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그 오빠들을 조심해 17화
그들은 여전히 내게 살뜰히 잘해 주었지만 이제 나는 예전의 7살 꼬마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냥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굴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일전에 느꼈던 위화감과도 무관하지 않았는데, 어쩌면 내가 이 집에 들어와 에른스트 부부의 애정을 나눠 받는 것 자체가 삼 형제에게 있어서는 돌이킬 수 없는 유년 시절의 상처로 남았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나 역시 어렸기 때문에 미처 몰랐지만 지금 27살의 눈으로 본 그들은 전적으로 부모님의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 나이였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한 직후 나는 기분이 아주 이상해지고 말았다.
삼 형제는 언제나 나한테 있어서 다른 어른처럼 압도적인 존재감을 자랑하는 놈들이었는데······.
이렇게 어른의 시선으로 보게 된 삼 형제는 그냥 부모님의 애정을 갈구하는 철없는 꼬맹이들에 지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사실을 깨달은 뒤에는 그들이 아무리 나를 향해 미운 말을 내뱉어도, 발을 걸거나 넘어뜨려도 그냥 잠깐 짜증이 날 뿐 진지하게 화가 나거나 복수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았다.
그 대신 나는 다른 의미로 조금 허탈해졌다.
분명 처음에 꿈인지 생신지 모를 이 기가 막힌 상황이 되었을 때까지만 해도 나는 세 놈을 물 먹여 주고 싶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혀 있었는데.
하지만 에리히가 에른스트 부인의 옆에 앉고 싶다고 더 강력히 고집을 부리지도 못하고 아이답지 않게 금방 포기해 버렸을 때.
그리고 예전의 폭군 같은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내 말 한마디에 너무도 쉽게 좌지우지되는 카벨을 보았을 때.
또 나를 버리고 사라졌던 유진이 엉망진창인 얼굴로 다시금 되돌아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
마치 그동안 내 눈에 덮여 있던 비늘 조각 하나가 살그머니 떼어져 나간 것 같았다.
솔직히 나는 그 뒷골목에서 에른스트 부부가 내게 내민 손을 잡음으로써 구원받았지만, 그것이 세 형제에게도 같은 의미일 수는 없었다.
에른스트 부부는 내가 아닌 삼 형제의 부모님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나는 약 1년간 그들 몫의 애정을 훔쳐 먹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도 그들이 가장 어른의 보살핌을 필요로 할 시기에.
지난 20년간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막상 7살의 몸으로 돌아와 이 시절의 일을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되자 그 깨달음이 참으로 새삼스러웠다.
물론 그렇다 해서 형제들이 지금껏 내게 한 짓들이 전부 잊히는 것도 아니었고, 나는 여전히 그들이 얄미워서 한 대씩 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마음을 누구에게 표출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나는 또다시 틈만 나면 하늘에 대고 빌었다.
나 돌아갈래! 내가 살고 있던 원래의 시간 속으로! 내가 알고 있는 망할 놈들이 있는 20년 후의 세계로!
하지만 역시나 망할 신은 내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나들이 이후 나는 알게 모르게 허망한 기분에 젖어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삼 형제도 그날 이후 변화하는 에른스트 속에서 악의를 가지고 나를 건드리는 일이 대폭 줄어들었기 때문에, 저택에는 언뜻 평화롭게 느껴지는 고요함이 잔잔히 깔리게 되었다.
"쓰레기, 오늘은 진짜 나랑 술래잡기해! 빨리!"
물론 카벨은 여전히 나를 보면 같이 놀자고 귀찮게 굴었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다소 짜증스럽게 말했다.
"내가 왜 날 그런 못된 별명으로 부르는 사람하고 같이 놀아야 하는데?"
"네가 마음에 든다며! 왜 이제 와서 딴소리야?"
뭣. 내가 그딴 소리를 했었다고? 아씨. 설령 그렇다 해도 내가 설마 진짜 좋아서 그랬겠니?
"카벨 오빠. 쓰레기는 말이야. 누가 던져 넣으면 또 누가 치울 때까지 그냥 가만히 쓰레기통에 들어 있는 거지?"
"그렇지?"
"그러니까 쓰레기는 오빠랑 못 놀아. 왜냐하면 쓰레기는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해도 쓰레기로서의 모든 일을 다한 거거든."
