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그 오빠들을 조심해 14화
"그 애는 어디 있어?"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자기 방에 있겠지."
"방금 전에 내가 갔을 때는 없었어."
"그럼 집에라도 갔나 보지."
유진은 에리히에게 다가가 동생의 작은 어깨를 부여잡았다.
"에리히, 사실대로 말해. 내가 없는 동안 뭘 한 거야?"
그저 직감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조용한 저택을 걷는 동안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던 일종의 불길한 예감.
"몰라."
"에리히!"
결국 유진은 에리히를 닦달해 대답을 듣는 데 성공했다. 그 직후 그는 곧바로 저택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에리히는 하리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소리 지른 뒤 밖으로 내쫓았다고 했다. 뛰면서 1층에 있는 시계를 보니 그로부터 벌써 시간이 한 시간도 더 지나 있었다.
"하리!"
유진은 저택 밖 어딘가에 있을 아이를 찾아 건물 주변을 샅샅이 훑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밖에는 소복소복 눈이 내리고 있었다.
몰아치는 눈보라에 마음이 급해져서 그가 부모님의 앞을 제외하고 아이의 이름을 반년 만에 처음 불러봤다는 자각도 없었다.
마침내 사람 형체를 한 새하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하리!"
하리는 별관으로 이어진 계단 위에 미동 없이 누워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정신 차려, 하리!"
그는 비록 이 아이를 싫어하기는 했으나 그렇다 해서 죽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조용히 누워 있는 자그마한 몸에서 한순간 죽은 여동생이 스쳐 지나갔다.
"하리! 하리!"
그는 극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혀 여전히 미동 없는 몸을 마구 흔들었다. 굳게 잠겨 있던 눈꺼풀이 서서히 들어 올려져 그 안에 있던 자색의 눈동자를 드러낸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하리가 눈을 뜨는 순간 그는 울컥하고 말았다. 이대로 정말 죽는 줄 알았다든가, 죽지 않아서 다행이라든가 하는 말이 속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유진은 그중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 순간 마주친 아이의 눈동자 때문이기도 했다.
"유진 오빠?"
유진이 정말 자신의 오빠라도 되는 것처럼 하리는 어딘가 맹목적인 느낌이 깃든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유진은 훅 숨을 멈춘 채 그대로 굳어져 버리고 말았다.
"오빠, 언제 회춘했어?"
그런데 아이는 그를 향해 이상한 헛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유진 오빠 아들?"
의심스럽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좁히며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무슨 헛소리야. 정신 나갔어?"
그런데 '하긴, 그렇겠지' 하는 듯이 그를 쳐다보는 눈빛조차 기분 탓인지 어딘가 예전과 달랐다. 그러고 보니 하리의 눈을 이렇게 마주하는 것은 지난 몇 달 만에 처음이었다.
이 아이가 원래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의 눈을 정면에서 직시하는 아이였던가?
어쨌든, 유진은 정신을 차리고 하리를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그새 장난감에 질렸는지 1층을 어슬렁거리고 있던 카벨이 제일 먼저 그들을 발견하고 놀랐다. 문제는 에리히였다.
"형, 내가······."
에리히는 유진이 안고 들어온 하리를 보고 두 눈을 크게 뜨다가 곧 불쌍할 정도로 온몸을 떨며 울먹였다.
"내가 잘못한 거야?"
아직 7살인 아이였다. 타인에게 악의가 있었다 해도 그 행동이 죽음으로 이어지리란 자각까지 있었을 리는 없었다.
이번 일 역시 하리를 집에서 쫓아내고 싶었을 뿐, 이대로 오갈 데 없이 밖으로 내몰린 아이가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께 완전히 숨길 수 없는 일인 걸 알고 있지? 이번에는 네 장난이 너무 심했어."
"형······."
이대로 '나쁜 장난'으로 치부하고 끝내도 될 일이 아니었으나 일단 지금은 에리히도 에리히거니와 하리의 처우가 시급했다.
에리히를 야단치는 일은 그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었다. 그래서 유진은 동생들을 시켜 필요한 사람들을 불러오게 한 뒤 벽난로에 장작을 더 던져 넣었다.
