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그 오빠들을 조심해 24화
"언니가 불쌍해."
그런데 루이제가 어린아이 특유의 순진함이 담긴 눈동자 안에 동정심을 품고 그렇게 말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나는 잠시 목에 가시가 박힌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바로 그때, 옆에 있던 요하네스가 드물게도 단호한 음성으로 동생을 향해 말했다.
"루이제, 그건 베키가 널 겁주려고 그냥 한 말이야."
"그럼? 괴물 없어?"
"없어."
"그럼 언니가 살았던 데는 어떤 곳인데?"
호기심이 가득한 눈동자가 다시 한번 나를 향했다. 이번에도 내가 무어라 답하기 전에 요하네스가 대신 입을 열었다.
"거기도 똑같아. 너랑 베키 같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야."
"진짜? 그럼 베키가 나한테 거짓말한 거야?"
"넌 길을 쉽게 잃으니까, 너 혼자 가게 되면 위험한 곳은 맞지. 다시 집으로 찾아오지 못할 테니까."
"그건 싫어!"
"그리고 난 하리가 예전에 어디에서 살았든, 그거랑 상관없이 하리가 좋아."
"그건 나도, 나도야!"
루이제는 금세 요하네스에게 동화되어 내가 자신의 집에 놀러 오면 토순이와 곰곰이뿐만이 아니라 짹짹이와 호돌이 인형까지 보여 주겠다고 재잘거렸다.
"하리야, 그럼 이따 저녁 식사 시간에 또 만나."
"언니, 밥 먹고 나랑 또 놀아야 돼!"
잠시 후, 나는 웃는 낯으로 요하네스와 루이제를 배웅했다.
그리고 문을 닫고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나는 입가에 머금고 있던 미소가 서서히 사그라지는 것을 느꼈다.
루이제의 호기심 어린 물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어린아이가 의미 없이 꺼낸 소리인 만큼 방금 전의 대화가 나한테 그리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의 물음에 한동안 잊고 있던 옛 기억이 저 아래에서부터 조용히 부상했을 뿐이다.
내가 살던 데가 어떤 곳이었냐고?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음에도 나는 멜팅턴에서의 기억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
나는 잠시 동안 침대에 앉아 발을 느리게 흔들다가 곧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찬바람에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내가 살던 곳은······ 춥고 배고픈 곳.
엄마가 죽은 후에는 아무도 나를 찾지도,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곳.
그래서······.
나 혼자 언제까지나 외톨이로 있어야만 했던 그 멜팅턴의 차가운 거리.
***
"이야, 매일 느끼는 것이지만 에른스트의 만찬은 참으로 훌륭하군요."
저녁 식사 자리에서 바스티에 백작이 눈앞의 산해진미를 보며 감탄했다.
"할 수만 있다면 주방장을 저희 바스티에에 데려가고 싶을 정도예요."
"호호. 주방장이 그 소리를 들으면 기뻐하겠네요."
과연 그 말처럼 식탁 위에는 군침이 도는 요리들이 상다리가 휠 정도로 가득 올라와 있었다.
"하리야, 음식이 자리에서 좀 멀지? 접시에 조금씩 덜어줄게."
"네, 고맙습니다."
에른스트 부인의 호의로 내 앞에는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음식들이 먹기 좋게 조금씩 덜어졌다.
그런데 침샘을 자극하는 요리를 눈앞에 두고 있으려니 어째서인지 잠깐 기분이 미묘해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낮에 보았던 루이제와의 대화로 멜팅턴에서 살았을 때의 일을 상기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 당시만 해도 다 말라비틀어진 딱딱한 검은 빵이라도 먹을 수 있으면 재수가 좋은 거였는데······. 지금의 나는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호화로운 음식들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리야, 다른 걸 가져다줄까?"
내가 포크를 들고 접시만 내려다보고 있자 에른스트 부인이 물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그녀를 향해 헤헤 웃어 보였다.
"아니에요, 맛있어요!"
그리고 마침내 맛을 본 송아지 요리는 입에서 살살 녹는 극락의 맛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는 감동하여 그때부터 다른 아이들처럼 접시 위에 있는 음식을 폭풍 흡입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에른스트 부인도 안심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내게서 시선을 뗐다.
"그러지 말고 한 잔 더 하시죠."
"어제도 많이 마셔서 오늘은······."