"헉!"
"그러니까 쓰레기는 이제 좀 자야겠어. 오빠는 쓰레기 말고 다른 사람이랑 놀아."
내 말을 듣고 단순한 카벨은 엄청난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두 눈을 흔들었다. 나는 그런 둘째를 뒤로한 채 소파에 드러누워 버렸다.
"아, 알았어! 이제 쓰레기라고 안 할게! 너 쓰레기 아니야! 그럼 됐지?!"
"응, 안 됐어."
나는 상큼하게 거절하고 다시 뒤돌아 누웠다. 둘째 놈이 발광하며 징징거렸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내가 뭐 아무 때나 시간 나는 한가한 사람인 줄 아나, 이거 왜 이래!
요즘 들어 이런저런 생각으로 잠을 또 잘 못 자서 그런지 자꾸만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결국 나는 고롱고롱 얕은 숨을 내뱉다가 카벨의 발광을 자장가 삼아 잠이 들어버렸다.
타닥. 타닥.
내가 다시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벽난로 속의 장작이 불꽃을 일렁이며 타들어 가고 있었다.
나는 내 앞에 누군가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느리게 두 눈을 깜빡거렸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서 그런지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금방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곧 이 낯익은 뒷모습이 누구의 것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유진 오빠, 언제 왔어?"
나는 약간 멍한 정신으로 웃으면서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물론 유진이라면 또다시 내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먼저 맞잡을 리 없었지만 그래도 팔에 닿은 내 손을 뿌리치지도 않을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유진은 그랬다. 내가 손을 내밀면 그 안에 나도 모르는 무언가가 숨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늘 고요한 눈동자로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왔으면 깨우지 그랬어."
"아니······."
나는 잠에서 덜 깬 몽롱한 목소리로 재차 웅얼거렸다. 그런데 잇따르는 음성은 내가 알고 있는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비볐다.
그리고 다시 앞을 보니 어린 유진이 당황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순간 정신이 확 들었다.
아, 뭐야. 12살의 유진이잖아? 잠이 덜 깨서 그런지 한순간 미래의 유진인 줄 알았다. 와, 습관 참 무서워. 나도 모르게 친한 척하면서 손을 뻗고 있었네.
"뭐야. 왜 오빠가 여기 있어."
나는 싸악 표정을 바꾸고 물었다. 그러자 유진도 덩달아 떨떠름한 얼굴을 한 채로 말했다.
"어머니가 네가 뭘 하고 있는지 가 보라고 하셔서 왔는데 자고 있길래."
어쭈. 그래서 나 춥지 말라고 벽난로에 장작도 넣어주고? 당신이 웬일이래?
"일어났으면 내려와. 곧 저녁 시간이야."
하지만 유진은 자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무뚝뚝하게 말한 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면 저 사람도 나들이 이후 나를 대하는 태도가 좀 달라졌단 말이야?
이제는 볼 때마다 인정 못 한다느니, 너 같은 건 받아들일 수 없다느니 하는 소리도 안 하고. 물론 그렇다고 나한테 막 살갑게 구는 것도 아니었지만 대놓고 독설을 하는 일도 없어졌다.
모르긴 몰라도 그날 있었던 일이 유진에게도 작지 않은 의미였던 것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이렇게 보니 내가 아는 유진하고 이제야 좀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같이 가."
나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킨 뒤 먼저 앞장서고 있는 유진의 뒤를 따라갔다.
지금이 20년 후였다면 또 친한 척 생글생글 웃으면서 먼저 저 손이라도 붙잡았을 텐데. 크흠. 그런데 지금은 왠지 좀 겸연쩍어서.
나는 기분 탓인지 내게 보폭을 맞춰 느리게 걸어주고 있는 것 같은 유진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그냥 한 번 미친 척하고 잡아볼까?
덥석!
그런 생각을 한 직후 나는 행동력 있게 움직여 유진의 손을 냉큼 잡아버렸다.
흠칫!
그러자 유진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왜?"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순진무구하게 두 눈을 깜빡이면서 유진을 올려다보았다.
뿌리칠 거야? 뿌리칠 거야? 지금 누구 손을 막 붙잡는 거냐고 뿌리칠 거야?
