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그 오빠들을 조심해 13화
"오빠. 나 아파."
에리히와 쌍둥이로 태어난 아리나는 선천적으로 몸이 약했다. 유진의 기억 속에서 아리나는 언제나 고통을 호소하며 울었고 그러지 않을 때는 온종일 기력 없이 누워 있었다.
그럴 때면 에리히도 하루 종일 아리나의 침대 옆을 떠나지 못하며 우울해했다.
"형. 아리나가 나 때문에 아픈 거라는 게 진짜야?"
쌍둥이는 선천적으로 한쪽이 약하게 태어나는 경우가 많다는 속설을 어디에선가 들었는지, 어느 날 에리히는 울면서 그에게 물었다.
"누가 그런 소리를 해? 아리나가 아픈 건 너 때문이 아니야. 에리히, 다시는 그런 생각하지 마."
"형, 아리나랑 나는 쌍둥이잖아. 그런데 왜 내가 대신 아파줄 수는 없는 거야?"
하지만 에리히는 그 후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틈만 나면 자신이 대신 아팠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곤 했다.
모두가 한마음으로 아리나가 낫기를 기도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병세는 더욱 위중해져만 갔다.
"아리나. 사랑스러운 우리 아기."
어머니는 눈물을 달고 살지 않는 날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아리나가 작은 몸을 웅크리며 아프다고 울 때면 유진조차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해지지 않았던가.
하지만 의사들은 모두 고개를 내저으며 더 이상은 방도가 없노라 말할 뿐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리나가 침대 위에서 몸조차 제대로 펴지 못하고 울 때마다 그 작은 몸을 안아서 달래 가며 아이를 위해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다는 무력감에 함께 잠식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아가. 이건 요정님이 준 사탕이란다. 이걸 먹으면 아픈 것도 다 날아갈 거야."
어느 날 어머니가 떨리는 손으로 아리나에게 쥐여 준 것은 반투명한 하얀 종이에 싸인 노란 사탕이었다.
딸을 위한 거짓말인 것이 분명했지만 하늘이 어머니의 바람을 들어준 것인지, 그날 이후 아리나의 병세는 점점 차도를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고통을 호소하는 날이 줄어들수록 아리나는 멍하니 허공을 보는 일이 많아졌고, 나중에는 가족들의 얼굴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다. 깨어 있을 때조차 환각을 보는 것처럼 헛소리를 할 때도 많았다.
그리고 그나마도 시간이 조금 더 흘렀을 때는, 아무것도 듣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초점 없는 눈만 흐리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아리나는 에른스트에 있는 모두의 아픈 손가락이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단 한 번도 밖에서 뛰어놀지 못하고 그저 작은 방 한편에 누워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고 있던 가엾은 아이.
결국 아리나는 6살 생일조차 맞지 못하고 죽었다.
"으아앙!"
방 안 가득 들어찬 카벨과 에리히의 울음소리가 그들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날만큼은 유진도 동생들을 달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함께 울었다.
아직 어린 형제들은 물론이거니와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님도 한동안 스스로를 추스르지 못했다. 마치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빈자리를 채울 방법을 알지 못한 채 야속하게도 시간만 하염없이 흘러갔다.
그래도 아리나가 죽고 약 일 년의 시간이 지났을 때쯤에는 벌어져 있던 상처가 차츰 아물 기미를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보기에만 그럴듯한 허울 좋은 착각이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어딘가 이상하다는 것을 유진이 처음 깨달았던 것도 바로 그 무렵이었다.
***
"어머니. 제 가정교사를 허드슨 씨로 바꾸기로 하셨다고요."
그날은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여상한 날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맞는지, 이제 그들은 아리나 생각을 할 때마다 울컥하여 목이 메지 않을 정도로는 각자의 슬픔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는 다시 황궁을 오가며 에른스트의 수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기 시작했고, 어머니도 가끔씩 다른 귀부인들의 초대를 받아 외출하곤 했다.
