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그 오빠들을 조심해 15화
그러나 그저 그렇게 보이도록, 모두가 서로의 눈을 가리고 곪은 상처를 덮어 현실에 안주하고 있었을 뿐이었던 걸까.
"어머니."
저희를 좀 봐주세요.
카벨과 에리히에게도. 그리고 저에게도 아직 어머니가 필요해요. 매일 매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지금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이 모든 것을 모른 척하는 것뿐인가요?
"그래, 유진."
그러나 유진은 이번에도 말하지 못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를 향해 꽃같이 웃어 보이는 어머니는 정말이지······. 가슴에 사무칠 정도로 행복해 보여서.
***
"형, 뭐 해?"
유진은 몰래 어머니의 방에 숨어 들어가 노란 사탕을 가지고 나왔다.
"어! 그거 아리나가 먹던 건데."
"응. 그래서 이제는 먹을 사람이 없으니까."
최대한 꼼꼼히 찾는다고 찾았지만 혹시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곳에 사탕이 더 숨겨져 있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아버지는 할 수 있는 한 막아보겠다 하셨지만······. 뒤에 이어진 말은 만약 하리에게 사탕의 정체를 들킬 위험이 있다면 아이에게 어떤 불상사가 생겨도 모른 척하겠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하지만 유진은 하리가 이것을 먹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혹시 이전에 이미 이 사탕을 먹은 적이 있던 건 아니겠지······?
"얘들아, 준비 다 됐니?"
그때 저 멀리서 어머니가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가족들끼리 모두 함께 시가지에 나들이를 가기로 한 날이었다.
"카벨, 먼저 내려가 있어."
"알았어."
카벨이 먼저 계단을 내려가고 난 뒤, 유진은 사탕을 처리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사람이 많아서 길을 잃기 쉬우니 둘이 손을 꼭 붙잡고 가렴. 하리는 유진 오빠한테 잘 붙어 있어야 한다."
하리와 함께 손을 붙잡고 걷는 길은 당연히도 어색하고 또 불편했다.
약재상에 가는 길. 유진은 하얀 벙어리장갑을 낀 손을 맞잡은 채 묵묵히 앞만 보며 걸었다. 그 못지않게 하리도 지금의 상황이 불편한 듯했다.
문득 오늘 외출하기 전 그가 처리한 노란 사탕과 어머니의 말갛게 웃는 얼굴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지금도······."
그를 둘러싸고 있는 지금의 이 온갖 비정상적인 상황도.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런 것을 물은 것은 어째서인지 몰랐다. 하리는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혹은 확인하듯 물끄러미 그를 올려다보았다.
유진은 잘근 입술을 씹은 뒤 재차 물었다.
"지금도 네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어?"
"응. 돌아가고 싶어."
대답은 금세 돌아왔다. 다시금 둘 사이에는 침묵이 떠돌았다. 주위가 온통 소란스러운 가운데 오직 그들 두 사람만이 조용했다.
그래······. 이런 건 정상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하나씩 돌려놓으면 된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 당시의 유진은 거의 강박적인 불안감에 휩싸여 있었다.
그렇게까지 네가 살던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면 지금 당장 어디든 가 버리라고. 우리 모두에게 차라리 그게 더 좋은 방법일 거라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스륵.
그때까지 붙잡고 있던 손을 허공에 놓아버린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손안에서 온기가 빠져나갔다. 유진은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수많은 사람에 떠밀려 자의가 아닌 것처럼 그 자리를 벗어나게 될 때까지.
그리고 마침내 방금 전까지 있던 거리를 벗어났을 때, 유진은 문득 길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소음이 따갑게 귀를 찔러 들어왔다.
하리는 자신을 혼자 두고 떠나는 그를 한 번도 소리 내 부르지 않았다.
그럼 이것으로 된 것인가? 정말?
이 모든 것이 너무도 쉬워서 한편으로는 현실감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이란 말인가.
왜. 왜······. 왜 마치 그가 이 길 한가운데서 길을 잃기라도 한 것처럼······.
"얘야, 괜찮니?"
갑자기 앞에서 들리는 소리에 유진은 불현듯 놀라 고개를 들었다.
길 한복판에 혼자 망연히 서 있는 그가 이상해 보인 모양이었다. 부부로 보이는 한 쌍의 남녀가 그를 보며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것이 마치 부모님과 홀로 뚝 떨어진 아이를 보는 듯했다. 이런 식으로 어린애 취급을 당해 본 것이 처음이어서 유진은 한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하지만 결국은 멀리 가지도 못해 눈에 보이는 벽에 기대어 무너지듯이 주저앉고 말았다.
유진은 정말 자신이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떨리는 손에 얼굴을 묻었다.
욱욱······ 목 멘 소리가 목구멍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있었지······? 도대체 내가 뭘 한 거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눈에 보이는 진실은 지극히 간단명료했다.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는 것. 하지만 거기에 담긴 의미는 분명 그 손 하나만큼의 무게가 아니었다.
"아······."
울음소리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이한 소리가 가슴에서부터 끓어 올라왔다.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심장이 쿵쾅쿵쾅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빠르게 뛰었다.
눈앞이 온통 깜깜했다. 방금 전까지 주위에 가득하던 소음조차 씻은 듯이 사라져, 마치 그 혼자만이 무중력 상태의 낯선 공간에 뚝 떨어져 내팽개쳐진 것만 같았다.
유진은 입을 벌려 가쁜 숨을 헐떡였다.
물끄러미 자신을 올려다보던 그 눈동자가 자꾸만 눈에 박힌 것처럼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방금 전 저지른 일을 상기하자 두려움이 밀어닥쳤다. 하지만 정말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아무렇지 않게 이런 짓을 저지른 그 자신이었다.