"엄마, 나 저거, 저거 더 줘!"
"잠깐. 옷에 흘렸잖니, 루이제."
시끌벅적한 식탁 위의 풍경에 나는 새삼스러운 감회를 느꼈다. 사람이 많은 만큼 와글와글 시끄럽고 조금 정신이 산만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나는 이런 광경이 그리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카벨 오빠한테 다녀오세요?"
식사 시간 후, 나는 루이제에게 손을 붙들려 방으로 가다가 에른스트 공작 부인을 만났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식당을 떠난 데 이어 손에 접시를 든 채 카벨의 방이 있는 곳에서 걸어오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식사 시간까지 혼자 있게 하는 건 아무래도 좀 그래서 말이야."
방에서 근신하고 있는 둘째 진상에게 식사를 챙겨 주러 갔던 거겠지. 그녀의 손에 들린 접시는 마치 핥아 먹기라도 한 듯이 깨끗하게 비어 있었다.
혼자 방에 있으면서 둘째 진상이 많이 풀 죽었다고 들었는데 그래도 왕성한 식욕은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래야 둘째 진상답기는 하다.
에른스트 부인이 나와 루이제를 향해 미안함이 담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어제부터 단단히 타일렀으니 그 애도 이제는 과격한 짓을 하지 않을 거란다. 요하네스와의 일도 그렇고 하리 네 일도 많이 반성하고 있어. 그래도 너희가 원한다면 한동안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렴."
아, 이야기를 들어보니 카벨의 근신을 곧 풀어주려는 것 같다. 왠지 그럴 것 같기는 했어. 아무리 훈육의 목적이라고 해도 9살짜리 애를 방에 혼자 오래 가둬 두는 건 정서상 안 좋기도 하고. 게다가 그 대상이 비글 같은 둘째 진상이니 더욱.
"그 오빠 없는 게 좋았는데."
에른스트 부인과 헤어지고 나서 방으로 가는 길에 루이제가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크윽, 아무래도 이 작은 아가씨한테 카벨이 어지간히 크게 찍힌 게 아닌가 보다.
"또 우리 오빠랑 하리 언니 괴롭히면 똥침 놓을 거야."
쿠, 쿨럭. 잠깐만, 그거 뭔가 귀족 아가씨가 할 법한 대사가 아닌 것 같은데?
하지만 루이제는 눈까지 번뜩이며 똥침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냥 식은땀을 삐질거리며 그런 그녀를 모른 척하고 말았다.
***
카벨은 이틀 뒤 방에서 나왔다.
그는 풀이 죽었다는 말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밖으로 나오자마자 살판이 나서 집안 곳곳을 쏘아 다녔다.
하지만 에른스트 부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나만 보면 멀찍이서 우물쭈물 눈치만 볼 뿐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다.
한 가지 인상 깊은 점이라 할 것은 카벨과 요하네스 사이에 냉기가 흐른다는 사실이었다.
카벨은 자신이 샌님 같은 요하네스에게 훈계를 들은 거로도 모자라서 얼굴을 얻어맞았다는 사실이 꽤 깊은 앙금으로 남은 것 같았고, 요하네스는 그 나름대로 카벨을 볼 때마다 찬바람을 쌩쌩 불며 그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근신 후 밖으로 나온 카벨의 광대에 피멍이 들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아무래도 요하네스의 주먹이 생각처럼 물렁한 솜방망이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또 요하네스는 이제 나를 볼 때마다 전처럼 말을 더듬지는 않았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그의 말투가 아마 낯가림의 일종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 이렇게 미래의 남편과 차근차근 한 계단씩 친분을 쌓는 거야!
"오빠, 또 서재에 가?"
"아, 응. 유진 형한테 재미있는 책이 많아서."
의외인 것은 요하네스와 유진이 은근히 통하는 구석이 있는 것 같다는 점이었다.
그는 내가 루이제와 노는 동안 유진의 서재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고는 했는데, 둘이 책 취향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대화도 곧잘 통하는 것 같았다.
둘 다 장남이라 그런가? 나는 의외의 공통분모를 발견하고 기분이 약간 미묘해졌다.
어쩌면 내가 몰랐을 뿐, 미래의 유진과 요하네스 사이에 나름의 교류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유진이 요하네스를 내 신랑감으로 눈도장 찍었던 게 아닐까?