유진의 턱이 한 차례 움찔거렸다. 그의 표정은 '도대체 얘가 왜 이러는 거지?'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고 '얘를 진짜 어쩐다지?'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둘 다 아닐 수도 있지만 어쨌든 간에 그가 지금 내 행동을 상당히 곤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그래도 지금 당장 내가 잡은 손을 확 뿌리칠 것 같은 느낌은 아니어서 나는 슬쩍 말을 돌렸다.
"나 배고픈데. 밥 먹으러 안 가?"
그리고 손을 먼저 잡아끌자 유진이 또 움찔거리다가 그런 나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유진의 반 토막밖에 되지 않는 내가 먼저 앞장서 걷고 유진이 그런 내게 손을 붙잡혀 끌려오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형성되었다.
나는 복도를 지나던 하녀들이 그런 우리를 보며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 것을 발견하고 방긋 웃어주었다.
등 뒤에서 유진은 무언가 복잡 미묘한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원래 내가 이런 식으로 처음 유진의 손을 잡아 본 것은 그가 16살일 때였는데, 그때의 유진보다도 더한 동요를 내비치는 것을 보니 퍽 웃기기도 했다.
"어머나, 둘이 그렇게 손을 붙잡고 들어오니까 보기 좋구나."
"이제 보니 유진과 하리가 아주 사이가 좋은 모양이오."
호호호. 사이가 좋다니. 바보 같은 아저씨.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지요.
카벨은 에른스트 부부가 유진과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린 사이 테이블 위에 있던 간식을 슬쩍 훔쳐 먹으면서 '왜 둘이 손을 붙잡고 들어오지?' 하는 의문 어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반면 에리히는 나를 향해 간만에 또 눈을 치켜뜨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자기 형과 친한 척하면서 들어온 게 마음이 안 드는 눈치였다.
셋째는 그 불만을 내게 금세 표출했다.
"으악!"
저녁 식사 시간이 끝나고 각자의 방으로 흩어지던 중, 누군가가 계단을 올라가던 나한테 발을 걸었다.
나는 층계참에서 철퍼덕 엎어지면서 계단 모서리에 다리를 찍히고 말았다.
아씨, 피 나잖아! 저 나쁜 놈이 진짜.
"에리히! 계단에서 발을 걸면 어떡해?"
그런데 갑자기 다음 순간 내 의사와 상관없이 몸이 바닥에서 붕 떠올랐다. 나는 유진이 나를 직접 일으켜 세워준 것을 알고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게다가 처음으로 내 앞에서 에리히를 혼내기까지 하다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에리히는 대번에 발뺌했다.
하지만 웃기고 있네. 발 거는 건 네 주특기잖아! 그래. 소악마 같은 네놈이 이렇게 쉽게 갱생될 리가 없었는데 내가 잠깐 착각을 했어. 그동안의 내 헛된 고뇌를 단박에 날려 보내 주는구나.
"에리히, 내가 뒤에서 다 봤어."
"넘어진 쟤가 나빠! 형은 왜 나만 혼내?"
그럼 넘어뜨린 널 혼내지, 넘어진 날 혼내겠니? 나는 그런 생각에 황당했지만 콧김을 한 번 후욱 내뱉은 뒤 유진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오빠, 나 괜찮아."
나는 오히려 착한 척하면서 에리히를 두둔해 주었다.
"에리히 혼내지 마, 유진 오빠."
내가 그러는 동안 셋째 놈은 반성의 기미도 없이 흥! 콧방귀를 뀐 뒤 내 앞을 지나쳐 가려 했다.
바로 그때, 나는 눈을 번뜩이며 빛의 속도로 몸을 움직였다.
"으악!"
쿠당탕!
에리히는 내 발에 걸려서 방금 전 내가 그랬던 것처럼 계단에서 철퍼덕 넘어져 버렸다.
"에, 에리히!"
유진은 내가 한 행동에 적잖이 당황한 듯, 셋째에게 급히 다가갔다. 나는 에리히가 끙끙거리며 유진의 부축을 받아 일어나는 모습을 보다가 픽 그를 비웃었다.
"바보같이 그거 하나 못 피하기는. 응? 왜 그렇게 노려봐? 넘어진 네가 나쁜 거지 발 건 내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