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그 오빠들을 조심해 19화
"이건 너무하잖아. 우윽. 나는 시키는 대로 항복도 했는데······."
파사삭! 와장창!
어, 어디서 무슨 소리 안 나요? 내 환상이 부서지는 소리······.
"시끄러워! 졌으면 잠자코 벌칙을 받으라고!"
"아앗!"
두다다다!
카벨이 다시 눈 폭탄을 던지는지 시야에 하얀 가루가 또 한 차례 흩날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 뿌연 광경 속에서 소년이 다시금 울먹이는 모습을 약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이, 이 소년이 요하네스 바스티에가 맞을 텐데? 뭐, 뭐죠. 어릴 때와 어른일 때의 이 성격적인 거리감은······.
"크헤헤! 바보! 이거 하나 못 피하냐?"
내가 충격에 빠져 있는 사이 둘째 놈은 계속해서 진상짓을 해댔다.
"하지 마! 너 나빠!"
그때, 저 멀리 서 있던 하늘색 머리카락의 소녀가 카벨의 가차 없는 공격에 발끈한 듯이 마찬가지로 울먹이며 소리쳤다.
하지만 어린 소녀의 필사적인 외침은 딸꾹질과 함께 곧 허공에 사그라지고 말았다.
"야, 너도 눈 맞을래? 아까부터 봐주고 있는데 왜 자꾸 끼어들어?"
"내, 내 동생 건드리지 마!"
"그래. 네가 너한테만 던지라고 해서 지금 그러고 있잖아. 얍!"
"으악!"
와아, 아까부터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까 갈수록 가관이잖아? 상황이 뭔가 굉장히 정신없고 산만하고 그래!
"이거나 받아라!"
그리고 저 둘째 놈! 엎어 놓고 엉덩이를 백 대쯤 마구 때려 주고 싶어!
처음에는 내 예상과 다른 인상에 좀 놀랐지만 이렇게 계속 울먹이면서도 끝까지 날 보호해 주고 있는 요하네스 바스티에를 보니 뭔가 마음이 막 짠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둘째 녀석은······.
"잠깐만 비켜 줘 봐."
"어어. 자, 잠깐만!"
반면 저 둘째 녀석은 얼마나 무도한지! 방어조차 못하고 있는 사람을 저렇게 뒤에서 막 공격하다니! 게다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예비 남편을! 용서 못 해!
나는 카벨이 잠깐 눈 폭탄 투하를 멈춘 사이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크하하! 역시 이 카벨 님을 아무도 못 이기······ 꾸엑!"
퍽!
나는 목젖이 보이도록 웃어 대며 승리를 자축하고 있는 둘째를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가 그대로 놈의 배를 온몸으로 들이받았다.
카벨은 방심하고 있다가 나한테 명치를 치여 뒤로 퍼억 나자빠졌다. 내 몸에 얻어맞은 충격이 오죽 컸으면 넘어질 때의 비명도 돼지 멱따는 것 같은 '꾸엑!'이었다.
하얀 눈 속에 대자로 파묻힌 채 둘째 놈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바스티에의 남매도 깜짝 놀란 듯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다.
아, 이제야 좀 주위가 조용하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카벨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나를 향해 쩌억 입을 벌렸다.
"지금, 지금 날 친 거야? 아빠도 한 번 안 때린 나를? 네가?"
곧이어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은 실로 식상한 물음이었다.
'날 때린 건 네가 처음이야! 이것 참 신선한데! 너 마음에 들었어!'라는 로맨스 소설의 100년 묵은 정석을 따라 둘째 호구는 내게 폴 인 러브······ 같은 소름 끼치는 상상은 하지 말도록 하자.
그건 어디까지나 케케묵은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일 뿐이니까.
카벨은 간만에 나를 찢어 죽일 것 같은 험악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방심했다고는 하나 나한테 들이받혀서 모양 구기게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는 사실에 성질이 난 눈치였다.
으억. 사실은 뒷일 생각 안 하고 그냥 충동적으로 들이박은 건데 아무래도 둘째 놈의 자존심을 건드려 버린 모양이다.
기분 같아서는 이놈이 그러든 말든 나도 내 성질껏 카벨을 마구 후려치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상대적으로 약한 내가 오히려 두들겨 맞을 게 뻔했다.
크흑. 부조리해도 어쩌겠는가. 보약을 몇 첩이나 달여 먹어도 나는 여전히 이렇게 작고 연약한걸.
나는 눈물을 머금고 둘째를 향해 그럴 리가 있겠냐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무슨 소리야, 카벨 오빠! 당연히 카벨 오빠가 너무너무 반가워서 이렇게 막 달려온 거지! 이거 봐. 오빠가 추울까 봐 내가 코트도 챙겨왔는걸."
"뭐, 코트?"
"응! 오빠 감기 걸리면 안 되잖아."
단순한 카벨은 내 말에 긴가민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자식이, 내가 그렇다면 그런 줄 알 것이지. 뭘 또 안 어울리게 고민을 하고 있어?