동생들은 아리나의 사후 키우기 시작한 강아지에게 '페니'라는 이름을 붙이고 예전의 활기를 얼마간 되찾았으며, 유진은 가문의 후계자라면 누구나 입학해야만 하는 아를란타의 학술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다.
"그래. 아버지와 상의해서 그러기로 했단다. 다음 주에 허드슨 씨가 방문하기로 했으니 그렇게 알고 있으려무나."
"네, 어머니."
"물론 우리 유진은 늘 알아서 잘하니 따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어머니는 옅게 미소 지었다. 유진은 그 미소를 보며 적잖이 안도했다. 하지만 그 안심 어린 마음이 산산이 부서진 것은 바로 그다음 순간이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깜빡 잊을 뻔했구나. 아리나에게 약 줄 시간이 다 되었는데."
한순간 유진은 지금 자신이 들은 말이 무엇인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하마터면 늦을 뻔했어. 어서 부엌에 다녀와야겠구나. 유진, 네가 먼저 아리나에게 가서 지금 자고 있는지 좀 확인해 주겠니?"
"어머니······?"
유진은 황망하게 선 채 어머니를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곧 방을 나가버렸다.
순식간에 손끝까지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기이하게도 심장이 쿵쿵 조금씩 그 박동을 빠르게 하기 시작했다.
유진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 어머니의 자취를 따라갔다.
"유진, 아리나에게 벌써 다녀왔니? 아직 자고 있지? 후후. 우리 아가는 잠꾸러기라니까."
어머니는 쟁반을 들고 유진을 지나쳐 그대로 계단을 올라갔다. 유진은 그 소녀처럼 웃는 얼굴에 덜컥 숨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말았다.
"어머나. 우리 아가가 어디에 있지?"
아리나의 방은 아직 에른스트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 문이 열린 것은 거의 몇 달 만에 처음이었다.
유진은 어머니가 죽은 아리나의 방에서 누군가를 찾듯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모습을 숨조차 쉬지 못하고 바라보았다.
"아하, 엄마랑 숨바꼭질이 하고 싶은가 보구나. 어디 보자. 커튼 뒤에 있을까?"
하얀 커튼이 펄럭, 눈앞에 선명한 잔상을 남기며 흔들거렸다.
"아리나. 우리 아가, 어디에 숨었니? 옷장 속에 있니?"
덜컹.
바로 그때, 등 뒤에서 누군가 유진의 다리를 붙잡았다. 유진은 숨을 들이켜며 급히 고개를 내렸다가 자신을 붙잡은 사람이 에리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내 밭은 숨을 내쉬었다.
"형, 저기 아리나가 있어······?"
"에리히, 이리 와."
에리히는 어머니와 함께 아리나를 찾기라도 하듯 방 안 곳곳에 시선을 옮기다가 그 안으로 뛰어들어 가려고 했다. 유진은 그런 에리히를 안아서 막았다.
"저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리나는 없어. 그냥, 그냥 어머니가 아리나 생각이 나서 잠시······. 잠시······."
그러나 목에 돌덩이가 박힌 것처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에리히의 어깨를 붙잡은 유진의 손은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한 번 감았다 뜬 뒤 단호한 어조로 어린 동생에게 말했다.
"에리히, 지금 네가 본 건 잊어버려. 알았어?"
에리히는 그의 말을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그래도 카벨에게 가 있으라는 형의 말을 따라 뒤돌아섰다.
"아리나, 어디에 있니? 아가야?"
유진은 차마 움직여지지 않는 고개를 다시 돌렸다. 방 안에서는 여전히 그의 어머니가 죽은 딸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그는 그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망연히 서서 지켜보았다. 깊은 호수에 홀로 내던져져 조금씩 익사당하는 것 같은 기분으로.
***
유진은 그날 저녁 자신이 본 것을 아버지에게 말했다.
"의사를 불러야겠구나."
에른스트 공작도 크게 동요한 듯 눈동자의 흔들림을 감추지 못했다.
"유진, 한동안 카벨과 에리히는 네게 맡기마."
"네, 아버지."
하지만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으면서도 에른스트 부인은 이따금 죽은 딸이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하곤 했다.
