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그 오빠들을 조심해 25화
누가 들어도 영혼이 없는 목소리로 말하자 카벨이 불만스러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를 향해 고개조차 돌리지 않고 둘째 진상이 내 방에 오기 전까지 하던 대로 종이접기만 계속했다.
"사슴 털로 장갑도 만들 수 있대!"
"그래."
"너도 갖고 싶지? 그치?"
"난 별로."
"네가 부탁하면 특별히 너 줄 수도 있는데?"
둘째 진상이 한껏 생색내며 말했으나 그러는 와중에도 슬쩍 내 눈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이놈이 나한테 와서 왜 이러는지 이미 눈치를 챈 뒤였다. 하지만 여전히 둘째 진상을 쳐다보지도 않고 그냥 싸늘하게 대답했다.
"필요 없어."
"뭐? 왜 필요 없어, 왜!"
아오, 이 개진상. 너 반성했다는 거 다 거짓말이지? 그렇지?
둘째 진상이 웬일로 내 눈치를 다 본다 했더니 그건 역시 오래 가지 않았다. 나는 내가 열심히 접고 있던 초록색 종이를 홱 뺏어가며 성질을 부리는 카벨에게 처음으로 시선을 돌렸다.
"네가 부탁하면 내가 특별히 너한테 주겠다는데!"
놈은 내가 자신의 뜻대로 반응하지 않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혼자서 씩씩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둘째 진상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난 네 동생도 뭣도 아니니까 너한테 그런 거 받을 이유 없어."
"뭐······?!"
"그러니까 너나 가져."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카벨이 입을 쩍 벌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냉큼 손을 뻗어 카벨의 손에 들린 종이를 낚아채 갔다.
"내 개구리 내놔."
그는 내 말이 어지간히 충격적이었는지 아직까지도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은 채 어버버거리고 있었다.
참나, 고작 이 정도 가지고 놀라기는? 앗! 그런데 심혈을 기울여 접은 내 개구리! 뒷다리가 구겨졌잖아! 이따가 루이제랑 놀기로 해서 접은 건데.
"이게 뭐야, 너 때문에 다리 접혔잖아."
약간 짜증스럽게 투덜거린 내 말에 카벨이 불현듯 정신이 돌아온 듯 '헉!' 숨을 들이켰다.
"너, 너, 너, 너! 지금 나한테 너라고 했어?!"
흥, 귓구멍은 제대로 열렸구먼. 나는 카벨에게 보란 듯이 귀를 후비적거렸다.
"좀 이따가 루이제 오기로 했어.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말고 내 방에서 나가."
평소와 다른 내 모습에 꽤나 놀란 듯 둘째 진상은 어울리지 않게 버벅거렸다. 그런데 이 단순한 인간의 생각이 곧 어디로 닿았는지, 잠시 후 카벨이 변명조로 나한테 외치는 것이었다.
"너 내 친동생 아, 아닌 거 맞잖아!"
아무래도 요하네스와의 마찰 때 나한테 '쟤는 내 동생 아니야!'라고 말했던 게 신경이 쓰이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생각하기로, 내가 그 말에 삐져서 이러는 것 같았나 보지?
나는 두 눈을 가늘게 뜬 채 내 앞에 있는 둘째 진상을 잠깐 간 보다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래, 난 네 동생 아니야. 지금 내 말이 그 말이잖아."
"뭐어?! 네 말이 그 말이라니······! 다, 다르거든!"
"다르긴 뭐가? 뭐가 어떻게 다른데?"
"으, 으씨이, 너 아까부터 자꾸 왜 나한테 너래?!"
"동생도 아닌 애한테 오빠 소리 듣고 싶은 건 아닐 거 아냐? 나도 내 오빠 아니라고 하는 사람한테는 오빠 소리 하고 싶지 않거든."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카벨을 향해 일부러 쌀쌀맞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근신 이후에도 마냥 막무가내로 날뛸 줄 알았던 카벨이 은근히 내 눈치를 살피는 걸 보고 나도 지금 나름대로 강수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게다가 다른 건 아직 어려서 그렇다 치고 참고 넘어가도 내 미래 남편에게 주먹을 든 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다!
저 개 같은 성미를 지금 조금이라도 억눌러 두지 않으면 둘째 진상은 진짜 진상의 끝판왕이 될 수도 있었다. 그것만큼은 절대로 안 되지! 너 때문에 미래 남편이 도망가면 어떡할 거야?
똑똑!
"하리, 들어가도 돼?"
