 훨씬 더 좋아했지."
카벨이 나를 향해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냈다. 평소에도 지는 것을 워낙 싫어하던 성격이니만큼 나와 친하게 지내는 요하네스에게 요 근래 들어 기이한 경쟁의식을 느끼는 것 같던 둘째 진상이었다.
그런데 한동안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요하네스하고만 놀던 내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을 하니 한풀 꺾여 있던 자신감이 대번에 회복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둘째 진상아, 내가 지금 '좋아했다'고 과거형으로 말하지 않았니?
"그런데 오빠는 요한 오빠랑 루이제 앞에서 그런 날 두고 오빠 동생이 아니라고 소리쳤잖아?"
표정이 한결 밝아졌던 카벨은 잇따른 내 말에 흠칫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눈썹을 축 늘어뜨리고 슬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서 날 아프게 한 것도 하나도 미안하지 않다고 했지. 그때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카벨 오빠는 모를 거야."
"그, 그때는 그 자식 때문에 열 받아서······."
"그래서 난 이제 오빠를 안 좋아하기로 했어. 이제 카벨 오빠를 오빠라고도 안 부를 거야."
쿠콰콰쾅!
내 단호한 말에 카벨이 또다시 뒤통수를 얻어맞은 얼굴을 했다. 그는 그런 게 어디 있냐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카벨을 향해 한숨을 포옥 내쉰 뒤 다시 입을 열었다.
"요한 오빠는 말이야. 누구랑은 달리 뭘 할 때마다 항상 내 생각을 먼저 물어봐 줘. 내가 싫어하는 건 절대로 하지 않고, 어쩌다 한 번 실수한 것도 곧바로 미안하다고 사과해 주는걸."
"나, 나도 그럴 수 있어!"
옳거니, 걸렸구나!
"게다가 카벨 오빠랑 달리 내 팔을 아프게 잡아끌지도 않고, 카벨 오빠랑은 달리 날 쓰레기라고 부르지도 않고, 또 카벨 오빠랑 달리 자기 좋을 대로만 행동하지도 않는다고."
"씨이, 내가 그 자식보다 더 잘할 수 있다니까!"
나는 두 눈에 의심을 가득 담아 '네가?' 하는 눈빛으로 카벨을 바라봐 주었다. 그는 나한테 요하네스와 비교당하는 게 싫은지 씩씩거렸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흐음, 소리 내다가 마지막으로 말했다.
"하지만 난 자기 잘못을 인정할 줄도 모르는 오빠랑은 놀기 싫은걸."
그러자 둘째 진상이 주춤거리며 우물거렸다.
"나, 난 그렇게 쉽게 다칠 줄 몰랐단 말이야."
"그래, 모르고 그런 거면 미안하지도 않고 사과도 안 해도 되고 잘못한 것도 아닌 거지?"
"그냥 살짝 친 건데 설마 피까지 날 줄은 몰랐다고······."
"휴우, 어쩔 수 없지. 난 요한 오빠랑······."
"아, 그래도 미안하다고!"
마침내 둘째 진상의 입에서 미안하다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내가 문 쪽으로 돌렸던 몸을 다시 원상 복귀시키고 물끄러미 쳐다보자 카벨이 몸을 비비 꼬며 더듬더듬 말했다.
"나 사과 한 번도 안 해봤어.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몰라."
그 말 그대로 둘째 진상이 이런 식으로나마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지금 이 순간이 무척이나 민망하고 견디기 힘든 것 같았다.
"그, 그래도 나 때문에 다쳤던 건 미안하다고 새, 생각해."
나는 몸이 근질근질한 듯 어쩔 줄 몰라 하는 둘째 진상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걔 말고 나랑 놀아, 나랑!"
마지막은 다시 떼쓰기였다.
음, 요하네스한테도 사과하게 하는 건 아직 무리겠지? 둘째 진상치고는 굉장히 많이 분발했는데 오늘은 일단 이 정도로 할까? 나는 잠깐 무언가를 재보다가 이쯤 하기로 결정하고 입을 열었다.
"으음, 아직 오빠를 믿어도 될지 잘 모르겠어."
"뭐엇?!"
"하지만 난 오빠를 아직도 많이 좋아하니까 앞으로 같이 놀아도 될지 생각해 볼게."
"그, 그래? ······가 아니고 그냥 놀면 되지 무슨 생각을 해!"
"오빠, 지금 나한테 무섭게 소리 지른 거야?"
"아, 아니······."
아무래도 나는 어린 둘째 진상을 전보다 더 효과적으로 부려 먹을 수 있게 될 것 같다. 나는 다시금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 카벨 몰래 속으로 슬쩍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허허, 다음에는 저희 바스티에로 초대하겠습니다."