"어유. 우리 카벨 오빠, 눈싸움하느라 많이 힘들었구나. 이 정도로 다리에 힘이 풀려서 넘어지고. 자, 일어나. 내가 눈 털어줄게."
팡팡! 퍽퍽!
"아얏! 악!"
"오빠 뒤에 눈 엄청 많이 묻었어! 내가 잘 털어줄게!"
나는 사심을 담아서 둘째의 등과 엉덩이를 팡팡 때려 주었다. 내가 북어 패듯 카벨의 엉덩이를 야무지게 때릴 때마다 하얀 눈이 안개처럼 주위에 자욱하게 흩날렸다.
"에이, 잘 안 털어진다. 내가 손힘이 너무 약해서 그런가 봐."
내가 슬쩍 말을 흘리자 카벨은 나한테 맞은 곳이 아픈데 아프다고 말도 못 하고 혼자서만 끙끙거렸다. 으흑. 그래, 그래도 네가 아직 이런 호구라서 다행이야.
"오빠, 이제 들어가자."
"으억, 왜? 아직 덜 놀았는데?"
"아까부터 오빠가 먹고 싶어 했던 홀 케이크 지금 먹는대. 위에 장식된 용, 에리히가 먹는다는데?"
"헉! 그건 내 용인데! 안 돼에에!"
나는 둘째가 아까부터 집착했던 케이크 위의 용 모양 과자를 떠올리며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카벨이 대번에 용트림하며 야차처럼 저택을 향해 달려갔다. 하여간 그놈의 용이 뭐라고 저러는지, 어려서는. 쯧쯧.
쩝. 나는 방금 전까지 둘째 놈의 엉덩이를 마구 때려 주던 손을 아쉬움에 잠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
크윽. 이 찰진 감촉을 알아버렸으니 이제 난 자유로울 수 없어! 다음에는 또 무슨 핑계로 저놈을 때린다지?
나는 방금 전 느꼈던 타격감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시다가 카벨이 떠난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바스티에 남매를 향해 다가갔다.
"우리도 이제 들어가······."
하지만 나는 곧 마주한 눈빛들에 그만 흠칫하고 말았다.
왜, 왜 날 저렇게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는 거지?
"추, 춥지 않아? 안으로 들어갈래?"
"응!"
여자애뿐만이 아니라 요하네스 바스티에까지 나를 주인 만난 강아지처럼 반짝반짝한 눈망울로 쳐다보고 있었다.
"어, 음. 손잡아줄까?"
나는 미묘한 기분에 젖어 아직까지 바닥에 엎어져 있는 요하네스를 향해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자 소년의 상기된 얼굴이 화악 피어났다.
"내, 내가 잡아도 돼?"
"으, 응."
잠깐. 내가 더 어린 거 맞지? 그런데 왜 내가 누나 같은 느낌이지?
"고마워······."
요하네스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살그머니 내가 내민 손을 붙잡는 순간 내 기묘한 기분은 정점을 찍었다. 그리고 불현듯 어떤 깨달음이 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이건 그거다! 곤경에 처한 소녀를 구해 주는 기사! 혹은 용사! 어흑. 그럼 내가 기사 역할이란 말입니까? 아니, 멋지고 어른스럽던 내 예비 남편 어디 갔어?
"저기······. 이름이 뭐야?"
"어어, 하리."
"난 요하네스야! 요한이라고 불러줘. 저어, 나도 이름 불러도 돼?"
"으응."
역시 요하네스 맞잖아!
하지만 그는 한 떨기 꽃처럼 쑥스러워하면서 내게 물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요하네스 바스티에와 눈앞에 있는 소년 사이의 괴리감에 약간 좌절하고 말았다.
항상 차분하고 단정한 모습만 보이던 내 예비 남편이! 물론 두 번 봤지만! 그래도 언제나 듬직하게 날 보호해 줄 것만 같던 내 예비 남편이! 물론 고작 두 번 만났지만! 으헝!
"하리."
하지만 그런 내 마음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이름 예쁘다. 하리."
요하네스가 푸른 보석 같은 눈동자로 나를 보고 눈매를 곱게 휘며 배시시 미소 짓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종류의 충격을 받고 말았다.
헉. 이, 이렇게 예쁘게 웃는 게 어디 있어? 아, 안 돼. 뭔가 지금 나조차 몰랐던 내 위험한 취향에 눈을 뜬 느낌이야.
하지만 나는 나도 모르는 새 어느덧 요하네스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내, 내가 지켜 줄게!"
으, 으악! 이게 아니라! 지금 내가 뭐라고 하는 거야!
나는 무의식중에 외친 말에 깜짝 놀라서 속으로 마구 비명을 내질렀다.
요하네스는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모르는 듯 두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곧 그가 나를 보고 웃으며 한 말에 나는 곧 다른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을 것 같은 기분이 되고 말았다.
"응. 나도 지켜 줄게!"
그래······. 다른 게 다 무슨 상관이야. 남자란 그저 착하고 얌전하고 자기 여자나 챙길 줄 알면 다 되는 거지!