그녀의 증상이 말끔히 사라진 것은 기분 전환을 위해 떠났던 여행길에서 어린 여자아이를 데려온 직후부터였다.
그것이 바로 하리였다.
유진은 여동생의 자리에 끼어든 그 작은 여자아이가 너무나도 싫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그 후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부의 목소리를 집어삼키고 말았다.
"뭐야, 난 싫어! 쟤가 왜 내 동생인데?"
"쟤는 아리나가 아니잖아? 그런데 왜 같이 살아야 해?"
부모님은 밖에서 데려온 여자아이를 정말 딸처럼 생각하기라도 하는지 지극정성으로 보살폈다.
단순히 그 아이가 여동생의 자리에 대신 굴러 들어온 사실 자체에도 큰 충격을 받았던 형제들이 그 모습을 보고 더욱 불만을 가지게 된 것은 당연했다.
작고 무력한 여자아이가 분노의 대상이 된 것은 순식간이었다.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에 맺혀 있던 고름이 한순간에 터져 나온 것과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그동안 꾹꾹 눌러 담고만 있던 이 지독한 불안감을 해소할 만한 곳이 필요했던 것뿐인지도 몰랐다.
스스로 비열한 행동인 줄 알면서도 유진 역시 하리를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오는 가시 돋친 말을 제어하지 못했다.
"미안해."
그럴 때마다 하리는 그에게 사과했다. 아이를 마주할 때마다 유진은 점점 더 가슴이 갑갑해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했다.
그래도, 그래도 너는 살아 있잖아. 살아서, 하루하루 숨 쉬는 일만으로도 끔찍하게 고통스러워했던 내 여동생의 자리를 차지했잖아. 그리고 그것으로 우리에게서 어머니와 아버지까지 빼앗아 가 놓고.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으로 엉킨 격한 감정들로 엉망이었다.
알고 있었다. 이것이 타당하지 않은 생각임을. 하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누구도 그에게 이런 식으로 거칠게 날뛰는 마음을 삭이는 방법을 알려 주지 않았기에.
그래서 유진은 그냥 외면했다. 그들의 미움을 받고 있는 아이 역시 이제 겨우 7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러는 것이 가장 편했기 때문에.
***
"이상해."
"응?"
문득 중얼거린 유진의 혼잣말에 가정교사인 허드슨이 책을 읽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유진은 허드슨이 시키는 대로 연표를 정리하다 말고 기이한 느낌을 받아 손을 멈춘 참이었다.
집이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귀를 기울여도 문밖에서는 어떤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그의 의문을 안다면 지금의 허드슨처럼 무슨 소리냐는 듯한 표정을 지을 것이었으나, 유진은 어떤 본능에 이끌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휴버트!"
계단을 내려오며 집사 휴버트를 불렀으나 아무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몇 번을 외쳐도 마찬가지였다.
"카벨,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 없었어?"
"응? 무슨 일?"
카벨은 웬일로 혼자 방에 틀어박혀 놀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카벨이 가지고 놀고 있는 장난감은 과거에 그가 며칠 동안 아무리 애원해도 에리히가 절대 빌려주지 않던 것이었다.
원하던 장난감을 손에 넣게 된 카벨은 완전히 거기에 정신이 팔려 유진의 물음에도 건성으로 대답했다.
"에리히는 어디 있어?"
"몰라. 페니랑 놀고 있겠지. 슈우웅!"
갑자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유진은 카벨의 방을 나와 다른 사람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복도를 걷는 동안 집사 휴버트를 비롯한 사용인들이 한 명도 눈에 띄지 않았다.
"에리히!"
"멍!"
그의 부름에 대답한 것은 페니였다. 유진은 그들이 다 같이 모여 있곤 하던 놀이방에서 페니를 껴안고 있는 에리히를 발견했다.
"지금까지 혼자 있었어?"
"아니, 페니랑 같이 있었는데."
그런데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에리히의 얼굴에서 이상한 낌새가 엿보였다. 잘 보니 동생은 유진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