나는 정말 이 정도로 형편없는 인간이었나. 이런 짓밖에 하지 못하는, 그런 한심한 인간이었던 건가.
'돌아가고 싶어.'
고작 그 한마디였다.
고작 그 한마디에 기대 비열한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나는, 나는······.
하리가 살던 곳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나 어떤 곳인지 정도는 유진도 얼추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어쩌면 그는 그 아이에게 따뜻한 집과 갓 만든 빵, 예쁜 옷들을 주는 대신 이쯤은 괴롭혀도 된다고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너도 얻은 것이 있으니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겠냐고.
그런데 그 아이는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다 시들어 빠진 꽃이라도 사람들에게 구걸하듯 팔지 않으면 한 끼 식사조차 하기 어려운 그때의 생활로.
그렇다면 아마도 그건, 지금의 생활이 그만큼 그 아이에게 힘겹다는 의미일 것이었다. 그 정도로 그들이 그 아이에게 끔찍한 사람이라는 의미일 것이었다.
'유진 오빠.'
그런 생각을 하자 유진도 스스로가 끔찍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무릎을 굽혀 그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이대로 아무도 보지 못하게 자신을 이 세상에서 숨기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 아이에게 제멋대로 죽은 아리나를 투영해 본 것도, 오갈 곳 없는 분노를 애꿎게 화풀이하듯 그 아이에게 풀어 놓은 것도 모두 에른스트에 있는 사람들의 잘못이었다.
사실 그 애는 그들에게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만약 그런 것도 잘못이라 할 수 있다면 하리가 잘못한 것은 오직 그것뿐일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던 그들을 단 한 번도 원망조차 하지 않았다.
그 사실을 모르지 않기 때문에 어쩌면 그는 하리의 앞에서 매번 도망치듯 먼저 자리를 떠나고 말았는지도 몰랐다.
어찌 보면 에른스트의 유지를 이어받기로 결심한 유진은 그 아이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과오에 대한 책임을 져야 마땅했다.
처음부터 어린 동생들이 저지른 일을 모른 척하고 그에 더해 그 아이를 덩달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 지금의 상황을 해결하려 노력해야 했다.
"하······."
문득 메마른 비소가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어쩌면 지금 이 현실을 어찌해 볼 의지조차 없이 정말 체념하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 아니었나.
편리한 대로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외면하고 이미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포기하고 만 것은 그 역시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의젓한 아들인 척, 자상한 형인 척, 어른스러운 아이 행세를 했지만 사실은 그 모두가 감당하기 버거워서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 결국은 도망치고 싶어서 자신을 붙잡고 있던 그 작은 손을 놓고 만 것이다. 이러는 것이 모두에게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스스로를 위한 그런 치졸한 위로를 하면서.
"얘야, 어디가 아프니? 부모님은 어디 계셔?"
그때, 벽에 기대 웅크리고 앉은 그를 향해 다가온 누군가가 물었다. 유진은 대답 대신 벽을 짚고 휘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의 얼굴을 본 귀부인은 더욱 걱정스러운 표정이 되어 재차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는 거면 도와줄게. 동행한 어른이 있니?"
"동생을 찾으러 가야 해요."
"저런. 동생을 잃어버려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구나. 어머, 얘!"
유진은 뒤에서 부르는 소리조차 무시한 채 왔던 길을 다시 되돌아 뛰기 시작했다.
다시금 주위는 시끄러운 소리로 가득 차고, 아까와 다른 수많은 사람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제발 그 자리에 있어줘.
유진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도록 달리면서 몇 번이나 간절하게 생각했다.
저벅.
그리고 마침내 상자 위에 앉아 아까의 그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여자아이를 발견했을 때. 유진은 눈두덩이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발짝. 한 발짝.
앞을 향해 걸을 때마다 길 잃은 아이가 된 것만 같던 망연한 느낌이 조금씩 그에게서 떨어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신 그 자리에 새로운 무언가가 싹트기 시작하는데······.
"가자."
유진은 아까처럼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아이에게 그렇게 말했다.
아, 이 순간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다녀왔어?"
아마도 그는 죽는 날까지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었다.
"다녀왔어."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본 이 무수히 많은 감정이 속에서부터 폭죽처럼 터져 나가 죽을 것만 같던 이날을.
"돌아가자."
그리고 그의 손으로 직접 놓아버렸던 이 작은 손을 또 한 번 맞잡게 된 지금의 순간을. 분명히 그는 앞으로도 계속 가슴에 아로새긴 채 살게 될 것이었다.
"나 다리 아파."
유진은 처음으로 투정 부리는 아이를 업고 가족들이 있을 곳을 향해 다시 걸었다.
"바보."
등 뒤에서 자그마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를 기다리듯 혼자서 오도카니 앉아 있던 스스로에게 하는 말인지, 아니면 자신을 버렸다가 다시 되돌아온 그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억양의 속삭임이었다.
"유진 오빠 등 불편해."
"시끄러워."
이제 해가 지려는지 땅 위에 땅거미가 내려앉기 시작했다. 두 명의 바보가 만드는 그림자도 바닥에 길게 몸을 늘였다.
그 길목에서 유진은 왜인지 조금 울고 싶었지만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살며시 치밀어 오르는 것을 다시 꾹 억눌러 담았다.
"미안해."
충동적으로 그 짧은 한마디를 입 밖에 내고 나자 다시 한번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미안해."
하리는 잠들었는지 얕은 숨소리만 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진은 그 후 몇 번이나 더 같은 말을 속삭일 수 있었다.
숨 막힐 정도로 가슴을 꽉 짓누르고 있던 짐이 아주 조금이나마 가볍게 느껴질 때까지.
듣는 이 없는 비겁한 사과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