왠지 내가 보호받는 게 아니라 지켜 줘야 할 것 같은 느낌이긴 하지만······.
그, 그래. 까짓거. 난 원래도 진상들 틈에서 혼자 살아남았는걸. 으흑. 그런데 왠지 좀 눈물이······.
"오빠랑 언니 결혼해?"
바로 그때 옆에서 우리 두 사람을 말똥말똥 쳐다보고 있던 요하네스의 여동생이 불쑥 물었다. 앗, 너의 존재를 그만 깜빡 잊고 있었구나.
그런데 요하네스가 갑자기 내 손이 불붙은 장작이라도 된 듯 황급히 놓더니 손을 마구 휘저으며 허우적거리기 시작했다.
"아, 아, 아니야! 겨, 결혼이라니. 그게 무슨! 아아니, 싫은 건 아니고! 난, 난 그냥!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니까, 나는! 으, 어어!"
그러곤 혼자서 얼굴을 붉히며 버둥거리다가 어째서인지 혼자 미끄러져서 뒤로 벌렁 넘어져 버렸다. 그 소동에 다시금 허공에 흩어진 눈이 시야에 새하얗게 번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아련히 생각했다.
아. 아무래도 내 미래의 남편은 허당인가 보다······.
***
으음.
나는 저녁 만찬으로 준비된 훌륭한 오리 훈제구이를 앞에 두고 남몰래 끄응 신음하고 말았다. 아무리 무시하려고 노력해도 이건 내 능력 밖이었다.
그래, 식사 시간 내내 얼굴이 따끔거리는데 아무렴 모른 척하고 싶어도 무리일 수밖에.
그도 그럴 것이, 엄청! 엄청 쳐다보고 있잖아! 그것도 양쪽에서!
"허허. 이것 참. 우리 애들이 에른스트의 작은 공주님한테 아주 관심이 많은 모양이네요."
과연 그 노골적인 시선을 알아차린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지 바스티에 백작이 저녁 식사를 하다 말고 껄껄껄 웃었다.
아니, 아저씨. 아저씨는 재미있을지 몰라도 나는 이 상황이 좀 부담스러운데요. 흑.
그의 말에 요하네스는 또 수줍은 듯이 뽀얀 뺨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지만, 그럼에도 간간이 나를 힐끔거리는 것은 멈추지 않았다. 그의 여동생인 루이제는 포크를 입고 물고 아예 빤히 나를 쳐다보는 중이었다.
그래. 바스티에 부부의 양쪽 옆자리에 앉아 식사 시간 내내 나를 맹렬히 쳐다보고 있는 것은 아까 전 밖에서 만난 바스티에 남매였다.
그들은 에른스트의 주방장이 간만에 솜씨를 부린 훌륭한 요리들을 앞에 두고 밥을 한 입 밀어 넣고, 그다음 나를 쳐다보고. 또 밥 한 입 먹고, 나를 한 번 쳐다보고. 이 짓을 벌써 수도 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내가 먹고 있는 훈제구이가 입으로 넘어가는지, 코로 넘어가는지 영 모르겠는 상태였다.
"전 또 요한과 카벨이 동갑이라 하기에 둘이 좋은 친구가 되기만 기대하고 있었지 뭡니까. 하하하!"
챙그랑!
바로 그 순간 요하네스의 손에서 식기가 떨어져 내렸다. 가엾게도 그의 얼굴은 사색이 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방금 전 아버지가 한 말을 믿을 수 없어 하는 눈치였다.
으억, 하긴 그럴 만도 한가. 에른스트에 오자마자 둘째 놈이 다짜고짜 무자비하게 눈 폭탄을 날려 댔으니!
카벨의 진상짓에 함께 당했던 요하네스의 여동생도 대번에 외쳤다.
"난 쟤 싫어!"
"루이제. 오빠라고 해야지."
"난 저 오빠 싫어!"
"그러니까, 루이제······."
"싫어어!"
그 절규가 오죽 비장한지, 바스티에 부인마저 한순간 할 말을 잃을 지경이었다.
어른들은 도대체 카벨이 밖에서 무슨 짓을 했기에 온순한 바스티에의 아이들이 이리 경기하듯 예민하게 반응하는지 의문인 눈치였다.
당연히 의혹 어린 시선이 카벨에게 향했으나, 그는 아까부터 혼자만 팔자 좋게 맨손으로 오리를 뜯는 중이었다.
"웅? 아이응 애우아(응? 다리는 내 거야)!"
그는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린 것을 깨닫자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제 앞에 놓인 토실한 오리의 다리를 사수하기까지 했다.
어이구. 아무도 안 뺏어 먹어, 이놈아!
나 참. 예법 수업을 따로 받지 않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맨손으로 오리를 해체하고 있는 걸 보면 귀족이 아니라 뒷골목 걸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누가 보면 에른스트 부부가 한 사흘은 굶긴 줄 알겠네!
"카벨······."
에른스트 공작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끄응 소리 내며 둘째 놈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와중에도 천진난만하게 다리를 뜯고 있는 카벨을 보자 결국은 말문이 막힌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