"들어와!"
바로 그때, 타이밍 좋게 요하네스가 내 방을 찾아왔다. 나는 할 말이 없어서 입술만 벙긋거리고 있는 둘째 진상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루이제가 부탁해서 대신 데리러 왔······."
막 문을 열고 내 방으로 들어서던 요하네스가 카벨을 보고 멈칫했다. 카벨도 요하네스를 보자마자 언제 내 앞에서 얼빵한 모습을 보였냐는 듯이 험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앗, 저 둘째 진상은 그렇다 쳐도 요하네스도 저런 표정을 지을 수 있구나! 첫날 카벨에게 눈 폭탄을 맞고 울먹이던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딱딱한 표정인데?
아무튼 나는 방금 전까지 열심히 접고 있던 개구리와 다른 색종이를 들고 요하네스를 향해 반갑게 달려갔다.
"요한 오빠, 어서 와!"
바로 그 순간 카벨이 빛의 속도로 나를 홱 돌아보았다. 그런 그의 얼굴은 마치 믿었던 사람에게 엄청난 배신을 당한 사람 같아서 나는 코웃음이 나왔다.
"루이제 대신 와준 거야?"
"응. 루이제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어."
오히려 보란 듯이 내가 방긋 웃으면서 요하네스에게 다가가자 둘째 진상의 표정은 더욱 볼만해졌다.
"그럼 가자, 오빠."
"어딜 가! 너 나랑 먼저 얘기 중이었잖아!"
둘째 진상이 씩씩거리면서 나한테 한 발짝 더 성큼 다가왔다. 그에 맞추어 요하네스가 카벨을 향해 경계심 어린 표정을 짓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둘째 진상은 지난번에 제 부모님에게 혼났던 기억 때문인지, 들어 올린 손을 움찔거릴 뿐 또다시 나한테 난폭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난 할 말 다 끝났는데? 뭐, 나한테 더 하고 싶은 말 있어?"
카벨은 뭔가 굉장히 마음에 안 들고 심통이 나는데 그걸 어떻게 표출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씨근덕거리다가 이윽고 나 대신 내 옆에 있던 요하네스에게 버럭 소리쳤다.
"내가 먼저 얘랑 얘기하고 있었는데 비겁하게 새치기하지 마!"
카벨이 이를 갈며 외친 소리에 요하네스가 잠깐 움찔했다. 본래 성정이 워낙 온순해서 그런지, 아니면 이런 식으로 사납게 구는 사람을 일찍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요하네스는 이런 상황이 퍽 낯선 눈치였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굳은 눈빛을 보이며 물러서지 않았다.
"하리는 너랑 더 할 말 없다고 하잖아."
"이, 이! 멍청하게 생겨서 바보같이 동생 심부름이나 하는 게! 허구한 날 여자애들 비위나 맞추고!"
"뭐? 난 그런 생각밖에 못 하는 너야말로 바보라고 생각하는데."
"뭐야?!"
"그것보다 너, 하리한테 사과는 하고 이러는 거야? 너랑 나 때문에 다쳤었는데."
그 순간 둘째 진상이 또다시 말문이 막힌 얼굴로 입을 벙긋거렸다.
"요한 오빠, 그만해."
이번에는 내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런데 내가 요하네스를 말리자 카벨이 묘하게 반짝이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아니, 둘째 진상아. 설마 지금 내가 네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괜히 말씨름해서 시간 낭비할 필요 없어. 요한 오빠가 설명해도 어차피 못 알아들을 게 뻔해. 그냥 상대하지 말고 루이제한테 가자."
나는 그래서 네가 안 된다는 듯이 카벨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한숨까지 폭 내쉬어준 뒤 다시 눈길을 돌렸다.
"요한 오빠, 종이접기 잘해?"
"토끼랑 여우 접을 줄 알아. 아, 거북이도."
"진짜? 대단하다. 난 개구리는 접을 줄 아는데 다른 건 까먹었어."
"방에 가서 내가 가르쳐 줄게."
나는 카벨을 뒤로 한 채 요하네스와 함께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며 방을 나섰다. 둘째 진상이 '저, 정말 나만 두고 가는 거야? 진짜?'라며 소설 속 비운의 주인공처럼 등 뒤에서 외쳤지만 그런 소리는 요하네스도 나도 가뿐히 무시해 주었다.
***
그 후로 나는 둘째 진상을 본체만체하기 시작했다.
"야, 너 자꾸 그럴 거야? 왜 자꾸 나 무시해!"