아무튼 근신에서 벗어난 뒤 이번에는 유진 대신 카벨이 아저씨들의 사냥을 따라갔기 때문에 저택에는 간만에 평화가 감돌았다.
처음에는 반대하던 어른들도 둘째 진상의 괄괄한 모습에 이제는 어쩔 수 없다 싶었는지 더 이상은 적극적으로 그를 말리지 않았다.
"넌 나랑 하나도 안 닮았어."
루이제까지 낮잠이 들자 나는 마음 놓고 간만의 고요함을 즐길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웬일로 제 방에서 나온 에리히를 만나기 전까지였다.
셋째 진상은 바스티에 백작이 첫날 한 말을 아직까지 마음에 담아둔 듯했다. 그러니까 저렇게 날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내뱉은 첫 마디가 이런 거겠지.
"너 같은 거랑 내가 닮았다니 기분 나빠. 불쾌해!"
아이고, 그러십니까? 나라고 해서 너랑 닮았단 소리가 반가운 건 아니란다. 그리고 내가 보기에도 너랑 나는 별로 안 비슷하게 생겼고. 굳이 닮은 부분을 찾자면 텅 비어 있는 앞니랄까······.
어흑, 새삼스럽게 가슴에 스크래치가! 내가 앞니도 없는 이런 우스운 몰골로 내 예비 신랑을 만나고 있다니!
"당연하지, 나보다 네가 훨씬 더 예쁜데."
내가 심드렁하게 내뱉은 말에 에리히가 한순간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설마 내가 자기에 대해 칭찬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해서 저러는 건가? 아니면 남자애한테 예쁘다는 말을 해서?
"웃기지 마!"
앗, 둘 다인가 보다. 그나저나 얘 지금 당황한 거 맞니? 지금 동공이 겁나게 흔들리고 있는데요.
그래도 에리히가 예쁘다는 건 진짜였다. 성격이 좀 뭐 같아서 그렇지 겉가죽만큼은 성화 속의 아기 천사 뺨치게 생겼으니까.
반면 나는 이제 막 살이 오르기 시작해서 볼품없는 수준에서 겨우 벗어나기 시작한 단계였지만······. 흥, 나도 좀 더 나이 먹으면 청초한 미인이 될 거라고.
"뭐가 웃기다는 거야? 그럼 넌 네가 안 예쁘다고 생각해? 진짜?"
"난, 난 잘생긴 거야!"
"너 그거 이상한 편견이야. 원래 예쁜 건 성별을 가리지 않는 거거든? 그럼 넌 거울을 볼 때마다 네가 예쁘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단 말이야? 넌 내가 지금까지 본 사람 중에서 제~ 일 예쁜데."
"아니야!"
얼굴을 붉히며 기를 쓰고 소리치는 셋째 진상을 보니까 마치 내가 아가씨를 희롱하는 불한당이라도 된 것 같다. 그런데 이거 생각보다 재미있잖아?
"그래, 네 생각대로라면 그럼 너보다는 여자애인 내가 더 예쁘다는 거네. 아, 혹시 그래서 웃기지 말라고 한 거야? 사실은 내가 너보다 더 예쁜데 반대로 말해서?"
그러자 내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에리히가 와락 얼굴을 구겼다. 호오, 이제 보니 셋째 진상에게는 오히려 이런 식의 도발이 잘 먹히는 건지도······.
"너 진짜 짜증 나!"
그래도 나랑 길게 말씨름할 기운까지는 없는지 셋째 진상은 매몰차게 외친 뒤 홱 뒤돌아서 달려갔다.
어른들이 사냥을 다녀올 때마다 속이 안 좋은지 밥도 잘 못 먹고 비실거리더니, 확실히 뛰어가는 뒤태가 전보다 좀 마른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신경 쓰이는 진상 놈이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사흘간 내 주위만 맴돌던 둘째 진상이 드디어 나한테 말을 걸었다.
"야, 너 내가 잡아 온 사슴 봤어?"
슬쩍 다가온 카벨은 지금까지 자기가 언제 눈치를 봤냐는 듯 한껏 거들먹거렸다.
"나 완전 대단하지? 멋지지?"
어이구, 아저씨들이 사냥하는 데 따라가서 끽해야 숟가락만 얹었을 게 안 봐도 뻔한데 잘난 척은.
"그래, 대단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