"우리 집에 놀러 와, 언니!"
은여우 사냥철이 지나고 바스티에의 가족들이 에른스트를 떠나는 날이 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방문한 첫날처럼 또 1층에 다 같이 모여 손님을 배웅했다.
나는 그동안 정든 요하네스와 루이제가 떠난다는 사실에 약간 서운했으나, 사실상 그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적었던 카벨과 에리히는 별로 그렇지도 않은 눈치였다.
뭐, 유진이야 애초부터 우리 같은 어린애들과는 노는 급이 달랐으니 논외로 치고. 무엇보다도 요하네스와 싸운 적이 있는 카벨은 오히려 앓던 이가 빠져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져서 대놓고 희희낙락하는 둘째 진상 때문에 에른스트 부부는 민망한 기색이었다.
반면 바스티에 부부는 저택에 머무는 동안 제 아들만 보면 으르렁거리기 바빴던 그를 왜인지 흡족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끄응, 가만히 보면 바스티에 부부는 대인배인 건지, 아니면 자기 아들을 싸움 붙여서 거칠게 키우려 하는 이상한 사람들인 건지 잘 모르겠다.
"하리."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 건지 요하네스가 내게 다가왔다. 크흑, 내 미래 신랑과 이렇게 작별이라니. 진짜 떨어져 있는 동안 편지라도 교환하자고 할까?
처음에야 카벨에게 당하는 모습을 보고 내가 지켜줘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심지도 굳고 참 바른 심성을 가지고 있는 요하네스였다. 하긴, 그러니까 20년 후에도 그렇게 멋진 남자로 자랐겠지?
"저어, 이거 선물이야."
그런데 내가 아련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는 사이, 요하네스가 주저하며 무언가를 내게 내밀었다.
"선물?"
그 말에 고개를 내린 나는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요하네스가 내게 준 것은 다름 아닌 통신석이었다! 그것도 받침에 붙어 있는 반짝이는 구슬의 개수를 보니 무려 5번이나 사용할 수 있는 초고가의!
"혹시 괜찮으면, 그러니까, 나한테 가끔 연락해 줄 수 없을까 하고······."
요하네스는 그렇게 말한 뒤 차마 내 얼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그의 뺨은 발그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뜻밖의 선물에 나뿐만 아니라 에른스트 부부도 놀랐다. 사실상 요하네스가 나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해도 그 값을 지불한 사람은 부모인 바스티에 부부일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당황하는 에른스트 부부를 향해 바스티에 부부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아이들이 하리와 많이 친해진 모양이에요. 요한이 며칠 전에 갑자기 찾아와서 통신석을 구해 줄 수 없냐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런 귀한 걸······."
"요한이 몇 년간 생일 선물을 안 받아도 된다고 하면서 부탁하는데 별수 있나요."
바스티에 부부는 배포가 컸다. 아무리 그렇다 한들 어린애들끼리 연락을 주고받는 데 이용하라고 통신석을 덜컥 사 주다니.
"사실 에른스트에 와서 요한이 전보다 숫기가 많아진 것 같아 저희도 기쁜걸요. 아이들끼리도 간혹 연락하고 지내면 좋을 것 같고요."
바스티에 부부의 웃음 띤 눈빛에 나는 괜히 얼굴이 간지러워졌다. 뭔가 쑥스럽기도 하고 멋쩍기도 한 그런 기분인데.
요하네스는 여전히 뺨을 붉힌 채로 고개를 숙이고 웅얼거렸다.
"하, 하지만 나랑 연락하는 게 싫지 않으면 해 달라는 거고, 아니면 다른 데 써도 돼."
그 모습에 나는 또 마음이 짠해졌다. 이런 고가의 선물을 주면서 심지어 다른 데 사용해도 된다니! 이럴 때는 그냥 어린애답게 '나랑 연락할 때만 써야 돼!'라고 우겨도 될 텐데.
"싫을 리가 없잖아! 고마워, 요한 오빠."
나는 그를 향해 온 마음을 담아 활짝 웃어주었다.
그러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던 요하네스가 한순간 두 눈을 크게 뜨며 잠시 굳어지더니 다음 순간 얼굴을 폭발할 듯이 붉게 물들이는 것이었다.
"오빠도 먼저 연락해 줘야 돼?"
"으, 응. 그, 그럴, 그럴게······."
심지어 그는 나와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간 듯 어쩔 줄 몰라 하며 말을 더듬기까지 했다.
"하하하! 그래, 앞으로도 친하게 지내라. 우리 꼬맹이들!"
그 모습을 보고 바스티에 백작이 껄껄 소리 내 웃으며 요하네스의 머리를 애정을 담아 손으로 마구 헤집었다.
그렇게 바스티에의 가족은 에른스트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