그날 돌아온 부모님에게 세 형제가 혼이 난 것은 당연했다.
"그래. 하리가 에리히의 장난을 피해 도망치다 밖에서 미끄러져서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은 들었다."
유진은 아버지의 말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는 분명 아버지에게 오늘 있던 일을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그런데 삼 형제를 혼내는 자리에서 아버지가 말한 것은 유진이 설명한 것과 약간 달랐다.
"응! 맞아."
일의 내막을 모르는 카벨만 나서서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애가 혼자 밖에 나가서 그 긴 시간을 쓰러져 있는데 아무도 몰랐단 말이니? 유진!"
어머니는 가장 먼저 장남인 유진을 추궁했다.
아버지와 눈이 마주친 순간, 유진은 어머니가 충격받을 것을 걱정해 아버지가 이 사실을 숨기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죄송해요, 어머니. 허드슨 씨와 공부 중이라 미처 몰랐어요."
"카벨! 동생에게 큰일이 난 줄도 모르고 장난감에만 정신이 팔려 있다니. 그 장난감은 일주일간 압수야."
"에헷. 이거 어차피 에리히 건데."
"네 방에 있는 장난감 모두 다 압수인 줄 알아!"
"어, 엄마!"
"에리히."
이름이 불리는 순간 에리히의 어깨가 크게 움찔거렸다. 에리히는 아까부터 잔뜩 겁먹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평소에 얼마나 심한 장난을 치기에 하리가 널 피해서 도망치기까지 하니? 오늘 일도 자칫 잘못하다가는 큰일이 날 수 있었어. 지금도 저렇게 아픈 걸 보고도 아무것도 느낀 게 없니?"
에리히는 애처롭게 몸을 떨다가 뚝뚝 눈물을 떨구기 시작했다.
다른 때 같으면 옆에 있는 유진에게라도 매달려 울었을 텐데 혼자 덩그러니 서서 눈물만 하염없이 떨구는 것을 보았을 때 스스로의 잘못을 이미 깊이 통감하고 있는 듯했다.
"모두 제대로 반성하렴. 두 번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할 거야."
아들들의 잘못으로 하리가 큰 위험에 처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어머니는 그 정도로 꾸중을 멈춘 뒤 이마를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쉬어야 하지 않겠소."
"하리에게 가 봐야죠."
부모님이 먼저 자리를 비키고 난 후 유진은 아직까지 울고 있는 에리히에게 조용히 다가가 어깨를 안아주었다.
"나, 나는. 그냥 쟤가 우리 집에 있는 게 싫어서. 그래서."
에리히는 그 후로도 한참을 더 울었고, 카벨은 그 옆에서 덩달아 시무룩해져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그 속에서 홀로 갑갑한 마음을 억눌러 참았다.
***
그 후 하리는 이상해졌다.
정말 죽을 생각인지 눈보라 치는 바깥에 얇은 옷차림으로 다시 나가지를 않나, 그의 눈을 쳐다보고 당황스러울 정도로 당당하게 제 의사를 표현하지를 않나, 심지어는 그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달라고 뻔뻔스레 주장하지를 않나.
게다가 어째서인지 유진은 그런 하리에게 알게 모르게 휘둘리고 있었다.
"유진 오빠, 이제 보니까 되게 둔하다. 이게 안 돼? 이게 안 돼? 응응? 응?"
"너 진짜!"
되지도 않는 도발에 넘어가서 처음의 목적도 잊고 답지 않은 몸 씨름을 하게 된 것부터도 그러했다.
"뭐, 누가 둔하다고?"
하리를 붙잡아 눕힌 뒤 의기양양하게 입을 열었던 유진은 다음 순간 마주친 눈동자에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생각해 보면 새하얀 눈 속에서 하리를 처음 발견했을 때부터 이 눈동자만 보면 덜컥 말문이 막히고는 했다. 도대체 어째서일까?
그러고 보니 이런 식으로 유치하게 군 것도 하리의 앞에서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동안은 단 한 번도 동생들과 이런 식으로 논 적이 없었는데.