"카벨, 적당히 해."
"형, 형도 뭐라고 좀 해봐!"
"뭘 뭐라고 해. 하리가 너랑 놀고 싶지 않다고 하잖아."
쿠콰콰쾅!
유진의 말에 둘째 진상의 얼굴이 뒤통수를 후려 맞기라도 한 듯 멍청해졌다. 그는 차마 믿었던 형마저 자신에게 이럴 줄 몰랐다는 듯 동공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형 미워!"
결국 둘째 진상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서럽게 외친 뒤 두다다다 복도 끝을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유진은 그런 카벨의 뒷모습을 보며 그저 한 차례 혀를 찰 뿐이었다.
"무슨 소란이니?"
"아, 별일 아니에요, 어머니. 카벨이 집 안에만 있으니 심심한 모양이에요."
"그래? 그 애는 참 누구를 닮았는지 가끔 보면 지나칠 정도로 기운이 좋단 말이야. 겨울이 지나면 듀크 경이라도 붙여 줘야 할지."
듀크 경이라면 카벨이 어릴 때 검술을 배웠던 에른스트 소속의 연륜 있는 기사 말인가? 아직 그에게 정식으로 가르침을 받고 있는 건 아니었구나. 나는 그런 심심한 생각을 하며 멀어지는 에른스트 부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스티에의 남매가 마음에 들어?"
그런데 문득 머리 위에서 질문이 날아들어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덧 나를 쳐다보고 있는 유진이 눈에 들어왔다.
"응, 뭐······. 둘 다 착하기도 하고, 같이 놀면 재미있고 좋아."
"그래, 이제 곧 헤어지면 아쉽겠네."
어느덧 시일이 꽤 지나 바스티에의 사람들이 에른스트를 떠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럼 요하네스도 그렇고 루이제도 이제 또 한동안 안녕인 건가.
유진이 말한 대로 좀 아쉽다. 이제 헤어지면 또 언제 볼 수 있는 거지? 서, 설마 20년 후는 아니겠지?
그런 내 복잡한 표정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유진이 덧붙여 말했다.
"괜찮아. 지금 헤어져도 곧 또 볼 수 있을 거야. 어머니, 아버지도 이번 사냥철 때 분위기가 마음에 드신 눈치고, 바스티에와는 몇 년 전에만 해도 교류가 잦은 편이었으니까."
앗, 그건 처음 안 사실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바스티에와 교류가 있었다니. 으음, 그러고 보니 아리나가 죽은 후부터 에른스트가 전보다 폐쇄적인 분위기가 되었다고 얼핏 들은 기억이 있기도 하고.
그런데 이번 사냥철 때는 갑자기 왜 다른 가문을 초대한 거지?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역시 어릴 때 내 기억 속에는 바스티에가 없는데.
그러다 문득 나는 지난번 가족 나들이 후 유진이 진지하게 에른스트 부부와의 대화를 청했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 후 이 집안에 갑작스럽게 생겨난 다과 시간이나, 에른스트를 정기적으로 방문하기 시작한 의사 등의 낯선 변화에 대해서도.
그럼 이 모든 것의 원인은 혹시 첫째 진상이란 말인가?
"거리가 거리니만큼 자주 만나는 건 힘들 수 있지만 그만큼 많이 연락하고 지내면 되니까. 바스티에의 남매도 너를 좋아하고 있으니 쉽게 끊어질 인연은 아닐 거야."
그런데 심오한 고민에 빠진 나를 보고 어떤 오해를 했는지, 유진이 또 어울리지 않게 저런 말로 나를 위로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는 지난번처럼 내 머리 위에 은근슬쩍 손을 올리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그러니까 너무 서운해하지 마."
······아니, 그러니까 당신 말이야. 도대체 뭘 잘못 먹고 이러는 건지가 난 궁금하거든요?
나는 머리를 쓰다듬는 유진의 서툰 손길을 받으며 어쩔 수 없이 매우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내 의문을 풀어줄 사람은 어디에도 없어서, 나는 오도 가도 못한 채 어색하게 눈동자만 굴릴 수밖에 없었다.
***
"너 왜 매일 쟤랑만 놀아! 쟤도 네 오빠 아닌데!"
둘째 진상은 오늘도 지치지 않고 진상짓을 해댔다.
그나마 전보다 나은 것이라 한다면, 내 팔을 우악스럽게 잡아끈다거나 강제로 나를 밖으로 끌고 나간다거나 하는 행동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는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