"동생들과 어울리더니 너마저 덩달아 생각이 어려진 모양이구나. 당장 하리에게 사과해라."
유진은 잠시 후 방에 들어온 아버지에게 혼이 났다.
방을 나온 직후 아버지는 방금 전 자신이 때린 유진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미안하구나. 하리 앞에서 그 사탕에 관한 이야기는 더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조금 과하게 굴었다."
아버지는 하리가 어머니가 주신 사탕에 대해 알 게 될까 우려돼 그랬다며 유진을 다독였다.
"그래. 네가 전부 다 알고 있었다니. 그동안 혼자서 너무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하고 있었구나."
그 말을 듣고 유진은 울컥하고 말았다. 그간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홀로 끌어안고 있던 불안감을 이해한다는 말을 듣자 코가 시큰해지며 아버지에게 처음으로 약한 소리를 꺼내고 싶어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아버지의 말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모른 척하려무나."
"아버지?"
"이제 겨우 네 어머니도 안정을 되찾았지 않니.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모른 척하거라."
"하지만······."
"물론 그 사탕에 관해서는 나도 할 수 있는 한 막을 생각이다. 하지만 설령 하리가 그걸 먹는 모습을 봐도······. 아무 말 말아라."
아버지는 그렇게 속삭이며 유진의 어깨를 두어 번 도닥인 뒤 먼저 발길을 돌렸다. 유진은 혼자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바스락.
곧 그의 손이 지금껏 그 안에 있던 사탕을 부서뜨릴 듯이 세게 움켜쥐었다.
***
"유진. 어제 아버지에게 혼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다음 날, 아버지가 외출한 사이 어머니가 그의 방을 방문했다. 어디까지나 겉보기이기는 했으나 유진은 근신의 의미로 방에서 책을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이도 참. 그렇다 해서 얼굴까지 때릴 건 뭔지."
속상하다는 듯 뺨을 어루만지는 어머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유진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왜 하리에게 '그 사탕'을 주셨어요?"
그러자 어머니는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주면 안 될 이유라도 있니?"
"어머니, 그건······."
유진은 저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 놓고 이내 이를 악물며 잠시 동안 말을 멈추었다. 이어지는 그의 목소리는 잔뜩 쉰 것처럼 갈라져 있었다.
"그건, 마약이잖아요."
어머니가 아픈 아리나에게 주었던 노란 사탕.
유진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강한 진통제 성분이 있는 그 사탕은 심각한 중독성과 부작용이 있는 마약이었다. 계속 섭취하면 종국에는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하는 백치가 되고 마는······.
"하리는 아리나가 아니에요."
유진은 어머니가 아리나에게 그 사탕을 주고 난 뒤면 방에서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를 기억했다.
아리나가 매일매일 너무 많이 아파해서, 하지만 대신 아파줄 수도 병을 낫게 해줄 수도 없어서, 그래서······.
차라리 딸이 환각 속에서 고통을 잊기를 바라며 매일 저녁마다 떨리는 손으로 그 사탕을 주고, 그런 뒤 혼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한없이 울고 또 울었던 어머니를 기억했다.
"어머,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유진이라고 해서 그 고통스러운 기억을 다시 꺼내고 싶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모른 척하라는 아버지의 말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네가 오해하는 것 같구나. 그 사탕은 위험한 게 아니야."
"위험한 게 아니라면······."
유진은 여전히 소녀처럼 천진한 어머니의 얼굴을 보며 속삭였다.
"저에게도 그 사탕을 주세요."
"안 돼, 유진."
그러자 어머니는 엄격한 표정을 지은 채 자신의 아들을 꾸짖었다.
"그건 아픈 아이만 먹는 거란다."
"······."
"아픈 동생 걸 탐내면 못 써. 동생에게 양보할 줄 알아야 좋은 오빠지?"
어머니는 정말 그 사탕이 아픈 데를 낫게 해주는 약이라고 믿기라도 하는 것처럼 유진을 혼냈다.
유진의 검은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서서히 진득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조금씩 괜찮아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전보다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